톡- 토독- 차가운 빗방울이 바다 위에서 넘실거리는 선실의 창문을 두들긴다.
올해로 18살이 되지만 조그마한 체구의 소년 지용이 커튼을 꼭 잡고는
거세게 출렁이는 바다와 먹구름으로 뒤덮인 하늘을 올려다본다.
"유모, 우리 정말 괜찮을까?"
안절부절하며 유모를 쳐다보는 지용을 어릴때부터 어르고 달래온 유모는
우유 한잔을 건네며 이 작은 도련님을 다독인다.
"괜찮아요 도련님. 선장님도 선원들도, 모두 베테랑이지 않아요?"
특유의 뭉근한 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언제 불안했냐는듯 해맑게 응- 하는 지용이다.
지용은 저벅저벅 침대로 가서 누우며 옛날 이야기를 읽어달라고 칭얼댔다.
유모의 동화책 읽어주는 소리가 호롱불만 켜진 선실을 어둑하게 울렸다.
"목 말라....."
지용은 잘 떠지지 않는 눈을 애써 끔뻑이며 부릅뜨려고 노력했다. 짠 바닷냄새가 코를 간지럽혔다.
얼굴은 모래가 잔뜩 말라붙어있고 옷도 흠뻑 젖었다 마른것처럼 바다냄새가 깊게 물들어있었다.
주위는 온통 하얀 모래사장, 그리고 아는 이는 없다. 아니 사람 자체가 그 누구도 없었다.
어릴때부터 대부호의 아들로 태어나 온실 속의 화초처럼 늘 주위에는 시중 들어주는 사람이 있었던 지용에게는
아무도 없다는 것부터가 큰 공포였다. 까맣고 빛나는 눈에 공포를 잔뜩 머금은 채로 주위를 조심히 둘러보자
새파란 바다와 자신이 앉은 끝도 없는 모래사장, 그리고 뒤로 펼쳐진 정글같은 숲이 다였다.
"...섬인가...?"
지용은 애써 침착하듯 입 밖으로 아무말이나 씹듯이 내뱉었지만 공포는 가실턱이 없었다.
입에 남아있던 짠내와 모래알갱이를 침 섞어 뱉어낸 뒤에 일단 이 곳이 어딘지 알아야한다고 자위하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으아아악!!!!"
갑자기 누군가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앉아있는 지용의 어깨를 두드렸다.
톡톡- 나를 좀 봐주세요 하는 작은 표시. 하지만 긴장하고 있던 지용은 크게 소리지르며 일어나 달려 수십발자국이나 멀어졌다.
"누..누구야...너...?"
버릇처럼 몸을 더듬거리며 아버지가 남자는 호신용으로 필요하다며 챙겨주신
작은 단도를 찾았다. 하지만 낭패였다. 바닷물에 휩쓸려 바닷속 깊이 휘말려갔는지 몰라도
늘 허리에 매달려있던 단도집은 지용을 놀리듯 휑하니 비어 있었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을 한 소년. 지용과 같은 동양 사람이라는것은 일단 확실하게 느껴졌다.
심장이 쿵쾅거리고 머릿속에 혼잡해지는걸 느낀 지용은 일단 상대가 자신을 헤치려는건 아니라고 판단했다.
"....누구세요 당신..."
지용은 아직 경계의 빛이 만연한 기세로 여차하면 도망칠 수 있는 자세를 취하며
하지만 아까보다는 한층 정중한 누그러진 말투로 상대의 이름을 물었다.
순간 상대방 남자가 웃었을 때 역광으로 햇살이 뒤에서 비쳐왔고 지용은 그의 미소가 빛난다고 느꼈다.
남자는 양 손을 들고 너를 헤치지 않을거라는 듯 조심 조심 한 발자국씩 다가왔다.
일단 무기는 없는듯 하지만 경계하며 보고있던 지용 곁까지 와선 털썩 주저앉은 남자는 모래사장에 글자를 적어내려갔다.
'이승현.'
글자를 가리키며 헤실헤실 웃는 승현은 지용을 올려다봤다.
지용은 직감적으로 그때 깨달았다. 아, 이 사람은 말을 못하는 구나.
"저는...권지용....난 권지용이야."
지용은 어느새 훌쩍 일어나 경쾌하게 손을 쭉 뻗어 지용의 손을 잡고 신나게 흔드는 승현에게 휘둘려지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인지 또 그 무언가에 대한 복잡한 생각들도 공포도 이미 지용에게서 사라진지 오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