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제멋대로 오지,'
'..............'
'말도 안듣고.'
구름성
2
'언제 또 쓰러졌는지 눈을 감고 느끼는 손의 촉감이 침대 위에 있다는 걸 알게했다. 엄마 또 놀랐겠네. 일어나자마자 든 생각은 그것 뿐. 분명 눈을 뜨면 눈 앞엔 죄다 하얀 환자복을 입은 사람들, 그리고 체크하는 간호사 언니들이 있겠지. 그리고 서서히 일일드라마 소리가 들릴거고, 과일을 써는 소리도 들릴거야. 맞지? 그래, 맞아. 늘 나도 모르게 쓰러지고 눈을 떠보면 그 풍경이었으니.
"일어났어?"
그 풍경,
"... 엄마?"
낯선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눈을 더욱 꼭 감았다. 아니야, 우리 엄마 목소리가 아니다. 그리고 느껴지는 감촉. 따스하지만 낯선 감촉. 그 감촉에 눈이 희번뜩 뜨여졌다. 그러자 눈 앞에 펼쳐진 건 내가 상상했던 그 풍경이 아닌 전혀 다른 풍경이 날 반기고 있었다. 온통 반짝이고 화려한 것들 투성이. 마치 동화 속인 것같은 이 곳은 어딘지 알 수가 없었고, 또 내 눈 앞에서 지금 내 손을 잡고 있는 이 남자는 누구며, 우리 엄마는 또 어디있으며. 혹시나 내가 몇 년을 잠들어 있었나? 하는 생각이 기습해 왔지만 생각해보면 그건 또 아니였다. 난, 시간이 정해져있는걸.
"누구야, 당신."
일단 문제의 이 남자 정체부터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일어나 두리번 거리다 그를 보며 묻는 순간까지도 그는 내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마치 아기가 엄마 손을 잡듯이. 남자는 내 물음에 한껏 울상이 된 표정으로 날 바라보며 말했다.
"기억, .. 안나?"
"... 우리 본 적 있어요?"
"정말, 정말 기억 안 나는거야?"
도대체 무슨 헛소리를 하는건지 모르겠다, 이 남자는. 안그래도 모르는 곳에 끌려 와 당황스러운 사람한테 자기 모르냐고 대뜸 묻는건 무슨 매너인지. 나는 고개를 저으며 손을 빼내며 단호하게 말했다.
"아뇨, 몰라요. 당신 본 적 없,"
"유타, 당연한거야. 걔가 너 기억 못하는건."
당신 본 적 없다고 딱 잘라 말하는데, 갑자기 누군가 들어오더니 더 헷갈리는 말을 하고 있다. 당연하다니, 기억 못하는게. 아니 그보다-
"당신들 누군데 남의 병실 막 들어와요?"
내 물음에 방금 들어 온 그 남자는 마구 웃더니 곧 수긍한다는듯 고개를 끄덕이며 아직도 울상인 남자 옆에 나란히 앉았다. 비몽사몽한 채로 있어 잘 몰랐는데 둘 다 얼굴 하나는 꽤나 잘생겼다. 아, 연애 한 번 못해 본 중생 이제서야 가여이 여기시는건가요 하늘이시여. 그래도 이상한 사람들은 싫은데 말이죠.
"난 태일이야. 문태일. 저 울상인 애는 유타."
"... 아."
아까 뭐라 한 이후로부터 계속 고개를 숙이고 중얼거리는 울상, 아니 유타를 돌아보니 이젠 눈물까지 흘리려 한다. 아- 이를 어째.
"여주가 날 기억 못하다니, 말도 안돼 ..."
글쎄, 난 당신 본 적 없다니깐.
"여긴 어디에요? 아는 병원 같진 않은데. 침대도 휘황찬란하고..."
"꿈 속."
예?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미간을 힘껏 찌푸리며 말 대신 표정으로 답하자 이런 날 예상이라도 한 듯 그는 작게 실소를 터뜨렸다. 그리고는 헛기침을 두 번하더니 말을 이어갔다.
"너만의 세계, 너가 창조주인 곳."
"에...?"
"꿈 속 맞아. 그러니 너가 쓰러졌어도 그 어떤 의사도 오지 않지."
"고통이 없는 곳이니까."
자신의 말에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 내게 그는 창 밖 볼래? 물으며 턱 끝으로 창가를 가리켰다. 그의 시선을 따라 머문 곳은 그야말로 입을 떡 하니 벌리게 만들었다. 하늘은 분홍빛, 그리고 노란빛. 요즘 들어 가끔 창 밖에서 진한 분홍빛, 보라빛 하늘을 볼 때마다 마치 꿈 속에 있는 기분이였는데 지금 여기서 본 하늘빛은 그야 말로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였다. 태어나 한번도 이런 하늘을 본 적이 없다. 연한 분홍빛에 별들은 또 어찌나 반짝이던지. 달은 또 왜그리 크고 찬란하게 빛나던지. 비로소 그 풍경을 보고 나니 아까 그의 말들이 조금은 이해가 갔다. 어찌되었든, 여긴 내가 사는 현실은 아니구나.
"너가 만든 세상이야, 다."
".. 내가요, 이걸 다?"
"당연하지. 너가 창조주라 했잖아."
창조주. 정말 이게 사실이라면, 아니 정말 내가 만든 꿈이라면.
"여기선 고통도 없다했죠,"
"응, 맞아."
"나가요, 우리."
".. 어?"
"가능한한, 많이 담아두는게 좋을 것 같아서요. 이 곳."
+===
Cloud, 황자, 민형
이름만으로도 위엄이 있는 곳, 황궁. 그 넓은 곳에서도 유독 빛나는 곳이 있다. 바로 황자가 거주하는 이 곳, 동궁. 황자 민형은 초연한 상태로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저 멀리 유타의 왕국에서 푸른 잎들이 무성해진게 눈에 띄었다. 정말, 정말 그녀가 왔구나. 그 생각에도 민형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그의 옆에 서 있던 비서 하랑이 연락을 받고선 그에게 말했다.
"방금 일어나셨답니다."
"..... 네. 알겠어요."
"저, 근데. 기억을 못하신다 합니다."
"그러겠죠.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데."
당연한 일이였다. 그녀가 자신을 비롯한 모두를 기억 못하는 것은. 그만큼 시간이 지났으니까. 그 생각을 하던 민형은 다른 생각에 입꼬리를 올렸다. 아,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의 조소에 옆에 서있던 하랑이 그를 쳐다봤다.
"기억하고 싶지 않을 수도 있겠네."
좋은 기억은 아니였을테니까.
====
꿈 속은 그야말로 내게 신세계였다. 내가 만들어서 그런지, 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잔뜩 구성되어 있었다. 간혹 보이는 어렸을 때 군것질하던 것도 있어 더욱 흥을 키웠다. 걱정이 없었다. 적어도 여기서만큼은. 몸도 아프지 않았고, 견뎌내야 할 시간의 무게 또한 없었다. 마냥 좋았다, 마냥. 그들이 더 좋은 걸 보여주겠다며 따라간 곳은 모든 나라들이 한 눈에 보이는 산 꼭대기였다. 파란색, 분홍색, 초록색, 금빛 노란색, 투명빛의 하늘색.
"근데 두 사람도 내가 만들었어요?"
".. 어? 뭐, 그렇지."
"무슨 일하는데요?"
"유타는 왕이야, 저기 회색빛 나라 보여?"
"나무 많은 데?"
"응, 저기. 저 곳 왕이야."
역시, 어렸을 때라 그런가. 왕자 공주 놀이 한참 할 때라 얘네들도 그렇게 만들었나 보네. 샐샐 웃으며 그곳을 바라보는데, 뒤에서 한동안 말이 없던 유타가 말문을 열었다.
"아무것도 없었어. 너 오기 얼마 전까지만 해도."
"..... 아무것도 없다니?"
"말 그대로 회색빛, 잿빛이였어. 나무는 당연하고, 작은 잡초조차 자랄 수 없는."
"........"
"너가 와서 다행이야. 심었던 꽃이 이제야 뿌리 내릴 수 있게 됐거든."
"고마워, 진심이야."
언젠지는 모른다. 그 뒤에 그들이 말하길, 내가 아주 어릴 적 이 곳에 왔었다고 했다. 그들은 이 곳에서 늙지도, 죽지도 않고 나만을 기다렸다고 했다. 황국까지 포함 다섯 국이 모두 나 하나를 위해 여태껏 살아왔다고 했다. 언제 다시 돌아올 지 모르니까, 하루하루 그렇게 살았다고. 무슨 느낌이였는지 말로, 글로 형용하기엔 어려웠다. 고마운데, 너무 고마운데. 미안하지만 난 기억에 없는걸.
"황자가 아마 여기 중에선 널 제일 보고파 할거야."
"... 황자?"
"응. 너가 걔 은인이니까."
"황자는, 어디있는데요?"
"황자보다 괴로웠던 사람은 나였단 걸 왜 안말하는지 모르겠네."
"왔네, 재현."
내 물음에 대신 들려온 말은 다름아닌 뒤에서였다. 태일이 재현, 이라 부르는 사람. 조심히 뒤를 돌아 그를 보려는데, 갑자기 날 자기 품 안에 넣어버린다. 아 잠깐잠깐. 얘는 나랑 또 뭔 사이였던거야. 분명 어렸을 때라고 했다. 어린 주제에 뭔 남자들만 잔뜩 만들어 놓은건지. 아, 존경스럽다 과거의 나.
"미안, 보자마자 반가워서 그만."
"아아, 아니에요."
"진짜 한번만 더 막 안으면 죽는다."
"이 정도는 이해해야되는거 아닌가."
"내가 왜."
살다살다 별 일을 다 보겠다. 저 잘생긴 셋이 지금 나 하나를 두고 싸우다니.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지려던 찰나, 아까 말했던 황자 얘기가 생각났다. 은인이라 했다. 내가 그를 살렸다고. 누구보다 날 더 보고 싶어 할 거라고.
"이야기는 차차 하고."
"황자한테 데려다 줘요. 나도 보고싶어."
황자, 그를 봐야겠다.
====
방금 도착했던 그의 이름은 재현이라고 했다. 그 또한 한 나라의 왕이라며 이들 중 제일 잘나간다고 했다. 그 말에 나머지 유타, 태일은 어이없지만 어쩔 수 없이 인정한다는 분위기였다. 자신감에 차있고, 조용조용한 것 같지만 또 그런건 아닌 것 같고. 그게 현재의 나에게 있어 그의 첫인상이였다. 뭐, 과거의 내가 그를 봤을 땐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그의 말로는 내가 그를 제일 좋아했다고 한다. 사랑한다고까지 했다. 그 말을 하자마자 미간을 좁히는 날 보곤 곧바로 말을 정정하긴 했다. 그냥, 그냥 좀 많이 좋아했다고. 나도, 너도.
시덥잖은 말들을 주고 받다 어느새 황자, 그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황자, 총 4개국을 총괄하는 총국의 왕자. 뭐, 나름 기대가 된다. 당신도 내가 만들었을테니. 잠깐 기다리라며 그의 집무실로 신하가 들어가고, 우리 넷은 문 밖에 서있었다.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니, 투명한 하늘빛으로 둘러싸여있는게 반짝반짝하니 예뻤다. 청량해, 분위기.
"근데,"
"........"
"얘는 여기 어떻게 온거야?"
날 가리키며 묻는 재현에 나는 모르겠다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야, 난 눈 떠보니 여기였는걸. 내 행동에 유타가 먼저 답했다.
"황국엔 내가 먼저 도착했어. 얼음이 녹았거든."
"왔더니, 여주가 있었어?"
"응. 이미 누워있더라고. 황자 방에."
유타 말에 아까 내가 눈을 뜬 곳이 황자 방이라는걸 알아챘다. 그래서 그렇게 화려했구나. 그렇다면 어떻게 날 여기로, 아. 그러고보니.
'꼭 제멋대로 오지,'
'말도 안듣고.'
"... 황자였나."
잠결에 들린 것 같던 말소리. 황자, 그 일지도.
"들어오시랍니다."
드디어, 당신을 만난다.
+===
"안으로 모실까요."
"....... 잠시만."
그녀가 깨면 그들이 이 곳으로 올거라는 것 정도는 민형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민형은 곧바로 문을 열지 않았다. 두려워서가 아니였다. 미안해서였다. 민형은 잠깐씩 떠오르는 과거의 일에 눈을 감았다. 생각하기 싫었다.
과거의 민형에게 있어 여주는 전부와도 같아서, 그녀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기세였다. 그 날도 그랬다. 언제 다시 돌아올 지 모르는 그녀를 위해 좋은 기억만 안고 가라고 그녀에 대한 나쁜 기억들, 위험한 기억들을 갖고 있는 금지의 영역, 하자드에 들어갔다. 무모했지만, 차라리 이 곳에서 사라져도 괜찮았다. 없앨 수만 있다면, 그녀가 괴롭지만 않을 수 있다면.
'민형아!!!'
'오지마! 정재현, 데리고 나가지 않고 뭐해!!!'
'싫어, 놔! 이민형!!!'
"...... 하랑."
"예, 황자님."
"기억, 못한다 했죠."
"... 예."
"괜찮겠죠."
"......"
진실로 된 답을 원하는 그에 하랑은 잠시 뜸을 들이다 천천히 입을 뗐다.
"뭐, 꿈 속이니까. 괜찮겠죠."
"금방 잊혀지는게 꿈이니까."
그 대답에 민형은 고개를 숙이며 피식 웃었다. 곧 고개를 든 그는 살짝 미소를 머금고는 하랑에게 말했다.
"들이세요, 우리 창조주."
그 또한, 그녀를 다시 마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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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녕이. 흑. |
암호닉
[빵싯빵싯] [윙윙] [하쿠] [디보] [써니호]
♡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