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녹화 들어갈게요. 스탠바이 해주세요!”
간만의 스튜디오 촬영에 아, 오늘은 한숨 좀 돌리겠구나, 생각한 내가 바보였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분주한 현장에, 아니 어째 좀 더 정신없는 상황에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단 말이 이런 거구나- 싶었다. 손목에 찬 자그마한 시계를 한 번 보고는 한솔 선배 곁으로 다가가려던 때, 순간 손에 허전함이 전해졌다. 어머. 내 대본 어딨니.
“선배, 여기 대본요!”
호랑이도 제 말하면 나타난다더니, 뒤에서 들려오는 반가운 목소리에 이 구세주는 누구신가, 하고 고개를 돌렸다.
“진짜 제가 맨날 챙겨드려야 한다니까요 선배는.”
“동영아!”
으이구, 하는 표정으로 나를 한 번 보고는 내 손을 가져가 친히 대본을 쥐여주는 김동영. 하여간 내 후배면서도 이런 일은 나보다 더 야무지다니까.
“진짜 땡큐. 너밖에 없다.”
아무 말 없이 입꼬리를 살짝 들어 올리며 웃어 보이는 동영의 어깨를 두어 번 가볍게 치고서는 저만치 보이는 한솔 선배에게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선배, 또 아무 데나 대본 내팽개치지 마요!”
김동영
“오케이. 다들 수고했어요.”
한솔 선배의 컷사인과 함께 여기저기서 서로 수고했다는 형식적인 인사가 쏟아져 나왔다. 와 퇴근!이라는 행복한 생각에 잠겨있는 것도 잠시, 뒤에서 내 어깨를 톡톡 치는 누군가의 손길에 반사적으로 몸이 돌아갔다.
“너 왜 멍을 때리고 있냐.”
다음 주 분량 편집 다 했어? 자신의 대본을 내게 넘겨주며 묻는 한솔 선배가 그 때 얼마나 얄미웠는지 한 번 얘기해 보라면 아마 한 시간치 연설도 하고 남았을 거다. ‘편집’이란 단어에 순간 울상이 된 내 표정을 보고는 수고~ 라는 짧막한 인사와 함께 저만치 멀어지는 한솔 선배를 보며 자살 충동을 잠시 느꼈다. 하늘이 무너져내리는 듯한 기분을 뒤로하고 서둘러 뒷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스튜디오엔 어느덧 사람들이 하나둘 빠져나가 소수의 스탭들을 제외하고는 다 사라진 후였다.
“야.”
“누구세… 헐 깜짝아!”
무거운 스튜디오 문에 체중을 실어 열려던 때, 커다란 손이 예고도 없이 내 어깨 위로 올라왔다. 누가 나를 또 부려먹으려 하나.. 하고 한껏 짜증이 난 표정으로 뒤를 돌아 봤을 땐, 예상외의 인물이 내 앞에 서 있었다.
“오빠가 왜 여기 있어. 매니저가 안 찾아?”
문태일. 데뷔 초창기부터 꿀음색, 가창력으로 떠서 지금은 여러 방송에도 나오고, 음원도 꾸준히 내는, 흔히 말하는 누구나 알 법 한 연예인이다.
“야 오랜만에 내가 너네 프로에 게스트로 나왔는데, 반겨 주지도 않냐 넌? 완전 실망.”
“아이구 그래 반갑습니다 반가워요 문태일씨. 우리 어제도 봤거든? 실망은 무슨.”
문태일의 되지도 않는 말에 콧방귀를 뀌며 대꾸하자 내가 얄밉기라도 한 건지 입술을 살짝 깨물고 꿀밤을 먹이는 시늉을 한다.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태일 오빠와는 안지 꽤 오래된 사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내가 어렸을 때, 한창 뭐든 될 수 있다고 믿었을 때, 나와 ‘가수’라는 같은 꿈을 꾸고 또 함께 공유한 그런 사람이 태일 오빠였다. 물론 지금 난 그 꿈을 접었고 내 앞에서 짓궂은 표정을 짓고 있는 이 사람만 그 꿈을 이뤘지만.
“근데 왜? 나 기다린 거야?”
“어.. 아니 그냥. 이 뒤에 라디오 가야 하는데 시간이 좀 비어서.”
“그런 거라면 얼른 라디오국으로 가시길 바래요~ 난 편집하러 가야 하거든. 안 그럼 한솔 선배가 나 갈궈.”
한껏 얼굴에 울상을 한 채 오빠에게 손을 막 흔들어댔더니 내 산만한 손을 자신의 손으로 잡아 내리는 태일이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라 얼른 손을 빼내려고 했지만, 그럴수록 더 세게 쥐었다. 누가 보면 어쩌려고.
“알았어. 너 갈굼 당하면 안 되니까 얼른 편집하러 가.”
두어 번 내 머리를 쓰다듬더니 그제야 손을 빼내었다. 정말 누가 볼까 봐 심장 쫄려 죽는 줄 알았다.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내게 손을 흔드는 태일을 뒤로하고 얼른 장비를 챙겨 스튜디오 문을 열었다.
“뭔 일 있으면 전화하고. 알았지?”
문태일
아, 힘들다. 편집실의 문을 열자마자 양손에 든 장비들을 행여나 부서질까 살포시 내려두고는 의자에 점프해 착륙하듯 앉아 기댔다. 이 의자는 대체 누가 만든 거야, 편해 죽겠네. 이 푹신한 의자에 기대면 정말 피로가 싹 씻기는 느낌이었다. 그 느낌도 잠시, 내 앞에 놓인 커다란 모니터가 자꾸만 편집을 하라고 부추기는 것 같아 눈을 질끈 감았다. 아, 이 순간은 정말 격렬하게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아,라고 느낄 때쯤 누군가 편집실의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김 피디, 커피 좀 사 와주라. 난 아이스 아메리카노 큰 거. 알지?”
그래, 문 여는 소리가 들릴 때부터 뭔가 재수 없는 느낌이 느껴지더라. 한솔 선배 진짜 얄미워 죽겠다. 맘 같아서는 싫습니다! 니가 먹고싶으면 니가 가십시오! 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그러면 안 될 것이란 걸 나도 알고 하느님도 알고 부처님도 알았기에 난 그저 억지웃음을 지으며 알겠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한참 한솔 선배를 욕하며 사내 카페로 향했다. 일층입니다. 엘리베이터가 멈추자마자 새어 나오는 하품을 참지 못 한채 터덜터덜 걸어나갔다. 카페에 가까워질수록 많이 들어본, 아주 익숙한 목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요새 찾아온 불볕더위에 많은 피서객들이 해변가로 …’
카페 맞은편에 걸린 티브이에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뉴스데스크에 앉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뉴스를 전하는 정재현을 보고는 나도 모르게 작은 웃음이 새어나갔다. 평상시의 내가 아는 정재현과 수트를 정갈하게 입고서 카메라를 통해 비추어지는 정재현이 내 머릿속에서 오버랩되어 약간 낯선 느낌을 주었다. 짜식, 아나운서 맞네. 뉴스에서 보니 좀 멋있어.
“아이스 아메리카노 큰 거 한잔이랑 아이스 바닐라 라떼 작은 거 한잔 주세요.”
진동벨을 받아들고 창가 자리에 잠시 엉덩이를 붙였다. 티비의 뉴스는 어느덧 정재현에서 해외 특파원으로 넘어가있었다. 잠깐의 지루함을 달래고자 바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들자 ‘카톡 3개’라는 알람이 화면에 띄워졌다.
김여주
오늘 밤에 치맥 어때 콜?
오빠가 쏜다
오빠는 무슨, 나보다 한 달 빨리 태어난 주제에.
‘이상 뉴스 데스크였습니다. 시청해주신 여러분 고맙습니다.’
티비 속에서 엔딩 멘트를 내뱉는 정재현의 얼굴을 한 번 스쳐 보고는 정재현과의 카톡창을 열었다.
치맥 콜
정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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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잡은 처음인데 잘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