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그게 너무 힘들던데. 그 좋았던 기억까지 다, 그 아이가 기억하지 못한단게."
구름성
5
+====
"갖고싶어, 너의 자리를. 민형아."
"........."
민형은 도영을 이해한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나라도 그랬을거라고.
민형은 도영을 원망한다. 그럴 수는 없는거라고, 나라면 그러지 않았을거라고.
어느 날 눈을 뜨니 눈 앞엔 자신을 바라보며 해맑게 웃고 있는 단 한사람이 서있었다. 자신을 김여주라고 소개하고, 안녕 하며 웃는 그녀를 본 그 날부터 민형은 알았다. 아,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구나, 내가 사랑해야 할 사람이구나. 그렇게 처음부터 여주는 민형에게 있어 창조주를 넘어서 지켜야 할 사람, 가장 소중한 사람이였다. 그녀는 매번 민형에게 가르쳐주었다. 여기는 꿈이야, 하고. 내가 깨면- 이라는 말을 매번 반복하며 여주는 민형에게 또 다른 세상을 선물했다. 그렇게 여주가 가져다 준 첫번째 세상에서 만난 사람이 바로, 도영이다.
두 사람의 첫만남을 떠올려볼까. 민형에게 있어 도영은 여주가 준 하나의 선물이였다. 그녀의 세상에서 태어나 처음으로 받는 선물. 너희들은 제일 친한 친구야, 알겠지? 라는 말에 민형은 어색해하며 어깨를 으쓱였고, 그에 도영은 해맑게 웃으며 민형의 어깨에 손을 올렸었다. 친하게 지내자! 하면서. 그 특유의 유쾌한 웃음을 보이면서. 어색하면서도 묘한, 그들의 첫만남.
민형은 잠깐 저들의 첫만남을 떠올리다 나직하게 그에게 말했다.
"가져, 원한다면. 힘도 키웠겠다, 가져. 이 자리."
평소와 다르게 살짝은 풀린 눈을 하고, 허탈하게 웃으며 민형은 말을 이었다.
"근데 방법이 잘못됐어."
"이 세계는 너가 원하는대로 절대 흘러갈 수가 없다는걸 너무 간과했잖아, 넌."
창조주의 실수였다. 그녀의 세계에 또 다른 창조물을 넣은 것은. 또, 그녀의 세계에 그녀, 자신이 등장한 것은. 모두 갖고 싶어하는 열매가 있다. 하지만 손 대어선 안되고, 그저 바라보고 지켜주어야만 한다. 그 열매를 따는 순간, 비극은 시작된다.
'... 엄마 ...'
아, 이런.
"잠깐 나갔다 올게. 중요한걸 깜빡했었어."
그래, 중요한건 지켜주는거지.
가지는 게 아니라.
민형은 아마, 그걸 알고 있었을거다.
=====
"민형, 이민형"
".........."
"... 맞아요?"
황자,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머릿속엔 단 한 이름밖에 떠오르질 않았다. 이민형. 들은 적도 없고, 그가 알려준 적도 없다. 그냥 떠올랐을 뿐. 그 이름을 내뱉자마자 황자는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날 바라볼 뿐. 맞냐고 묻는 것에 그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내 어깨를 잡고 있던 손을 떼어 놀라 벌어진 입을 가렸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아마 그 순간은 1초가 10분 같이 느리게 흘러간 것 같았다.
"기억,"
"... 나는거야, 설마?"
전혀, 고개를 저으며 그를 바라보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의미로 그러는진 몰라도 그의 이름이 민형인 것은 확실해 보였다. 어디서 온 기억일까, 너의 이름은. 그 옛날 너에 대한 기억이 잠시 돌아왔던걸까.
황자는 잠시 눈을 감고 무언가를 다짐하는 고개를 끄덕이다, 내 손목을 잡아 날 일으켜 세웠다. 아까도 느꼈지만, 느낌이 낯설지가 않다. 익숙하고, 또 익숙해.
"어디가요?"
"어디든요."
아까까지 실컷 말을 놓더니 지금은 또 다시 존댓말이다. 무슨 변덕이야, 하다가도 그러고보니 왜 나 빼고 다들 말을 놓는거지? 란 생각에 황자에게 물었다.
"근데 황자님, 나 어렸을 때요. 모두하고 말 놓고 그랬어요? 막... 친구처럼!"
"..... 네, 아마도요."
"아 그럼 모두 친구인건가?"
멈칫. 그의 손에 이끌려 걸어가면서 이것저것 재잘대는 내가 아무래도 신경쓰였는지 황자가 걸음을 멈춰 돌아봤다. 꽤나 무서운 눈빛을 하며 그가 물었다.
"너가 생각하는 '친구'는 도대체 뭐죠?"
당황스러웠다. 갑작스러운 질문과 더불어 덮쳐오는 황자의 눈빛은 날 한껏 움츠러들게 했다. 뭐라고, 뭐라고 설명해야할까. 내가 생각하는 친구가 뭐냐고 물으면 나는, 나는. 한참을 망설이며 답을 찾는데 앞에서 그의 한숨이 들리며 다시 내 앞으로 등을 보인다. 뭐, 그렇게까지 씩씩 거릴 내용이였냐만은.
"......"
"......"
결국 난 답하지 못했고, 우린 목적지도 모르는 곳으로 계속 걸어갔다. 도대체 이 황궁은 얼마나 넓은건지 가도가도 끝이 안보였다. 언제까지 걸을 셈이야- 하며 투정을 부리려던 때, 내 손목을 꽉 잡고 있던 그의 손이 스르륵 내려갔다. 내려간 그의 손을 보고 있다, 그의 손바닥에 하늘색의 꽃잎이 내려앉는 것에 곧바로 고개를 들었다. 그렇게 내 눈으로 들어온 풍경은,
".... 세상에."
어디서도 볼 수 없는 푸른 하늘빛 꽃나무들이 그 넓은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아, 정말 꿈인가보다. 세상 어디에도 이런 꽃나무는 없을테니까. 한동안 영롱한 빛으로 둘러싸인 그 장관에 넋을 놓았다. 아 너무 예쁘다. 너무 예뻐서, 더 애처롭다.
어려서부터 하늘색을 유달리 좋아했던 난, 다른 아이들이 핑크! 할 때 꼭 하늘! 을 외쳤었다. 파랑색이 아니다. 하늘색이어야 했다. 그 색깔만이 줄 수 있는 청량한 느낌, 시린 느낌, 푸른 느낌, 청명한 느낌이 좋았다. 언젠간 그런 생각도 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 곧바로 머리색도 하늘색으로 바꾸고, 방 벽지 색도 하늘빛으로 칠할거라고. 아, 할 일이 많은데. 어려서부터 꿈꿔왔던 것들 다 하기엔 시간이 없구나.
짧게 한숨을 뱉으며 다시 그 나무들을 보는데, 옆에서 황자가 말해왔다.
"여기서의 시간은 당신이 지내는 현실의 시간과 다르게 흘러가요."
"........."
"그 곳에서 하루의 시간이, 우리에겐 10년의 시간이죠."
"........"
"잊고 싶은데 잊혀지질 않던데요. 창조주라 그런가."
나에겐 짧은 하루가, 그들에겐 10년이라-.
멍하니 그 얘기를 듣고 있으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느낌이 이상했다. 뭔가, 모순된 느낌이었다. 지금 내게 있어선 하루 하루가 절박한데, 그들에게 내 하루는 지옥과도 같았겠구나- 하는 생각에.
"힘들지 않았어요? 나 기다리는거."
"......"
물음과 동시에 그를 바라보자 바람에 꽃잎이 휘날리며 우리 둘 사이로 지나간다. 그 꽃잎은 묘한 힘이라도 있는건지 순식간에 둘 사이의 분위기를 바꿔놓았다. 아, 아니아니. 그의 분위기라 정정하자. 지금 그가,
"...... 아뇨."
황자가,
"지금 이렇게-"
민형이가.
"내 앞에 있잖아요."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
"여주가 울어."
"... 울고 있어."
유타는 느낌으로 알아챘다. 여주가 울고 있다는 것을.
하지만 그 감각은 민형에게 먼저 닿았다. 그래서 자리를 황급히 나가 여주에게 갔던거다. 유타는 매번 그렇게 한 발짝씩 늦었다. 그러니 다가설 수가 없는거지, 더 이상은. 그가 나간 이후, 유타의 말을 끝으로 방 안은 찬 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다. 어색한 침묵이라기 보다, 아주 조용하고, 고요한 신경전이었다. 그 침묵을 깨뜨리고 곧이어 재현이 말했다.
"넌, 어쩔건데?"
도영에게 한 말이었다. 여주를 여기에 남게 둘 거냐는 것. 물론, 지금 당장 민형의 자리를 갖고 여주를 옆에 영원히 두게 하고 싶어하는 그에게 물어봤자 돌아올 대답은 뻔할거라는 걸 알고는 있었다. 도영은 그에 그저 웃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당연한 것 아니겠냔 뜻이었다.
"그럼, 하자드는."
"없앨거야. 당연히."
"......."
"영원히 이 곳에 있게, 꿈에서 깨지 않게. 그렇게 만들거야."
"그럴 힘은 있고?"
그의 의견을 탐탁치 않은 눈으로 바라보던 태일이 툭 내뱉었다. 누가 뭐라 한대도 이 곳에 그녀를 계속 둘 수는 없다는 입장이었으니까. 태일의 말에 도영은 평소의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돌아와 그에게 오히려 되물었다.
"내가 왜 마법사가 됐는데?"
"적어도 민형이 보단 내가 나을, 아니. 비교할 수도 없을걸."
"기억하잖아. 죽을 뻔한 이민형 구한 사람, 나인거."
도영의 말이 맞았다. 그 옛날, 결국 민형을 꺼내 살린 건 그 누구도 아닌 가장 뒤늦게 도착한 도영이었다. 가장 안올 것 같이 그러다, 뒤늦게 나타나 여주가 의식을 잃었을 때 민형을 구하고선 사라진. 모두가 그 사실에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을 때, 재현이 입을 열었다.
"여주는 우릴 다 기억하지 못해."
"왜 그랬더라?"
"누구 때문이더라?"
"난 그게 너무 힘들던데. 그 좋았던 기억까지 다, 그 아이가 기억하지 못한단게."
+++++
"어떡해? 어떡해 재현아, 응?"
"괜찮아, 괜찮아. 아무 일 없을거야."
재현은 펑펑 우는 여주를 보며 최대한 침착하게 대응했다. 그녀의 등을 토닥이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고. 하지만 그것 뿐, 진정으로 그녀를 달랠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존재하더라도 알 수가 없었다. 재현은 전날 밤 자신에게 스치듯 말했던 민형을 생각했다.
'여주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걔한테 오는 나쁜 것들은 그냥 다 없애버리고 싶어.'
짧게 생각을 마친 재현은 낮게 미친놈, 하고 읊조렸다. 그렇다고 거길 가냐, 이렇게 울게 두는게 더 나쁜건데. 뭣도 모르면서.
"도영이, 도영이한테는 아직 연락없어?"
".. 응, 아직."
"아 어떡해, 어떡하면 좋아..."
재현은 그녀의 바람대로 그 위험한 곳에 데려가면서도 수만가지의 복잡한 생각들을 거치고 있었다. 만약 갔을 때 민형이가 이미 없으면 어떡하지, 그 모습을 여주가 보면 어떡하지, 뒤늦게 알고 따라간 유타, 태일은 괜찮은걸까. 그들이 없다면, 여기 이 곳은 어떻게 되는거지. 그러나 그 잡생각들은 결국엔 단 한가지로 결론이 났다. 창조주가 운다. 날 만든, 날 이 곳에서 살게 한 그녀가 운다. 그게 다였다. 그거면 모든 복잡한 것도 다 풀렸다. 그래, 뭐가 중요하겠어. 너가 중요하지.
"좀만 참아, 거의 다 왔으니까."
하자드에 다다르면 다다를 수록, 푸르던 하늘은 검푸르게 바뀌어 갔다. 먹구름이 잔뜩 끼고, 안개가 뿌옇게 시야를 가리는 곳. 이 곳에 나를 더 사랑해주길 바라는 그녀가 너무도 사랑하는 민형이 있다. 별로 원망스럽진 않다. 너가 행복하면 된거지, 내가 아닌 민형이를 보면서 말야.
"자,"
대신, 그녀의 기억 속에 내가 조금이나마 남아있었음 좋겠다.
"가시죠, 우리 창조주님."
기억해줄래? 날, 조금이라도 생각했다면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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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이런. 엄청 늦었죠! ㅠㅠ
제 현업 탓입니다. 흑. 아마 자주 이럴지도 몰라요! ㅠㅠ
오더라도 거의 일주일 간격으로 낼지도 모르구... 아이고 나참. 최대한 노력은 해보겠습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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