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이상한 상황이다. 처음보는 새끼가 내 손목을 잡고 놓아주질 않는다.
"야. 안 놔?"
녀석은 말 없이 무표정으로 날 쳐다보기만 했다. 그냥 붙잡기만 하고 있으니 시비거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할 말이 있어 보이지도 않는다. 평소 화도 잘내고 짜증도 잘 내는 나였지만 이 상황이 싫다기 보다는 의아했다. 아니, 신기했다. 규정을 무시한 녀석의 조금 긴 금발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표정. 그리고 잘생긴 얼굴. 마치 정지된 영화 속에 들어와 있는 것만 같았다.
"너 이름... 우지호?"
긴 침묵을 먼저 깬 건 그 녀석이었다. 내 가슴쪽의 명찰을 흘깃 보더니 확인하듯 물었다. 굵은 목소리가 인상적이었다. 녀석의 명찰에 새겨진 이름은 표지훈. 근데 명찰이 노란색이다.
"말 까지 말지? 색 구분 못하냐."
명찰이 노란색인 표지훈은 2학년, 초록색인 나는 3학년이다. 당당하게 말을 까는 표지훈이 어이가 없어서 허, 하고 바람이 새어나왔다.
"몇 반이야."
"말 까지 말랬지."
"몇 반인지 알려주면 안 깔게."
계속 무표정이었던 표지훈이 슬쩍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진짜 잘 생기긴 했네... 나도 모르게 속으로 감탄했다.
"2반."
마침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표지훈은 이제서야 내 손목을 놓아주고 반대편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무슨 일이 있었던거지? 약간 쓰린 속목을 만지면서 무언가에 홀린 듯 멍하게 서 있던 나는 다음 시간이 비문학이라는 것을 상기해내곤 반으로 뛰어갔다. 비문학년, 늦으면 존나 잔소리 하는데.
간신히 선생님보다 먼저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근데 뒤에서 수근거리는 소리가 귀에 박힌다. 야, 쟤 우지호, 표지훈이랑 뭔 일 있나봐. 복도에서 서로 장난아니게 야리던데? 뒤를 돌아봤더니 내 얘기를 하고 있던 여자애 둘이 헉, 하면서 입을 다문다. 시발, 내가 양아치도 아닌데 애들은 왜 날 무서워하지? 아니 그것보다 쟤네가 표지훈을 어떻게 알지? 난 옆에서 엎드려 자고 있는 박경의 어깨를 흔들어 깨웠다.
"아... 왜, 왜. 왜 깨워."
"너 표지훈이라고 아냐?"
"2학년 표지훈? 알지."
"뭐? 알아? 어떻게?"
병신, 우리 학교 다니는거 맞냐? 하면서 박경은 표지훈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작년 말에 전학왔는데 그 때 부터 잘생겨서인지 얘기가 많았다, 무섭게 생기고 덩치도 크고 머리도 양아치같은데 학교는 조용히 다닌다더라, 전에 있던 학교에서 사고쳐서 강제전학 당하고 일부러 조용히 다닌다는 소문이 있더라...
"뭐야. 여자애들이 만든 소설이냐?"
"그럴수도? 아, 맞다! 소문 중에 대박인게 뭔지 알아?"
박경은 뭔가 생각난 듯 킥킥거리며 내 귓 속에 대고 말했다.
"걔... 고자래."
박경은 뭐가 그렇게 웃긴지 애써 웃음을 참았다. 뭔 소리래? 그렇게 건장하게 생겨서 고자라니..? 고.. 고자라니...! 방금 전까지 손목을 붙잡히면서도 잘생겼다고 감탄하고 왔는데... 진짜 확 깬다.
"걔 잘생겼잖아. 우리 학교에서 이쁘다고 하는 여자애들이 아무리 꼬리쳐도 안넘어간대. 그 정도면 진짜 의심 할 만하지 않냐?"
"야... 맘에 안들었나보지."
"최진리랑 김사랑이 꼬리쳐도 안넘어갔다니까?"
"뭐... 시발, 뭐?!"
최진리랑 김사랑??!!! 놀라서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고 큰 소리를 냈더니 선생님은 물론이고 애들 시선까지 느껴진다. 애써 아무 일도 없었던 척 연필을 잡아보지만 이미 늦었다.
"우지호. 복도로 나가."
시발... 옆에서 웃음을 참는 박경이 얄밉다. 박경을 흘깃 째려봐 주고는 교실을 나갔다. 아직 3월이 가지 않아 찬 복도 바닥에 털썩 앉았다. 최진리랑 김사랑이라고 하면 우리 학교의 범접할 수 없는 여신급인데 걔네한테 안넘어갔다고? 얼굴이 예쁜만큼 쉽게 남자들이랑 붙어있지도 않는 둘이었다. 쉽게 말하면 열 번 찍어 안넘어가는 나무라고 할까? 백번을 찍어도 실패하는 주변 남자애들을 보며 난 찍어 볼 시도조차 못했는데, 표지훈은 저절로 넘어가는 나무를 피했다고? 진짜 그 새끼 고자구나. 확실하다.
결국 난 유난히 날 싫어하는 비문학때문에 수업이 끝날 때까지 복도에 앉아있었다. 앉아있는 내내 표지훈이 진짜 고자인가를 생각하느라 덜 심심하긴 했다만. 엉덩이를 탁탁 털고 반에 들어가 내 자리에 앉았다. 박경은 또 자는 중. 다음 시간 교과서를 꺼내려고 책상 밑을 뒤지는데 내 위로 그림자가 생겼다.
"야... 아니, 선배."
목소리만 들어도 누군지 알겠다. 유난히 목소리가 굵고 낮은 표지훈. 한 번 밖에 안들어봤는데도 구분이 된다. 내 앞자리의 의자를 돌려 나랑 마주앉은 표지훈은 생글거리면서 웃고있었다. 처음 봤을 때 계속 무표정이었던 것과 달리 잘 웃는 성격인가보다. 시발, 저렇게 잘생겼는데 고자라고? 이제 표지훈만 보면 고자라는 생각밖에 안들겠다. 그나저나 반 알려줬다고 진짜 찾아올 줄은 몰랐다. 바로 찾아올 줄도 몰랐고. 왜 찾아온지도 모르겠다. 뭐하는 새끼냐, 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