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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 화
* * * * *
약에 취해 의식을 잃고 있었던 그녀는 긴 시간을 지난 후에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올랐고 강제적인 피곤함으로 잠을 잤다. 얼마 후, 얕은 잠에서 깨어난 그녀의 눈꺼풀이 부들부들 떨렸고 이내 검은 눈동자를 드러냈다.
약과 잠의 기운이 남아 눈동자는 초점이 흐려 있어 흐리멍텅했지만 이내 맑아졌다. 그러나 그녀의 눈앞은 어두었는데 그 이유는 검은 천으로 덮혀 있었기 때문이었고 그녀도 그 사실을 깨달았다. 한치의 앞도 보이지 않아서 불안했고 무의식적으로 손을 들어 벗겨내려고 했다.
움직이려는 그녀의 의도와 다르게 손은 무언가에 묶여서 꼼짝할 수 없었으며 어찌나 단단히 묶었는지 도저히 움직일 수 없었고 손가락만 겨우 까딱거릴 수 있었다.
이러한 자신이 처한 상황이 당황스러웠고 왜 이런 일을 당해야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누, 누구 없어요?"
애처롭고 가녀린 목소리가 고요한 공간을 가로질렀지만 되돌아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점점 불안감이 증폭되었고 공포감도 뒤따라와 그녀를 부추겼다.
곧 울음을 터뜨려도 이상하지 않았지만 눈물은 나지 않았고 단지 입술과 턱만 부들거려서 그녀의 혼란스러운 감정을 대변(代辯)해주고 있었다.
그녀는 심호흡을 하면서 진정하려고 애썼으나 당치도 않는 현재의 처지는 그러한 노력도 부질없게 만들었다. 그래도 최대한 용기를 쥐어짜 불안과 공포를 극복하려고 노력했다.
"후으읍!"
여러차례 심호흡 끝에 그녀는 진정할 수 있었고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하려고 했다. 왜 이러한 일을 겪고 있는지 원인 파악에 나섰지만 텅 빈 기억만이 그녀를 반기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 없었던 그녀는 텅 빈 기억의 발자취를 쫓기보다 우선 떠오르는 기억부터 되살렸다.
"그래...난 수업을 마치고 친구들과 놀다가 헤어졌어...그리고..."
'불타는 금요일' 줄여서 불금이라고 부르는 금요일에 마지막 강의를 마치고 친구들과 시내에 놀러갔었다. 맛있는 식당을 찾아가 우아하게 식사를 하고 후식으로 즐겨찾는 카페에 가서 달콤한 시럽이 뿌려진 마끼아또를 마신 후에 멀티룸(multi room : 노래방 및 게임, 영화 등 다양한 놀이를 할 수 있는 룸으로 밀집된 가게)에 가서 친구들과 신나게 놀았었다.
그 다음 무엇을 하며 놀까 고민하던 찰나에 단골가게에서 예약을 걸어놓았던 물건이 들어왔다는 소식에 친구들에게 먼저 가야겠다고 말했고 친구들도 그냥 집으로 가겠다고 말했었다. 그렇게 친구들과 헤어져 단골가게에 가서 물건을 사서 나와 노점에 세워진 예쁜 액세서리에 시선이 팔려 잠시 구경했었고 그 후에 그곳에서 한 남자를 만났다.
"...그래...남자를 만났어..."
그랬다. 그녀는 그때 남자를 만났고 그 남자는 그녀가 꿈꾸던 이상형에 근접한 아주 멋진 남자였다. 훤칠한 키부터 단련되어 과하지 않는 근육이 은은히 드러나는 몸매, 근사한 얼굴과 나직한 목소리 그 모든 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남자의 데이트 신청을 받고 남자가 이끄는대로 따라갔다. 달콤한 상상을 그리면서 따라갔고 눈앞이 깜깜해지는 것을 느끼며 기억이 끊어졌다.
분명 남자와 함께 갔는데 자신은 손이 묶여서 어딘가에 누워있었다. 대체 어찌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어서 답답했지만 이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치밀어 오르는 생각이 그녀를 차가운 나락(那落)으로 끌어내렸다.
혹시 그 남자가 자신을 이렇게 만든게 아닐까라는 의심이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지배했다. 그러자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고 몸을 덜덜 떨었다.
또한 살갗에 닿는 서늘한 온도가 그녀의 몸을 에워싸기 시작했는데 공포(恐怖)가 주는 오싹함과 다른 추위였다.
"...추워..."
분명 원피스 위에 가디건을 입었던 그녀였다. 그런데 왜 이렇게 추울까 생각이 들었고 이리저리 뒤척임 끝에 무엇하나 걸리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들썩이던 몸짓을 멈추었다. 옷이 하나도 걸쳐져 있지 않은 것을 알게 된 그녀는 급속히 찾아온 두려움에 덜덜 떨었다.
짐작컨데 남자가 벗겨낸 것이리라. 미치도록 무서웠고 남자의 의중(意中)이 대체 무엇이길래 자신을 이렇게 벗겨놓고 묶어놓은 것일까 라는 호기심과 공포심이 뒤섞여 그녀를 죄어왔다. 손이 아닌 다리는 자유로웠지만 눈이 가려져 있었고 미칠듯이 찾아온 두려움에 그녀는 꼼짝할 수 없었다.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에 그녀는 몸을 덜덜 떠는 것조차 멈추고 숨을 죽였다. 그 소리는 기름칠 되지 않아서 끼익하고 열리는 귀에 거슬리는 소음보다 더욱 소름끼치게 그녀의 귀를 무참히 때렸다. 분명 남자가 들어오는 소리리라. 자신이 입을 떼어 말했을 때 아무 대답이 없었으니까 방금까지 남자가 없었던 것이 분명했고 어딘가 외출했다가 지금 돌아온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자신이 깨어났음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 손가락 하나조차 까딱이지 않았다. 자신을 데려와 이런 모습을 만든 이유가 결코 좋지 않을 것 같았고 깨어난 것을 안다면 혹시 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상만 해도 끔찍했지만 그 짐작은 사실과 다름없었다.
"깨어났구나."
남자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그녀의 예민한 귓가를 파고들었다. 목소리에서 한기(寒氣)가 느껴져 저절로 몸이 경직되었고 크게 움찔거렸다.
그것은 그녀 스스로도 제어할 수 없는 본능적인 두려움이 끄집어낸 결과물(結果物)이었고 동시에 머릿속에 하얗게 비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붉게 물들어가는 미래가 보여지는 듯 했다. 그 미래는 몹시도 불길한 핏빛을 품고 있었다.
* * * * *
잠금장치가 풀린 투명한 유리문을 열고 들어선 쑨양은 공동 연구실(硏究室)에 큰 목소리로 인사하며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어? 쑨양씨."
"오랜만이에요. 중국 잘 다녀왔어요?"
"와~ 얼마만이죠?"
"얼굴 좋아보이는데? 역시 고향만한게 없죠?"
"조심히 다녀왔어요?"
쑨양의 인사에 먼저 출근해서 업무 준비중이던 직장 동료들은 그를 반갑게 맞아들였다. 며칠 간 중국에 다녀오느라 자리를 비운 그의 안부를 묻길 바빴다.
그건 의례하는 동료 간의 인사치레에 불과했지만 진심도 포함되어 있었고 쑨양도 그들의 질문에 성심껏 답변해주었다. 비자 문제로 다녀온 것이라 별다른 이야기는 없었지만 소소한 이야기 보따리를 하나씩 풀었다.
"오랜만에 부모님도 뵙고, 친구들도 만났어요. 몇년만에 얼굴을 비추는 건데...불효자식이었죠. 뭐."
"에이~ 뭘 그것 갖고 그래요. 난 중국에 비하면 훨씬 가까운 곳에 계신 부모님 잘 찾아뵙지도 않는걸요. 쑨양씨가 불효면 전 후레자식이죠."
"나야말로 그래. 저번 명절 때는 연휴도 짧은데다 기차표도 예약 안해서 일이 바빠서 못간다고 뻥치고 안갔잖아."
"일하느라 바빠서 예약 못한 건데 반은 진짜잖아요?"
"그건 그래."
"친구들도 오랜만에 만나서 재밌었겠어요?"
"하하. 네. 반가워하더라구요. 즐겁게 놀았어요."
"좋았겠다."
대화하면서 자신의 자리에 가방과 종이백을 올려놓은 쑨양은 종이백에 담아온 선물을 꺼내어 빙긋 웃으며 선물이라고 말하며 동료들에게 하나씩 건네주었다.
"이거...선물이에요."
"왠 선물~?"
"중국 다녀왔잖아요. 그래서 면세점에서 하나 샀어요."
"뭘 이런걸..."
"그냥요. 여자분들은 립스틱이고 남자분들은 초콜릿 사왔어요. 립스틱은 잘 몰라서 점원한테 추천받은 걸로 샀어요."
"와우~ 센스쟁이!"
"어머! 샤넬이네. 나 이 색깔 사고 싶었는데!"
"초콜릿 맛있겠는데..."
"쑨양씨 고마워요!"
"Thank you!(고마워요!)"
"잘 먹을게."
좋아하는 동료들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주던 쑨양은 빈 종이가방을 접어 한쪽에 치워두고 업무 준비를 했다. 남자 연구원들은 곧 각자 자리로 가서 초콜릿을 까서 먹으면서 업무를 보았고 여자 연구원들은 모여서 립스틱으로 이야기 꽃을 피웠다.
아직까지 일할 준비를 하는 단계였기 때문에 그녀들의 수다에 아무도 괘념치 않았다.
시애틀 메디컬 센터에서 일하는 태환은 내일이면 이곳을 떠나 한국으로 간다. 벌써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흐른 것이다.
시간은 시위를 떠난 화살과 같다더니 그 말이 맞는 듯 했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시간이 눈깜짝할 새도 없이 흐르지 않았을테니까 말이다.
한국으로 가는 것은 태환, 본인이 직접 선택한 것이지만 몇 년동안 동료들과 몸을 부대끼며 살아왔던 이곳을 떠나는 것이 과히 홀가분하지만은 않았고 아쉬움도 가득했다.
태환은 아쉬움이 담긴 한숨을 내쉬며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오늘도 바깥 하늘은 곧 빗방울이라도 쏟아질 것처럼 잿빛마냥 흐려있었다.
내일도 이렇게 흐릴까 생각하며 병원으로 출근하기 전에 근처 커피전문점에서 산 커피를 홀짝였다. 따뜻한 커피의 온기가 손바닥을 통해 느껴졌고 향긋한 원두향이 코끝을 간지럽히며 허공으로 흩어졌다.
"Hey~(닥터 박.)"
"Ah, Good morning. Dr.Phelps.(아, 좋은 아침. 닥터 펠프스.)"
출근길에 병원 건물을 앞두고 마이클을 만난 태환은 아침 인사를 나눴다. 마이클은 자동차를 이용하는 태환과 달리 바이크(autobike:오토바이)를 타고 다녔는데 아까 주차를 마친 후 커피를 사가지고 온 태환보다 늦게 와서 지금 막 바이크를 세워두고 오는 길이었다.
태환은 커피를 살 때 본인 것 뿐만 아니라 여러 개를 샀고 홀더에 넣어서 가져온 커피들 중의 하나를 꺼내 마이클에게 건네주었다. 마이클은 한쪽 눈썹을 치켜뜨면서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왠일이냐고 물어보았다.
"Thanks. Well...why give it?(고마워. 근데...이거 왜 주는거야?)"
"Just...before I leave, give a gift to you.(그냥...내가 떠나기 전에 주는 선물이야.)"
"What? Oh~This is too cheap.(뭐? 오~이건 너무 싸다.)"
"Just drink it.(그냥 마셔.)"
여름 끝자락의 서늘한 바람을 맞으며 한손에는 커피를 들고 태환과 마이클은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나머지 커피들은 널스 스테이션에서 만난 라이언을 비롯한 동료들에게 준 후 태환은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하얀 가운까지 걸치며 미국에서의 마지막 날에 대한 준비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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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게 찾아왔죠?>_<;;;
나름 바빠서 글 쓸 시간을 못 만들었어요.
주말에 집들이가 있어서 거기에 가느라, 어제는 일에 치여...^^;;
오늘은 좀 시간이 나서 올려봅니다.
이제 태환이 한국으로 오겠네요ㅋㅋ
※ 오타 지적 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