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덟, 성장통
"쌤, 저 이거 모르겠어요."
아침 내내 별다른 활동적인 일을 하지 못했다. 여름에서 가을로 바뀌는 날씨 탓도 있겠지만 지민에게서 도착한 카톡 내용이 머릿속에서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멍한 상태로 학원에 출근했는데, 학교 수업을 모두 마치고 도착한 민형은 쓸데없는 일들로 나를 괴롭혔다. 초등학생도 풀 수 있을 법한 문제를 가져와서 모르겠다며 가르쳐 달라고 펜을 내밀지를 않나, 상담 전화를 받고 있는 내 앞에서 생글생글 웃고 있지를 않나.
"난 조교라니까... 이런 건 학원 선생님한테 가서 물어."
"선생님도 선생님이잖아요."
"아니..."
"줘 봐."
민형에게서 나를 도와 준 건 다름 아닌 태용이었다. 민형이 내게 슬쩍 내밀던 영어 교재를 금세 낚아챈 태용이 교재를 물끄러미 쳐다보다, 민형의 이마에 꿀밤을 놓는다.
"야, 별거 아닌 문제로 김선생님 괴롭히지 마."
"와, 쌤 제가 괴롭혔어요?"
"아니, 뭐......"
"가서 공부나 해."
태용이 영어 교재를 민형의 품으로 던지며 민형을 교실로 몰아낸다. 민형이 눈 앞에서 사라지자 내 눈치를 보던 태용이 카운터 데스크를 두어 번 두드린다. 좀처럼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그 생각이 불쑥불쑥 튀어나와 지금처럼 멍하니 허공에 시선을 둘 때가 있는데, 태용이 주의를 끌어 주는 덕에 정신을 차리고 태용에게 시선을 고정시킨다.
"아."
"무슨 일 있어요?"
"감사합니다."
"뭐가?"
"...신경...써 주셔서...?"
딱히 대답을 바라고 물은 건 아니었는지, 태용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데스크에 기댔던 몸을 일으킨다. 태용이 하는 모습을 역시나 멍한 눈빛으로 보고 있으면, 태용은 긴 팔을 쭉 뻗어 데스크 앞에 힘없이 앉아 있는 내 머리 위를 큰 손으로 덮어버린다.
"힘내요."
*
"쌤, 민형이 좀."
테스트를 치고 S반으로 배정된 걸 보면 민형은 공부를 꽤 하는 편이었다. S반은 제 수준에 맞지 않는 공부를 하기 일쑤였고, 그래서 특별한 학생들을 위해 특별반의 형태로 임시적으로 만들어 놓은 반이었다. 그래서 B반도 쉽게 통과하는 간단한 단어 테스트에서 재시험을 치는 경우는 드문 게 아니라, 아주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민형은 다른 의미로 매우 특별했다.
학원 들어오면서 쳤던 테스트는 훌륭한 성적이었다고 상담 선생님께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시는 걸 들었는데 민형이 재시험을 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다른 선생님 모두가 의아했고, 테스트지를 들고 204호로 걸음을 옮기는 나도 의아했다.
"쌤, 안녕하세요."
"응..."
"같은 학원인데 보기 힘드네요."
"응, 뭐..."
시험지를 민형의 책상 위에 두고 갈색 단상 옆에 있는 붉은색 의자에 앉았다. 민형이 샤프를 꺼내 시험지 위에 몇 번 서걱거린다. 종이가 얇아, 책상 위를 샤프로 두드리는 소리가 좋아 살짝 웃으며 민형의 정수리를 쳐다보고 있는데, 불쑥 민형이 고개를 든다. 갑자기 마주친 동그란 눈에 깜짝 놀라, 시선을 피할 새도 없이 눈만 크게 뜨고 껌뻑이는데, 민형이 황당한 질문을 한다.
"남자쌤이랑 사겨요?"
"......"
"그러니까, 그... 남자쌤 있잖아요. 아까 내 책 가져갔던 쌤."
"아니?"
민형이 말하는 남자쌤이 누군지 곰곰히 생각해 보다, 민형의 부가적인 설명에 생각나는 태용의 얼굴에, 깜짝 놀라 손사레를 쳤다. 내 반응에 만족스러운지 입꼬리를 살짝 올려 웃은 민형이 다시 고개를 푹 숙이고 다시 샤프를 쥔 손을 움직인다. 한동안 내 머릿속에서 뛰어다니는 태용을 지우느라 수고했다. 태용을 겨우 지웠나 싶었는데, 민형이 다시금 고개를 불쑥 든다. 이번에는 또 무슨 질문을 할까, 미리 예측하고 답을 생각하는데.
"남자 친구 있어요?"
*
"학원에 이상한 애 들어왔어."
"누군데?"
"말해도 모르잖아."
"내가 걔 이름 물었냐? 어떤 애냐고."
"음... 그냥..."
같이 있으면 따라갈 수가 없는 애?
"뭔 개소리야. 공부 잘해?"
"응, 잘하는데."
"너보다 잘하는 것 같아?"
"아, 공부 말고."
오늘 아침에 카톡을 보낸 지민이 저녁에 별일 없으면 술이나 마시자는 카톡을 다시 보내왔기에, 굳이 집까지 데려다 주겠다며 고집을 부리던 민형을 애써 보내고 집 앞 맥주집으로 왔다. 의자에 앉아 늘 마시던 맥주와 안주를 시키고 턱을 괸 채 가만히 생각하다, 문득 떠오른 민형의 얼굴에 아무런 생각 없이 말을 뱉었다. 민형에 대해서 말을 해도 엉뚱하게 대답하는 지민에게 화 아닌 화를 버럭 내고는 갓 나온 맥주를 들이켰다.
"거품이나 닦고 말해."
"그러니까."
"응, 그러니까."
"걔가 무슨 말을 할지 모르겠어."
"얘, 또 뭐래니."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지민이라고 내 마음을 알까. 처음 민형과 만났을 때의 마음과 지금 민형과 마주치면 드는 마음이 다른 건 확실하다. 처음에는 어쩐지 팔목이 조금 시렸다면, 지금은 조금. 잘 모르는 고등학생에게 일반적으로 가질 수 있는 마음이라고 생각하면 편한데, 괜히 신경도 쓰이고, 가끔 내가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저만치에서 내 답변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생각하면 조금 짜증도 난다. 이런 마음을 지민에게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 방도가 없었다.
어떻게 설명해야 지민이 잘 이해할 수 있을까, 머리를 감싸고 생각을 잘 정리하고 있는데 지민이 안주를 하나 입에 넣은 채로 말한다.
"근데 의외네."
"...뭐가?"
"만나자마자 정재현 얘기부터 할 줄 알았는데."
"아..."
"다 털어냈냐?"
지민의 말에 잊고 있었던 재현이 다시 떠올랐다. 머리가 복잡했다. 한쪽에서는 민형이 나를 괴롭혔고, 다른 한쪽에서는 재현이 나를 괴롭혔다. 큰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고 지나갔던 태용도 어느 한 부분은 차지하고 있는 것 같고. 만남의 목적은 재현으로 인해 복잡해진 머리를 식히기 위함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인물들의 등장으로 머리가 아파온다.
재현과는 신입생 시절 짧게 사귀었던 과 CC였다. 100일 조금 넘겼나. 100일을 넘기긴 했었나. 이미 중요하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는 기억은 못 하지만, 뜨겁게 사랑했고, 그만큼 차갑게 식었던 것 같다. 사실 식었다고 생각했다. 데이트를 해도 키스하고 싶지 않았고, 얼굴을 봐도 반갑지 않았고, 연인으로서 해야 할 일에 대해 소홀해졌으니, 식었다고 생각했다. 분위기에 이끌려 사귄 과 1호 커플이었으니까 그만큼의 애정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재현이 군대를 가고 몇 주 정도 후에 차버렸다. 이미 군대 간 사람 얼굴 지금 당장 마주칠 일은 없으니, 나 좋자고 한 이기적인 결정임은 분명했다. 며칠 간은 군부대에서 전화가 걸려와도 받지 않았다. 더이상 목소리도 듣고 싶지 않았고, 재현이 구질구질하다고 생각했다.
재현은 나와 헤어진 지 이주일이 지난 후, 우리 과 동기 여자애와 연애 중을 띄웠다. 우리 과의 큰 가십거리였다. 김여주와 사귀었던 정재현이 군대 가서 같은 과 누구누구와 사귄다더라. 과 CC가 헤어지는 것도 큰 가십거리였는데 이미 큰 가십거리에 더 큰 가십거리는 끼얹었다, 정재현은. 우리 과는 정원이 많지 않아서 누가 누군지 서로 잘 알았고, 과 내에서도 마주치는 일이 잦았다. 정재현과 사귄 동기는 나보다 예뻤고, 나보다 몸매가 좋았고, 무엇보다도 선망의 대상이었다. 흔히들 말하는 여자들의 워너비. 그 앞에서 나는 초라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상하게, 자존심이 상했다. 내가 차버렸는데 나 이상의 여자를 만났다는 사실이 기분 나빴다. 그것도 겨우 이 주만에.
며칠, 아닌 몇 달 간을 술을 마시며 보냈다. 저녁은 술 마시는 시간이었고, 아침은 해장하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나면 남는 건 거지같은 학점이었다. 더이상 이렇게는 안 되겠다 싶어서 한 휴학이었다. 그러니까 결국 내가 휴학을 하게 된 이유는 오직 정재현 때문이었다. 정재현은 사귀던 여자 동기와 그리 오래가지 못했지만 그만큼의 시선을 견딜 자신이 없었다. 차라리 잠잠해질 때쯤 학교를 나와 졸업까지 무사히 보내야겠다, 싶었는데 정재현이 복학한다는 소식은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었다.
정재현과 헤어진 후에도 내가 정재현을 좋아하고 있었던 건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휴학을 한 후에도, 학원에 출근과 퇴근을 반복하면서도, 잊으려고 노력했던 이름은 늘 정재현이었다. 좋아한 건지, 단순히 질투에서 오는 감정인 건지, 그런데 그게 정재현이 제대를 마치고 복학을 하는 순간까지 이어지니, 나도 참 당황스럽다.
민형도 그렇고, 재현도 그렇고 참 내 마음을 모른다, 나도.
"학원 애 때문에 잊고 있었어."
"이제 제법 털어낼 줄도 알고, 김여주, 많이 컸다?"
"아, 몰라. 짜증 나."
"학원 애가 짜증 나는 거야, 정재현이 짜증 나는 거야."
"둘 다."
"지랄하네."
"둘다 짜증 나."
*
민형의 일과는 늘 집 학교, 가끔 피시방이었다. 민형은 선천적으로 머리가 좋았고, 그래서 남들보다 공부를 적게 해도 남들보다 좋은 성적을 받는 편이었다. 그래서 학원을 갈 필요까진 없었지만, 아무래도 일과가 많이 바뀔 것 같았다. 일단 일주일 내내 다니는 학원 덕에 피시방 문 손잡이도 잡지 않을 것 같았다. 민형의 직감이 그랬고, 그 직감을 늘 맞았다.
"일찍 오셨네요."
"학원 다녀왔니."
"네, 재미있었어요."
뭘 바라는 질문인지 빠르게 간파한 민형이 대충 대답을 하고 책상 위에 가방을 풀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많은 의미를 함의한 말이었다. 그냥 재미있었던 게 아니라 아주 재미있었다. 누구 덕분에.
민형은 실실 웃으며 가방에서 영어 교재를 꺼낸다. 민형이 줄기차게 들고 다니며 여주에게 질문하던 영어 교재. 아주 쉬운 문제였지만 계속해서 묻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여주가 풀어 주었던 문제와 문제 옆에 정갈하게 적힌 영어 단어가 보인다. 누구 글씨인지, 글씨 참 예쁘다고 생각하며 민형이 침대에 벌러덩 누워 주머니에 꽂아 두었던 휴대폰을 든다.
문자 0건. 카톡은 늘 시끄러우니, 패스. 학교에서도 재잘재잘 떠드는 입들이 하교한 후에도 시끄럽다. 입이 아니라 손가락이 시끄러운 거지만. 300통이 넘게 온 카톡 대화방을 보며 고개를 젓던 민형이 깔끔하게 대화방 나가기 버튼을 누르고는 어제 바로 [김쌤]에서 바꿔두었던 여주의 이름을 검색한다.
"뭐라고 보내지."
휴대폰을 들고 멍하니, 약 5분 정도를 고민하던 민형이 여주의 프사를 크게 보았다, 작게 보았다를 반복한다. 그 사이에 시끄러운 대화방에 다시 초대되었다.
[이민형 왜 나감?]
[우리 싫음?]
[왜 나감]
[왜 나갔냐고 등신ㄴ아]
알림창에 뜨는 보기 싫은 이름들에 얼굴을 잠시 찡그린 민형이 여전히 여주와의 대화창을 켜둔 상태로 몸을 비튼다. 집은 잘 들어갔냐고 물을까, 친구와 약속이 있다고 했는데 술 마셨냐고 물을까, 아니면 내일 보자고 쿨하게 보낼까. 열여덟, 이민형은 생각보다 거대한 걱정을 하고 있었다.
"이민형, 안 씻어?"
"아빠."
"아직도 휴대폰만 보고 있네."
"아빠, 여자한테 카톡을 어떻게 보내지?"
"...?"
"......"
"좋아하는 여자 생겼어?"
민형의 아버지와 민형 사이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미간을 찡그려가며, 눈알을 도르륵 굴려가며 곰곰히 생각하던 민형이 여주와의 카톡 대화창에 잠시 시선을 내렸다가, 다시 아버지에게 눈을 돌린다. 민형의 귀가 새빨개져 있다.
"그런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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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현이 얘기는 더 자세하게 나중에 쓸 거예요! 신알신 해 주신 23분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ㅇㅇㅈ 들단 갈맠 맠리 맠둥이 마크리 우주 영쓰 127 까불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