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훈과의 첫 만남 후 시간이 꽤 지났다. 나와 표지훈은 학교에서 항상 붙어있었다. 쉬는 시간마다 찾아오는 녀석을 신기하게 보던 반 애들도 이제 그러려니 할 정도로.
어릴 때 읽은 어린 왕자 이야기. 이젠 기억도 잘 안나지만 내 머릿속에 깊히 남았던 한 장면이 있다. 내가 기억하는 바로는 어린왕자가 여우에게 이렇게 물었던 것 같다. '길들여진다는 게 뭐지?' 여우는 말한다. '그것은 인연을 맺는다는 뜻이에요.' ...인연을 맺는 것. 지금 나는 한 마리 여우가 어린왕자에게 길들여져 특별한 존재가 되는 것 처럼 표지훈에게 길들여지고 있다. 어린왕자가 날마다 네 시에 여우를 찾아 간다면 여우는 세 시부터 즐거워질 거라고 했었지. 웃기지만 난 쉬는 시간이 끝나자 마자 다음 쉬는 시간을 기다리게 됐다. 녀석을 생각하면 즐겁고 설레인다. 이 감정은... 아, 이제 수업 끝났다!
"선배!"
오늘도 싱글벙글 웃으면서 다가 오는 표지훈. 박경은 그새 어디로 갔는지 자리를 비웠고 표지훈이 그 자리를 채웠다.
"선배, 우리 나가요."
"점심 잘 먹어놓고 또 매점이냐?"
아니 그게 아니구요, 밖에요. 표지훈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 나를 보며 웃더니 손목을 무작정 끌어당겼다. 어어...! 나는 녀석의 힘에 끌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 잠깐만! 어디 가게?"
표지훈은 말 없이 내 속목을 붙잡고 성큼성큼 나아가기만 했다. 뒤에서 살짝 보이는 녀석의 입꼬리가 올라가 있다. 빠르게 걷는 표지훈을 따라 큰 걸음으로 걷는데 그만 다리가 꼬여버렸다. 내가 넘어질 뻔 해도 그러든지 말든지 앞으로 쭉 나아가는 표지훈. 밖에 뭐 재밌는 거 숨겨놨냐? 질질 끌려가는 모양새로 진짜 교문까지 왔다.
"야 손목... 아파."
"아, 미안해요 선배."
미안하다면서 왜 안놓는데? 내가 표지훈을 흘겨 봐도 표지훈은 헤헤 웃을 뿐이다. 신기해. 이 큰 몸 속에 웃음주머니 있는 거 아냐?
"근데 어디 가려고?"
"선배 집이요."
또, 또. 눈이 휘어지게 웃는다. 처음엔 잘생겼네, 귀엽네 했는데 이젠 뭔가 다른 느낌이 든다. 간질간질하고 기분좋고 저절로 웃게되는거. 내 나이 열아홉에 이게 어떤 감정인지 모른다는 건 아니다. 다만 더 확인할 수 있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 감정이 진짜인지 아니면 스쳐 지나가는 것일 뿐인지. 동성을 좋아한다는 것은 마냥 즐거운 일이 아니다. 나도 지금껏 표지훈과 내 감정에 대한 고민때문에 잠 못 이룬 날이 많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 웃고 버틸 수 있는 이유는,
"괜찮죠? 여기서부턴 선배가 앞장서기!"
표지훈도 날 좋아하는 게 확실히 느껴지기 때문에.
아직 내 손목을 놓지 않고 있었던 표지훈의 손이 내려와 내 손을 마주잡았다. 녀석은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만 손으로 느껴지는 그 작은 떨림으로 알 수 있었다. 표지훈의 마음은 날 향해 있다. 그리고 아마 표지훈도 내 감정을 알고있을 거다. 이 두근거림이 전해지지 않을 수가 없을테니까.
나는 표지훈과 우리 집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근데 이렇게 대놓고 학교 땡땡이쳐도 되려나? 박경이 알아서 덮어주겠지. 아, 다음 시간 음악이었는데. 음악선생님 착하고 예뻐서 열심히 듣는 수업인데. 그래도 뭐 표지훈이 훨씬 더 좋으니까. 근데 우리 집에서 뭐하지... 아, 맞다!
"야! 지금 가면 집에 엄마 있어!!"
"네??? 진짜여?"
나도 울상이고 너도 울상이다. 어쩌지... 표지훈을 잡지 않은 손을 입에다 가져다가 고민 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 손마저 덥석 잡아버리는 표지훈에 의해 양손이 자유롭지 못하게 됐다. 뭐하는 거야, 하고 표지훈을 보는데 녀석의 표정이 사뭇 진지하다.
"선배 입..."
"에? 왜?"
"이쁘다."
순간 화악- 하고 달아오르는 얼굴 때문에 재빨리 손을 빼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뭐야, 남자한테 그런...!
"선배 얼굴 빨개졌어. 되게 귀여운거 알아요?"
"시끄러워. 너 요즘 막 기어오른다? 엉?"
애써 덤덤하게 말해도 킥킥거리는 녀석때문에 발간 얼굴은 가라앉지 않았다. 아씨, 창피해...
그렇게 표지훈과 내가 간 곳은 우리 집이 아니라 우리 마을 어르신 댁이었다. 우리 마을은 오르막길을 따라 주택이 모여있는데 그 중 마당이 가장 잘 손질된 집이 바로 여기, 안씨 할아버지 댁이었다. 선배 여긴 왜요? 하고 물어오는 표지훈에게 쉿- 하고는 작게 말했다.
"저기 텃밭에 딸기 보이지?"
"네, 네."
"저거 서리하자."
선배 요즘 그거 범죄에요!! 소리치는 표지훈의 입을 막은 후에 괜찮다며 안심시켰다. 저거 내가 몇 번 서리 해봤는데 진짜 맛있었단 말이야.
주변을 살피고 내가 먼저 담벼락을 훌쩍 넘었다. 뒤이어서 표지훈이 담을 넘는데 덩치는 커가지고 낑낑거리는 모습이 웃겨서 입을 틀어막고 간신히 웃음을 참았다. 들뜬 마음을 진정시킨 후 슬금슬금 걸어가서 잘 익은 딸기를 몇 개 땄다. 주변에서 자라고 있는 다른 채소들도 구경하는 사이 별안간 안씨 할아버지의 호통소리가 들렸다.
"야 이 녀석들아!! 너네 거기서 뭐하는 거야??!"
"으아, 튀어!!!"
표지훈과 나는 온 힘을 다해 뛰었다. 정정하신 안씨 할아버지라서 잔뜩 겁먹고 뛰었는데 의외로 금방 지치셔서 다행이다. 할아버지가 안보일 때까지 뛰고 나서 좁은 골목길로 들어가 털썩 앉았다. 녀석도 힘든지 헉헉 거리면서 땀을 닦았다.
"흐아 힘들어! 아, 딸기는요?"
"여기있... 으 이게 뭐야."
손에 쥐고있던 딸기들은 뛰어오느라 다 짓눌려 있었다. 아까워, 딸기... 꽤 먹음직스러웠는데. 내 양 손이 딸기때문에 붉게 물들어있었다.
"이거라도 먹을래요."
표지훈은 내 손을 끌어다가 자기 입으로 가져갔다. 내 손의 뭉개진 딸기를 사과 베어먹듯이 먹는데 녀석의 치아가 내 손을 스쳤다.
"야아, 간지러워."
표지훈은 또 딸기를 먹으려다 멈칫하더니 날 빤히 쳐다봤다. 괜히 부끄럽게 왜 쳐다봐. 머쓱해진 나는 시선을 돌리다가 나도 먹을래- 하고 표지훈처럼 딸기를 물었다. 진짜 맛있다. 역시 안씨 할아버지 댁 딸기가 최고라니깐.
"선배 입에 딸기 묻었잖아요."
"어? 어디? 여기?"
딸기에 정신이 팔려있는데 표지훈이 내게 핀잔을 주듯이 말했다. 양 손에 딸기가 묻어있는 터라 혀로 입 근처를 쓸며 여기? 여기? 하는데 표지훈은 계속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기만 한다.
"너가 좀 닦아줘 나 못찾겠어."
"으이구 이럴 때 보면 완전 애라니까? 평소엔 센 척만 하고."
"까분다, 너?"
밉지 않게 녀석을 흘겨보며 빨리 닦아줘 하니까 알았다며 내게 손을 뻗는 표지훈. 곧 닦아주겠거니 했는데 손으로 내 볼을 감싸온다. 내 양 볼이 녀석의 손으로 감싸지더니 점점 녀석의 얼굴이 나에게 다가온다.
"너 뭐하는..."
뒷말이 표지훈의 입술에 먹혔다. 깜짝 놀라 나도 모르게 녀석의 어깨를 밀려는 순간 내 손에 딸기가 잔뜩 묻은 게 생각났다. 셔츠에 묻힐까봐 손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공중에 뒀다. 닿아만 있던 입술이 열리면서 부드럽게 혀가 들어왔다. 딸기를 먹어서 그런건지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녀석의 입술이 지독하게 달았다. 쿵쾅쿵쾅, 가슴이 미친 듯 뛴다. 우리 이래도 되는걸까? 하지만 좋다. 이 느낌 정말 좋다. 어찌됐든 지금이 중요했고 이 감정을 따르고 싶다. 이건 단순히 좋아한다는 말로는 부족해.
표지훈은 입술을 뗐지만 여전히 가까운 거리에서 내 볼을 어루만졌다. 녀석의 숨결이 다 느껴질만큼 가까웠다.
"선배. 많이 좋아해요."
"..."
"딸기 맛있다."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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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ㅓㄹ 입만 맞췄는데 왜이렇게 부끄럽죵 ㅎㅎㅎ 달달하다고 해주신 분들 감사해여 저 이거 쓰면서 오그리... 허허 쓰는 입장이라서 더 그런가봐욬ㅋㅋㅋㅋㅋㅋㅋ 근데 나중에 안달달해져도 계속 읽어주실건가요...? ㅋㅎ 읽어주신분들 스릉흡느드...♡ 언젠간 불마크로 찾아뵐게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