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사원"
"..."
"이사원"
누가 내 등을 토닥토닥하면서 이사원. 하고 부르길래 고개를 들어보니까 차장님이 턱 괴고 옆에 앉아계심. 내가 몸을 일으키면서 나한테 덮여있던 차장님 자켓이 아래로 떨어질 뻔했는데 단번에 잡아서 다시 걸쳐주심. 음주 + 감기기운으로 눈도 많이 풀리고 목소리도 땅을 파고 들어갈 기세임
"집에 가야지"
물 한 잔 마시고 일어나서 같이 밖으로 나옴. 그래도 자다가 깨니까 정신이 좀 맑아진 것 같음. 날씨가 조금 쌀쌀한 것 같아서 자켓을 다시 차장님께 드리려고 했는데 자켓을 벗으려는 내 손을 저지하심
"대리님들은요?"
"이미 정상이 아닌 상태로 둘이 사이좋게 갔어요"
내가 피식하고 웃으니까 그런 나를 내려다보면서 자기도 피식 웃음
"추워요"
"아니요. 따뜻해요 엄청"
"조금만 기다려요. 기사님 불렀어"
"전 택시 타고 갈게요 오늘은 일찍 가세요 피곤하신데"
"아냐. 같이 가요"
타고 가. 먼저 가. 타고 가. 먼저 가. 실랑이를 벌이다가 결국 반은 짐. 큰 길까지 데려다줄 거라는 뜻을 굽히지 않으심
"어차피 금방인데 데려다주고 바로 오면 되지"
"그래요 금방인데 혼자 가면 어때"
"무섭잖아. 겁쟁이"
"여기 간판 조명이 얼마나 밝은데"
"난 저 조명이 마음에 안 들어서 같이 가야겠어요"
앞장서는 차장님을 쫄래쫄래 따라가는데 갑자기 휙 뒤를 돌아서 내 어깨를 자기 쪽으로 살짝 끌어당김. 그리고는 태연하게 다시 걸어가심
"나랑 있을 때는 괜찮지만... 아무 데서나 그렇게 자면 안 돼요"
"네"
"이제 추워지니까 옷 단단히 입고 다니고"
차장님 잔소리는 취해도 계속됨. 습관인 것 같음.
"걸어 다닐 때 항상 차 자전거 오나 안 오나 잘,"
"사랑해요"
"나도"
"..."
"많이"
목석x목석 간에 이런 대화도 가능함. 1년에 한 번 정도? 나도 차장님도 취한 것 같고 어차피 내일 되면 기억도 못 하실 것 같고. 차장님을 놀라게 해서 잔소리를 멈춰보자! 하는 마음으로 뱉은 말이었는데(평소에 못하는 말이기도 하고..) 바로 나도, 라는 대답을 들어버리고 내가 더 놀람
벙찐 나를 뒤로하고 저어기서 오는 택시를 향해 손을 뻗으심
"잘 가요. 도착해서 연락"
나를 택시에 밀어 넣고 주머니에 있던 한 손을 꺼내서 흔드심. 출발하고 뒤를 돌아보니 차장님이 택시 번호판 사진을 찍고 다시 터벅터벅 돌아가심
-
집에 돌아와서 씻었는데 차장님 생각이 나서 전화를 걸었음
-여보세요
집에 잘 들어갔어요?
-응, 이사원은
이제 자려고요
-주말이니까 푹 쉬고 또 전화할게. 잘 자요
주말이니까 영화도 보고 맛있는 것도 먹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면 좋겠지만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콜록콜록 소리를 생각하면 이번 주말은 그냥 푹 쉬는 게 나을 듯함
-
다음날 아침에 또 세상모르고 자다가 차장님 전화에 잠에서 깸
...여보세요
-또 방금 깬 목소리네
으흥ㅇ
-아무도 전화 안 하면 안 일어나는 거 아니야?
아닌데 저 한 시간 전에 일어났어요
-아침은
좀 이따 점심 먹으려고요, 차장님은요?
-음. 먹었어요 한참 전에
-영화라도 보러 갈까
몸도 안 좋은데 오늘은 집에서 쉬어요
-그럼 이사원 보러 갈까
아파트 뒤에서 공사를 해서 여기 너~~무 시끄러워요
-그래 그럼 내일 보든지 회사에서 보든지 해요. 이따 다시 전화할게
-
멍하니 하루를 낭비하다가 차장님 얼굴이나 보며 보람차게 하루를 마무리하려고 대충 옷을 입고 나갈 준비를 하고 택시를 잡아 차장님 집으로 향함
-뭐해요
나왔어요 답답해서
-저녁인데
문 열어주세요
-무슨 문
현관문
문 앞에 서있으니까 차장님이 응? 왜에? 하면서 나오다가 나를 보고 흠칫하심.
"어"
"안녕하세요"
"어떻게 왔어"
"택시 타고왔어요"
"..."
"안에 여자 있어요?"
내가 안에 여자 있냐고 물으니까 토끼눈이 되어선 아니, 아니 들어와. 하심. 들어가니까 여자는 없었는데 이과장님이 차장님 소파에 앉아계심. 당황 멘붕 진땀 민망. 용기 넘치게 집까지 왔건만 뭐 잘못한 사람처럼 어정쩡하게 들어감
"어 커피 안녕"
"어.. 안녕하세요"
"둘이 이렇게 연락도 없이 집도 막 드나들고 하는 거야? 몰랐네~"
"아니, 아니 오늘 처음...왔어요"
"저번에도 여기서 만났잖아~~ 내가 밥도 사줬는데~~"
"아 맞다. 네 그래서 이번이 두 번째"
"참 순수하던 친구였는데. 너랑 만나니까 거짓말도 치고. 그래~ 안 그래~"
"안 그래. 이제 가"
"아직 밥도 안 해줬잖아"
"너네 집 가서 먹어"
"이야, 진짜 서운하네 너랑 나랑 알고 지낸 지가 몇 년인데, 애인 왔다고 쫓아내는 거야"
차장님이 눈빛으로 무언의 압박을 하시니까 어쩔 수 없다는 듯 과장님이 일어나심
"그래. 좋은 시간 보내. 나도 여자친구 만나러 가야겠어"
과장님껜 정말 죄송했지만 차장님의 완곡한 뜻에 결국 떠밀려 나가심
"이과장님 여자친구 생기셨어요?"
"아니. 상상이야"
저 말 듣고 대놓고 빵 터지지는 못 했지만 정말 내적으로 너무 즐거웠음
"웬일로 연락도 없이 왔어요"
"제가 너무 보고 싶으신 것 같길래 그냥 왔어요"
나도 무슨 생각으로 저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음. 내가 저렇게 얘기하니까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웃으면서 말을 왜 그렇게 귀엽게 해. 하심
"술 마셨어요"
"... 진짜?"
"아니요..."
"영화 볼까"
끄덕끄덕
"우리 야근하는 동안 재밌는 게 엄청 많이 나왔어요"
극장 동시상영 카테고리에 제이슨 본이 있길래 일심동체로 제이슨 본을 고르고 맥주 한 캔 들고 앉음. 웬일로 차장님은 오늘 하루 금주를 하시겠다고 함
맷 데이먼이 딱 등장하는데.... 너무 까리해서 나도 모르게 소리를 냄. 그 뒤로도 음 오 아 예 각종 탄식을 했음. 찌뿌둥해서 캔을 내려놓고 기지개를 한 번 펴다가 차장님이랑 눈이 마주쳤는데 차장님이 팽 하심
영화가 끝나고 마지막에 누구나 아는 그 노래가 나오는데 정말 소름이었음. 박수를 세 번 짝짝짝 침
"참"
"^^?"
"입을 다물고 봐야지. 턱 안 아파요?"
차장님 표정 같은 건 안중에 없었음. 이미 맷 데이먼에 허덕이고 있었음
"3년 뒤에 50이래요"
"와... 마흔일곱이 저렇게 멋있을 수 있어요?"
"아내도 있고. 딸도 있고."
"아내도 이쁘겠죠?"
"응. 엄청 예뻐요. 둘이 사이도 엄청 좋아"
(시무룩)
"왜 실망해요. 이사원 애인은 나야"
내가 도리도리하면서 불을 키러 가려고 일어났는데 차장님이 허리를 감아서 나를 자기 무릎에 살짝 걸터앉히심. 장난치는 줄 알고 다시 일어나려고 했는데 차장님이 머리를 감싸고 입을 살짝 맞췄다가 떼심. 나를 들어서 다시 소파에 내려놓고 불을 키러 가심
"늦었다, 데려다줄게요"
현관에서 신발을 신고 나가려는데 차장님이 붙잡더니 쪼그려 앉아서 신발 끈을 매 주심
"또 넘어지려고"
"웬만해선 잘 안 넘어지던데"
"초등학생. 초등학생"
차장님 차에 타서 벨트를 매려는데 또 버벅거림. 이 자리에만 앉으면 벨트가 잘 안 매짐. 차장님이 몸을 돌려서 벨트를 매주시려다가 눈이 마주침. 한참 쳐다보시더니 또 입을 맞추심. 그리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운전하심. 나는 맥주도 마셨고 분위기가 후덥지근 해서 창문을 열었음
"안 추워요?"
"더운데"
"왜 덥지"
왜 더운지 알면서 날 놀리려고 계속 물어봄. 안 웃는 척하는데 살짝 고개 돌리고 입꼬리 씰룩거리는 거 다 보임
[♥]
여름/군밤/유성매직/덤벙/윤/아가야/구가/발가락/시카고걸/즌증국/정우아저씨/904/스티치/발가락/튜브/하루/워더/킬링썸머/치통/별오/고망맨/강변호사/레몬/감사해요/따스한/멘탈박살/오리/고기/상사/빡소몬/막내/푸름푸름/헐/찌루/징지잉/하설렘/팔칠/망둥/밥/팅커벨/감귤/27/린/고소한 아몬드/자몽에이드/기묘/메이/게이쳐/코코몽/쿠기/우리샘/4885/더럽/마시멜로우/새벽/흐려진/예고기/피죤/우유/이졔/둥이/새벽이/비누/동태/메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