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화
'네가 신경쓰인다.'
미친 거 아냐, 김아미!! 너 왜 엄한 생각을 하고 그래, 어?!
남준 황자의 말 한 마디에 넉다운이 되어 침대에 멍하니 누워있었다. 놀란 내게 장난스럽게 말해온 걸 보면, 진짜로 '그런' 의미는 없는 것 같은데...
"진짜 없나...?"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린 내 방정맞은 입을 찰싹찰싹 때렸다. 진짜 미쳤다, 김아미. 상대는 황자야, 나는 일개 사돈이고! 그것도 먼 사돈!
네가 낯선 곳에 떨어져서 좀 챙겨줬다고 기대라도 하는가 본데! 쓸데없는 마음 품지 마. 어차피 넌 돌아가야 하잖아!
현실적인 생각을 끝내고 나니 입맛이 씁쓸해졌다. 그저 내가 안쓰러워 챙겨주려던 의도였다고 생각하면 서운해져 견딜 수가 없었다.
남준이 준 손수건을 집으며 입을 비죽였다. 괜히 착각하게 만들고 있어...진짜 나쁘다.
"오늘 왜 기운이 없어?"
"제가요? 아닌데..."
화연 공주는 내 안색을 살피며 걱정스레 물었다. 미지근한 대꾸가 더 걱정하게 만드는 것 같아 억지로 웃어보였다.
오늘 조반을 너무 적게 먹어서 그런가봅니다. 그러면 공주는 살짝 미소짓는다. 공주님이라 그런지, 그저 웃는 얼굴인데도 기품이 넘친다.
"난 또 무슨 고민이라도 있는 줄 알았잖니. 혹시라도 생기면 언제든 내게 말하렴."
"네!"
지금 공주님의 오라버니 때문에 고민입니다. 하하.
여느 때처럼 민윤기에게 밥을 가져다주기 위해 천문대를 올랐다. 그런데 이상하게 아무런 기척이 없다.
"황자님?"
하고 불러보았으나 고요한 정적만이 날 반겨줄 뿐이었다. 뭐야, 어디 간 거야 대체. 이 시간에 맨날 여기 있던 사람이. 여기 냅두면 와서 먹으려나.
나는 조반을 통째로 안에 놓아두고는 민윤기의 행방에 의문을 가진 채 다시금 천문대를 내려왔다.
맨날 보던 인간을 못 봐서 그런가 좀 아쉽기도 한 것이, 왜 헛걸음을 시키냐며 투덜대다 멀찍이서 다가오는 인영에 씩 웃었다.
민윤기 황자였다.
뭐야, 역시 잠깐 어디 갔다 오는 거였잖아?
"2황ㅈ..."
반가운 마음에 크게 부르며 손을 흔드려다 퍼뜩 멈추었다. 민윤기 옆에 보이는 사람은... 눈을 가늘게 뜨자 형상이 더 또렷하게 보인다.
정윤이잖아!
언젠가 그와 세욕탕에서 마주쳤던 것을 상기해내며 온 몸에 한기가 돌았다. 내 생애 그렇게 수치스러운 일은 다시 또 없을 거다.
아, 아, 젠장! 둘이 형제였지, 맞아...이런...!
다급히 주위를 둘러보다 치맛자락을 들고 또 냅다 발을 움직였다.
만약, 지금 정윤과 마주치면 황자의 세욕을 훔쳐본 죄로 죽이네 살리네할지도 모르는 노릇이고 고의가 아니었다하더라도 민윤기가 날 오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진짜 고려에서 살기 참 힘들다!
"어째 맨날 뜀박질만 하는 것 같냐..."
내 인생도 참 박복하다 여기며 터덜터덜 걸음을 옮기는데 가까운 곳에서 살려달라고 비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듣고 어떻게 지나치겠는가.
살금살금 깨걸음으로 다가가 건물 모퉁이에 붙어 눈만 빼꼼 내밀어 상황을 보기로 했다.
양쪽으로 선 병사들이 저들 사이에 넙죽 엎드린 이를 지키고 있었다. 차림으로 보면 신하같은데...왜 저러고 있는 거지?
그는 콧수염을 덜덜 떨며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 있었다. 자신의 앞에 우뚝 서 있는 사람에게. 누구지?
"당장 옥에 쳐넣어라."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웃기는 소리.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나보군."
싸늘한 목소리로 툭툭 던지듯 말한 남자는 병사들에게 고갯짓했다.
"죽여라."
너무나 자연스럽고 평온한 어투여서 자칫하면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할 뻔했다. 병사들은 고개를 꾸벅이고는 늙은 신하를 단단히 붙들어맸다.
끌려가지 않으려 발악하는 신하에도 그는 동정의 눈길조차 보내지 않았다.
뭐, 뭐 저렇게 피도 눈물도 없는 놈이 다 있어?
그가 몸을 점점 돌리며 얼굴이 조금씩 드러났다. 수려한 옆태가 자뭇 여성들을 설레게 할 만한 것이었으나 햇빛에 비친 한 쪽의 눈동자 유난히도 투명하게 보였다.
그의 한 쪽 눈은 회색빛이었다.
기묘한 인상과 방금 본 그의 무자비함에 두려움을 느낀 나머지 난 입을 틀어막으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살벌한 분위기가 매서웠기 때문에 절로 뒷걸음질이 쳐졌다.
툭-
"꺄ㅇ-읍!"
뒤로 물러나다 부딪힌 장애물에 나도 모르게 비명이 나올 뻔한 것을 입을 틀어막는 손 덕에 다행히 멈출 수 있었다.
마주한 이는 검지를 입술에 대고 조용히 하란 손짓을 해보였다.
쉬잇-하는 숨소리와 함께. 나는 당황한 나머지 눈만 깜빡깜빡.
그가 내 뒤쪽을 힐끔 보곤 나를 휙 잡아끌었다.
그와 동시에 회색 눈동자의 시선이 닿았으나 그의 시야에 걸리는 것은 없었다. 그리고 그는 곧 그곳에서 사라졌다.
"하아, 하-"
"황자를 몰래 훔쳐보다니, 죽음이 두렵지 않으냐?"
"아까 그, 그 사람이 황자....? 아차. 고, 고의가 아니었습니다! 전 그저 지나가다가..."
"그래. 운 좋게 내가 발견했으니 망정이지, 태형이가 널 봤다면 넌 이미 저승 사람이 되어있을지도 모르겠다."
태형이라면 김태형이다. 6황자. 정윤 김석진의 친동생.
그런데 그에 대해선 자세히 말해주는 이가 없어 베일에 싸인 인물이기도 했다. 아까 본 그 회색빛 눈동자와 연관이 있는 걸까.
"저, 저기. 6황자님을 태형이라고 부르셨으니, 혹....황실의?"
그는 내 어깨를 툭치곤 생긋 웃었다. 눈이 사라락 접히는 게 괜히 움찔하게 된다. 부드러운 얼굴이었지만 어딘가 묘한 위압감이 느껴졌다.
"태형이는 알면서 나는 모른다?"
"아니, 그게, 기억을! 잃어버렸거든요. 그래서 방금도 태형이라는 이름을 듣고 황자님인 것을...알았습니다."
"기억을...잃어?"
"...."
"혹시 화연네 객식구가 너인가?"
"....."
"아미, 맞지? 남준 형님께 많이 들었다. 하루라도 사고를 치지 않으면 입 안에 가시가 돋친다지?"
발끈하다 이내 수그러들었다. 찔리는 부분이 없지 않았기 때문에.
"자, 잘못 전해들으신 것 같습니다만..."
"나는 지민이다, 박지민."
"아, 역시 황자님이셨군요."
동글동글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히죽대는 이 황자는 다섯 번째 황자였다. 6황자와 나이가 같다고 했었는데, 그래서 반말을 썼구나.
나는 허리를 꾸벅 숙였다. 아, 아무튼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또 줄행랑. 지민 황자가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할 일이 있다며 냅다 튀었다.
다행히도 나를 붙잡는다거나 하진 않는다. 진짜 내 인생 기구하다.
"음?"
지민은 저를 두고 도망간 여인네 덕에 덩그러니 남겨져 헛웃음을 흘리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것을 주워들었다.
자수가 놓아진 천.
여인의 것이 자명했으니 도망간 처자의 것이 틀림없겠군.
윤기 형님과 남준 형님께 말을 들어서 궁금하던 찰나였는데 이렇게 우연히 만나게 될 줄이야.
더 왈패 같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소녀같은 느낌이 강해서 지민은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나중에 만나면 돌려줘야지. 지민은 고이 접힌 손수건을 품 속에 집어넣었다.
"명이 쭉쭉 줄어드는 기분입니다."
한숨 섞인 내 말에 호석 황자가 반응했다.
"어찌 그런 말을 하느냐."
"몰라요...요즘 계속 도망만 치는 것 같습니다. 팔자가 사나운가."
"하하, 형제들을 만났다고 그랬던가."
"네."
황자들과 마주쳐서 무례를 범했던 것을 떠올리다 표정을 구겼다. 아직 내게 들어올 컴플레인은 많이 남아있었다.
일단 성질을 못 이겨 막내 황자를 혼냈고, 고의는 아니었으나 정윤의 몸을 훔쳐보았고, 태형 황자를 훔쳐보다 지민 황자에게 걸리고....
아아아아 내 인생...
좌절하는 내가 웃겼는지 호석 황자가 웃었다.
"내 보기에 아미 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어째서요...?"
"넌 묘한 힘이 있다. 널 아껴주고 싶게 만드는 힘."
세상에....
여기는 무슨 사상이 이탈리아인가...? 남자들 멘트가 왜 죄다 이래..?
심쿵당한 마음을 숨기며 애써 평범하게 웃어보였는데 계속 생글거리는 호석 황자를 보기 힘들어 슬쩍 시선을 돌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인기 많을 거 같은데, 이 황자...
몸이 약해서 그런지 호석 황자는 늘 혼자 있는 것 같았다. 황자라 말동무도 없고, 그나마 내가 종종 놀러오는 게 사람을 만나는 전부라고 한다.
가족 이야기를 해볼까하다 관두었다. 괜히 혼자 있는 게 아닐 테지 싶어서.
"아차! 저번에 주신 꽃들을 오라버니의 화병에 놓아두었습니다. 오라버니가 아주 좋아하셨어요. 감사해요."
"그래? 다행이구나. 오늘도 줄 테니 가져다 드려. 얼른 회복했으면 좋겠구나."
"정말입니까? 감사합니다, 황자님. 아, 그 다음에 올 땐 저도 선물을 가져오겠습니다!"
내 말에 호석 황자는 작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대하지.
.
.
.
호석 황자가 선물해준 꽃을 품에 안고 룰루랄라 걸음을 옮기는데 집에 다다르자 문 앞에서 안절부절 못하던 채령이가 날 보더니 대번에 달려왔다.
"아가씨!!!"
"채, 채령아. 넘어지겠다, 무슨 일이야?"
"어디 가셨었어요! 지금, 지금 주인님께서 위독하십니다!"
"뭐?"
오라버니가 위독하다는 말에 손에 든 꽃을 후두둑 떨어뜨렸다.
오라버니! 나를 진심으로 아끼고 걱정해주던 분이신데.
쿠당탕당 소리를 내며 안으로 들어서자 이미 의원들이 오라버니의 상태를 점검하고 있었다.
내 부름에도 오라버니는 눈을 뜨지 못한 채로 식은땀을 흘리며 앓는 소리를 냈다. 맥을 짚던 늙은 의원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올해를 넘기기 힘들 듯싶습니다."
공주님은 이미 눈물을 그렁그렁하게 매달고 있다. 차마 아랫것들 앞에서 눈물을 보이진 못한 채 억지로 참는 것처럼 보였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이 괴로워보여 나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차올랐다. 눈을 뜨지도 못하고 끙끙대는 것이 안쓰러워 고개를 돌렸다.
오라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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