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화
그 후로 오라버니께 꼭 붙어있었다. 오라버니는 무리하지 말라 이르셨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저 무리하는 거 아닌데요? 저 하고 싶은대로 하는 건데. 씩 웃으며 넉살좋게 말하니 오라버니도 같이 웃으며 내 어깨를 다독였다.
"미안하다, 아미야. 괜한 걱정만 끼친 것 같구나."
"그런 말씀마세요. 오라버니도 참."
"요즘은 괜찮니?"
황궁에서의 생활을 묻는 것 같아 밝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이곳에 오라버니도 있고 공주님도 있고...황자님들도 있는데요."
"황자님들과 친해진 모양이구나."
황궁 내에서 친구 비슷한 존재들은 황자들 뿐이니 한 번 더 고개를 끄덕였다. 오라버니는 꽤 놀란 눈치였다.
남준 황자는 공주님의 오빠라 그렇다 쳐도, 다른 황자들과도 잘 지낼 줄은 몰랐던 모양.
하긴 황자라는 지위에서 고작 사돈 처녀인 귀족 여인과 친하게 지낼 이유가 있는가.
그치만 일단 만나본 바로는 다들 착한 걸, 굳이 멀리할 필요는 없겠지.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오라버니께서 입술을 달싹이기에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아 가까이 다가갔다.
"오라버니, 무슨 일이세요?"
"아니, 아니다. 늘 2황자님께 조반 심부름을 하더니, 이젠 하지 않아도 되니? 2황자님은 식을 자주 거르시는...."
"오라버니가 더 중요합니다, 제겐. 그러니 황자님 걱정은 마시고, 빨리 쾌유하세요. 아셨죠?"
동생의 당돌한 말에 피식 웃은 오라버니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리 말하지 말거라, 아미야. 2황자님도 너를 무척이나 신경 써주시고 있는데."
"뭐...그래도 저는 오라버니가 제일 좋습니다."
"후후. 그러냐. 후에는 나보다 더 마음을 줄 배필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배필이면, 배우자를 말하는 건가. 터무니 없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무슨 이 나이에 결혼이야.
"서방님, 이제 곧 약을...어머, 아미가 있었구나."
"아, 공주님! 오라버니, 그럼 전 이만 물러가보겠습니다."
"그래. 아직까진 날이 차니 몸 조심하거라."
"예. 공주님, 제가 다미원에서 약을 받아오겠습니다."
"그럴래? 고맙다."
나는 공주님께도 꾸벅 인사를 하고 조용히 문을 닫았다.
"서방님. 몸은 좀 어떠십니까."
"공주님 덕에 괜찮습니다. 그보다...아미가 황자님들과 연을 맺고 있는 것 같은데..."
"걱정되십니까."
"예. 혹시라도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진 않을까 걱정입니다."
"아미는 잘 하고 있는 걸요. 걱정마세요. 또, 저도 있으니까요."
"고맙습니다, 공주님."
문을 닫고 뒤를 돌자마자 한숨이 터져나왔다. 오라버니는 날이 갈수록 볼이 홀쭉하게 패이고 말라갔다.
아픈 것이 뻔히 보이는 데도 내 앞에선 티를 낼 수 없었는지 억지로 끌어올리는 입꼬리가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약재나 좀 받아와야겠다.
터덜터덜. 오라버니를 걱정하며 걷고 있는데, 불쑥 내 앞에 드리워지는 그림자에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흐아아악!! 나도 모르게 나온 비명에 저 쪽도 놀랐는지 어깨를 움찔한다.
정윤이다, 1황자다! 목욕탕!!! 미친. 얼른 도망쳐야-
"우앗!"
"어딜 가느냐?"
뒷덜미를 콱 잡혀 버둥대다 결국 원래대로 1황자를 마주하고 섰다. 뒷짐을 진 1황자는 키차이 탓에 고개를 숙여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뭐, 뭘 봐! 그러나 화통하게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었다.
"흐음. 익숙한 얼굴인 듯한데..."
"자, 잘못 보신 것 같습니다만...?"
"잘못 보았다?"
"ㅇ, 예에..."
"지금 내가 거짓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냐?"
"예에...?"
이 놈의 동네는 무슨 말을 못해, XX!!!
그러나 잔뜩 쫄아버린 나는 애써 담담한 척하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아, 진짜 도망치고 싶다. 그리고 이 황자는 왜 하필 여기 있는 건데!?
"풉."
....?
웃음 소리에 힐끔 쳐다보니, 웃음기를 잔뜩 머금어 신난 얼굴이 보였다. 그에 내 표정은 반대로 썩어갔다.
"왜 웃으시는 건지...여쭤봐도 됩니까?"
"아니, 안 된다."
진짜 뭐야, 이 인간???;;;;
안 된다기에 아, 예-하고 지나치려했더니 또 앞을 막아선다. 아, 정말 왜 이래, 이 분!?
"아, 정말 무슨 일이십...."
이젠 성질이 나기에 한 소리할까싶어(내일없음)고개를 확 쳐드니, 바로 코 앞에 맞딱드려지는 얼굴에 눈을 크게 뜨며 정지 상태가 되었다.
어...어...그러니까... 내가 어버버하고 있는 사이, 1황자는 씩 웃으며 몸을 물렸다.
"듣던대로구나."
대체 누구에게 무엇을 들으신 거죠? 고개를 갸웃하는데 1황자는 오라버니의 상태를 물었다. 일어나계시다고 하니 다행이라는 둥, 덕담을 해준다.
가만 오라버니를 내게 물었다면, 내가 김아미라는 걸 알고 있었던 거 아니야...? 낚인 건가, 나ㅎ
"네?"
"네가 그렇게 천방지..."
"형님."
그러나 1황자의 말은 누군가의 부름으로 툭 잘려버리고 말았는데, 그 누군가는 일전에 보았던 그 냉혈한 황자였다.
6황자, 김태형 말이다. 김석진의 친동생이기도 한.
어, 그런데 오늘은 한 쪽 눈에 안대를 하고 있다. 눈병이라도 난 건가.
"태형이? 무슨 일이냐."
"어머니께서 찾으십니다. 이런 데 있으셨습니까."
"매제가 심하게 앓는다기에 문병 차 들렀다. 화연이도 볼 겸."
"정윤께서는 하찮은 일에 마음 쓰시면 안 됩니다."
하, 하찮? 너 이 자식, 말 다했냐.
우리 오빠가 아픈 게 하찮은 일이라고? 6황자의 재수 털리는 말에 딱 꽂혀버린 나는 속이 부글거렸지만 꾹 참았다.
일단 쟤는 황자고, 나는 일개 여자애인 걸.
정윤도 6황자의 말이 심하다 여겼는지 내 쪽으로 한 번 시선을 두고는 진지한 얼굴로 6황자를 바라보았다.
"그래, 속히 뵈러 가겠다."
"곧 황제가 되실 몸이니, 큰 것을 보셔야 합니다."
"...어머니 같은 소리를 하는구나."
"죄송합니다."
진짜 짜증난다. 난 몰라도 우리 오빠는 엄연히 이 쪽 가족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나.
그런데 저리 남처럼 말하니 부글부글 끓던 속이 펑하고 터졌다.
고려에 떨어져서는 욱하는 성질머리만 더 고약해진 것 같은 기분이다.
"이보세요! 사람이 아픈데 하찮으니, 큰 것을 봐야한다니 그게 할 소립니까? 우리 오라버니는 하찮고 작습니까?"
"...넌 뭐냐."
"저요? 아미인데요?!"
저 안하무인 표정에 눈이 뒤집혔다. 통제불가.
이젠 될대로 되라식으로 당당히 가슴을 폈다. 몰라, 죽기밖에 더 하겠냐.
6황자도 내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인상을 찌푸리곤 나를 마주보게끔 몸을 돌렸다.
"감히 누구에게 눈을 똑바로 뜨고 쳐다보느냐."
"6황자님이시잖아요. 잘 알고 있습니다."
"이 계집이..."
"계에집?"
마음에 안 드는 건 나도 마찬가지다. 이 싹퉁 바가지 놈아!! 단어, 표정, 싸가지. 삼박자의 조화가 내 화를 더 북돋았다.
"둘 다 그만해."
김태형은 정윤의 앞이란 것을 자각하고 제 형에게 허리를 꾸벅 숙여보였다.
그 모습에 잠시 갈등하던 나도 정윤에게 고개를 꾸벅였다. 죄송합니다, 정윤.
"넌 정윤 덕에 목숨을 부지한 것이니 감사히 여겨라."
"뭐라고요?"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형님."
와, 와. 뭐 저런..!
"저런 미친 놈이 다 있어?"
태형이 사라진 방향을 보며 씩씩거리는 아미를 보던 석진이 홀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정말 윤기에게 듣던대로 천방지축 왈패가 맞구나.'
태형의 위압감을 모르지 않을 텐데도, 부당하다 생각되는 것에 굴하지 않는 모습이라니.
꽤 신선하다 느낀 석진이었다.
윤기가 많이 아끼는 것 같아 궁금했는데, 더 궁금해지겠군.
꽃의연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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