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봇 01 |
[블락비/피코] 로봇 01
사방이 막혀있는 공간에서 상당히 반항적인 모습을 띤 채 자신을 바라보는 지호. 지훈은 옅게 한숨을 쉬고는 이내 수화기 너머 들리는 박경의 목소리에 지그시 아랫입술을 물었다. 「오류가 생겼나 봐. 일단 내일 데리고 와.」내일까지 저 딱딱한 덩어리랑 대체 뭐하라고. 신경질적으로 통화를 끝내고 쫘악 째진 눈으로 주위를 탐색하려는 듯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는 지호에 지훈은 묘한 기분이 온몸을 휘감는 듯했다. 그렇게 보고 싶던 지호가 바로 눈앞에 있는데…. 재빨리 달려가 꽈악 안아주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고는 박경이 꼭 읽으라며 강요를 하던 사용 설명서를 유심히 읽어보았다. 이름은 어떻게 입력시키는 거지. 지호는 어느새 곰곰이 설명서를 읽고 있는 지훈의 옆에 엉덩이를 붙어 그 모습을 샅샅이 살폈다.나 이름이 뭐야? 지호의 물음에 지훈은 고개를 돌렸다. 눈을 한 번 깜빡일 때마다 세세하게 움직이는 얼굴에 몸, 입술, 하나하나 모든 행동이 인간 그 이상의 모습이었다. 수명은 겨우 1년밖에 되지는 않지만, 기꺼이 감수하고 지훈은 박경에게 부탁했다. 우지호와 똑같은 로봇을 만들어달라고. " 우지호. " " 우지호…? " 기억하려는 듯 우지호, 우지호, 짧게 몇 번 되새기더니 이내 표정이 잔뜩 구겨진다. 그리곤 꽤나 불쾌하다는 눈초리로 지훈을 바라본다. 원래 로봇들은 순종적인데, 이게 문제라는 거다. 만들다가 오류가 난 모양인지 툭하면 인간처럼 표정을 찌푸리고 입술을 삐죽거리곤 반항적인 행동을 하는 게 거슬렸다. 이리저리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온 주위를 돌아다니며 주인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어디서 왔어, 넌 누구야, 여긴 어디야, 라며 귀찮게 하는 게 일쑤다. 조금 전에 다 말했던 것을…. " 난 표지훈이고,주인이거든. " " 아아-, 주인. " 이제 생각났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새 참지 못하고 주위를 휙휙 둘러본다. 그러더니 다시 지훈에게 고개를 돌려 씨익 웃어 보인다. 그런데 내 이름은 뭐야?
… 내일 바로 박경한테 가야겠다.
사용설명서를 신경질적으로 놓곤 무뚝뚝한 투로 우지호, 라며 답했고 지호는 아까랑 똑같이 그대로 고개를 한 번 더 끄덕이고는 굳게 닫힌 문쪽으로 시선이 머문다. 나가고 싶어. 지호의 말에 지훈은 잠시 고민했다. 이 로봇을 밖으로 내보내도 괜찮을까. 모습으로는 완벽한 사람 모습이지만 속은 복잡한 칩과 장치로 위장이 되어있는 로봇이었다. 만지면 딱딱한 철 느낌이 아닌 사람의 살결, 그 익숙하고도 부드러운 느낌에 놀랬던 지훈이였다. 나가고 싶다니깐? 쉽게 결정하지 못하고 가만히 서 있는 지훈이 답답한지 지호가 재촉했고 크고 거친 감이 있는 지훈의 손을 잡고 끌었다. 그 순간 지훈의 가슴이 무엇엔가 깊이 찔린 것처럼 찌르르 아팠다. 자기도 모르게 지호의 손을 뿌리치고는 발걸음을 옮겨 굳게 닫힌 문을 열었다. 로봇이잖아. 로봇, 로봇. 지훈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냥 로봇일 뿐이다.
" 어, 이름이 뭐였지. "
" 표지훈. 입력이 안 돼? "
" …몰라. "
밖으로 나오니 차가운 공기가 지훈의 몸을 휘감았다. 또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주위를 둘러보며 먼저 앞서 가는 지호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던 지훈은 울리는 진동에 핸드폰을 확인했다. 「명심해. 1년이야. 1년.」…1년…. 그러고 보니 지호가 떠난지도 벌써 1년이 다 되어가는구나. 예전에 죽고 싶을 정도로 아팠는데 많이 무뎌진 자신에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게 뭐야? 한참 바쁘게 움직이던 발이 멈추더니 지호를 향해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며 다가오는 강아지를 가리키며 묻는다. 강아지. 지훈이 짧게 대답하자 강아지에게 시선을 못 떼는 지호. 신기하다는 눈으로 바라보는 지호에 괜히 또 기분이 이상해지는 지훈이었다. 로봇주제에.
" …어디 이상은 없는데? "
박경의 말에 지훈은 허-, 짧게 소리를 터트렸다. 그런 지훈에 아무런 관심도 없는 듯 탁자 위에 놓인 화분에 시선을 떼지 못한 채 흥흥 뭐라 작게 흥얼거리는 지호. 물을 한모금 마신 박경은 다시 한 번 빽빽하게 글이 채워진 종이를 유심히 읽었고 이내 고개를 저어 보인다. 그럼 왜 입력도 못 하고,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정리 안 된 말을 턱턱 내뱉는 지훈에 박경은 짧게 웃어 보인다. 만들 때는 다른 로봇과 똑같이 만들었어. 박경의 딱딱한 투에 지훈은 뭐라 내뱉던 입을 꾸욱 닫았다. 그리곤 이내 자신의 어깨를 꾹꾹 찌르는 지호에 고개를 돌리니 그대로 눈이 마주쳤다. 좀 가만히 있…. 지훈이 뭐라고 할 틈도 주지 않고 지호는 화분에 가지런히 꽂혀있던 이름 모를 꽃을 지훈 앞에 내보이며 이게 뭐냐고 물었고, 지훈은 휴, 한숨을 쉬며 의자에 앉은 몸을 한 번 뒤척였다. 꽃. 지훈의 말에 지호는 아, 라고 입술을 한 번 뗐다가 이내 꽃을 다시 화분에 꽂았다.
" 그래도 존댓말 찍찍하면서 순종적인거 보단 낫네. "
" 뭐? "
" 우지호, 너한테 안 질려고 그렇게 덤볐었잖아. "
" ……. "
이건 뭐야? 이번엔 벽에 걸려있는 거울을 가리키며 묻는 지호에 지훈은 미간을 좁혔다. 거울에 비친 지호의 모습이 1년 전, 자신의 곁을 떠났던 지호의 모습과 겹쳐서 희미하게 자리 잡았다. 자신의 물음에 대답 않는 지훈에 지호가 이내 심드렁한 표정을 지어 보이자 박경이 한 번 힐끔 보더니 거울, 이라며 지훈 대신 답했다.
" 아니, 만들 때는 저런 기본적인 거는 다 입력하는 거 아니냐고. "
" 그렇지. "
" 씨발. 무슨 내가 애 키우는 것도 아니고. 뭐, 다 하나하나 가르쳐야 해. "
" ……. "
" 뭐가 잘못됐다니깐? "
박경은 별것 아니라는 듯 손을 휘휘 저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곁눈질로 잔뜩 굳어있는 지훈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일단, 다음에 다시 얘기하자. 박경의 말에 지훈은 마지못해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우지호. 지훈이 짧게 부르자 거울에 시선이 머물던 눈을 돌려 지훈에게 박힌다. 선뜻 만지지 못하고 지훈은 손짓으로 나가자며 지호에게 내보였고 지호는 먼지 붙은 바지를 탈탈 털며 몸을 일으킨다. 그 모습까지 진짜 사람 같아서 괜히 또 묘한 기분에 휩싸이는 지훈이였다. 터덜터덜 나오니 그를 뒤따라오는 지호는 상당히 들떠있는 모습이었다. 밖에 나오는 게 좋은가. 지훈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무리지어가는 사람들. 어린아이와 손을 잡고 가는 여자. 연인과 함께 걸어가는 사람. 뛰어가는 사람. 전화통화를 하며 가는 사람. 이 많은 사람 중에도 아니, '인간' 인 척하는 로봇이 분명 존재한다고 지훈은 확신했다. 말없이 터벅터벅 혼자 걸어나가는 지훈에 지호는 그 뒤를 따라다니다 이내 지훈보다 앞서 가 딱 서고는 지훈의 얼굴 앞에 휘휘 손을 저어 보인다. 기분이 꿉꿉해졌다. 휘휘 젓는 지호의 손목을 잡고는 그대로 잡아당겼다. 인상을 잔뜩 찡그리는 지호. 넌, 아픔 같은 거 못 느끼잖아. 괜히 낯설었다. 중심을 못 잡고 비틀거리는 지호를 바로 잡고는 그대로 눈, 코, 입, 손, 발, 배 그리고 모든 것을 샅샅이 살폈다. 어느 하나 이상한 점이 없었다. 인간인가, 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 내가 누구야. "
" 주인. "
" 넌 이름이 뭔데. "
" 우지호. "
" …그럼 난 너의 뭐야. "
" …우지호 주인. "
이제부터 내가 너의 주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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