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ast love letter
“그냥 이것만 사-. 뭘 얼마나 오래 있는 다고, 고작 2~3일인데. 당신 집에 올 때는 또 장모님 음식 잔뜩 싸들고 올 거잖아. 다 못 먹어.”
바로 근처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정혁은 굽혔던 허리를 펴 귀를 기울인다. 이제는 무슨 맛인지도 모를 라면 몇 가지가 카트에 잔뜩 담겼다.
“그래도… 정말 괜찮겠어요? 그냥 가지말까?”
“아빠, 아빠, 나 이거, 이거! 응? 아빠!”
“집에 똑같은 거 있잖아, 안 돼. …됐어, 간 김에 며칠이라도 쉬다가 와. 얘 데리고 잘 있을 거니까 걱정 말고 다녀와. 장모님께 인사드리고.
너 그거 아빠가 안 된다고 했지- 얼른 안 내려놔?”
손목에 장바구니를 걸친 여자가 느긋이 앞을 스쳐지나갔다. 정혁은 본능적으로 등을 돌린다. 여자 대신 카트를 미는 사내와, 그의 아들이 뒤를 지난다.
“아빠 짜파게티 먹자, 짜파게티!”
“엄마가 라면 몸에 안 좋다고 했잖아, 안 돼-.”
가야되는데, 여기서 벗어나야 되는데, 좀처럼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얼마나 변했을까, 어떻게 생겼을까, 궁금증이 발목을 잡는다.
아이는 쪼르르 정혁 앞으로 달려와 라면을 만지작대며 보챈다. 그 모습이 퍽 귀엽다. 동글동글 살 오른 양 볼의 생기, 무엇보다 제 아버지를 닮아 작고 붉은 입술.
“…대신 딱 하나만이야? 너 때문에 엄마한테 아빠 또 혼나겠다. 자꾸 밀가루 음식 먹으면… …!!”
“… ….”
“너, 너 여기… 어떻게…!”
“지난달에 돌아왔어, 이제껏 출장으로 왔다 갔다 하다가 아예 지사를 옮기게 돼서….”
놀라 얼어붙은 표정에 당혹스러움이 번진다. 말을 하다말고 멈춰버린 제 아버지와 정혁을 번갈아 바라보던 아이가 옷깃을 잡아당기며 묻는다.
정혁의 눈에는 그 모습이 ‘얼음’에 ‘땡’이라도 해주는 것 같다.
“아빠, 아빠 친구? 아빠 친구예요?”
“어? 어-, 그게….”
“응. 아빠 친구야.”
아이 눈높이에 맞춰 앉은 정혁이 찬찬히 아이의 얼굴을 살핀다. 닮은 듯, 묘한. 정혁이 모르는 누군가의 얼굴이 뒤섞인.
“여보 안 오고 뭐해요- 한참 찾았잖아. 어…? 누구? 아는 사람?”
“아- 안녕하세요, 미국에서 같이 공부했던… 친굽니다.”
“미국에서요? 혹시 이 사람 미국에 있을 때 어땠어요?”
“여, 여보.”
“아, 죄송해요. 이 사람이 통 그때 얘길 안 해줘서…. 어땠어요? 인기 많았죠? 여자도 많고?”
“여보!”
“왜, 뭐 어때- 애인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고백하는 여자애들이 더러 있기는 했는데, 얘가 워낙 범생이가 되놔서 뭐- 하하.”
“정말요? 그때도 그랬어요?”
“학교가면 수업 듣고, 돌아오면 공부하고, 학교에도 같이 있던 한인들이 다 남자라서 그렇게만 어울려 다녔어요. 들어보니 별 거 없죠?”
“어쩜 사람이 그 예쁜 애들이랑 연애도 한 번 못해볼 수가 있어-.”
그러면서 가볍게 제 남편을 미는 손길에서 웃음이 묻어난다. 내심 이제야 마음을 놓겠다는 눈치다. 정말이지 입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다.
정혁은 침을 꿀꺽 삼킨다. 사내는 허공에 대고 손을 휘 젓는다.
“당신, 당신 사야될 건 다 샀어?”
“아니- 여태까지 당신이랑 혁이 찾고 있었어요. 나 혁이 데리고 가 있을 테니까 말씀 더 나누다 오세요. 혁아-, 정 혁-, 엄마 간다아?”
“응? 안대애- 혁이 데꾸가야지이-.”
“그래그래, 엄마랑 우리 혁이 먹고 싶은 거 사러가자-.”
어른들 말씀하시는 틈에 저만치서 아까의 그 장난감을 만지작대던 아이가 허겁지겁 달려와 제 엄마 품에 안긴다.
땀이라도 베는지 바지춤에 닦아내는 손에는 결혼반지가 보였다. 모자는 멀찍이 떨어져 가면서도 시끌벅적하다. …잠시간의 침묵.
정혁은 말을 고른다. 멀리서 아이 엄마가 아이를 부를 때마다 어색한 기분이 들어 헛기침이 터진다.
‘혁아-’
그리고 귓가에 맴도는, 빛바랜 미성.
“왜 그랬어.”
“… ….”
“아니 이름말이야, …왜 그렇게 지었냐고.”
“어떻게 여태껏 단 한 번도 날 안 찾을 수가 있어…?”
“찾으려고 했어. 너보다, 네 소식을 먼저 찾았으니까 그렇지. …너랑 많이 닮았더라. 그러면서도 제수씨 얼굴이 보이고. 말도 잘 듣게 생겼더라.”
정혁은 말없이 자신만 바라보는 사내를 향해 미소를 보인다. 자신과 헤어져서, 벌서 아이가 저만큼 클 때까지. 정말로, 너무도 많은 시간이 흘렀다.
이제는 누군가의 남편, 아버지로 변해버린 자신의 옛 사랑을, 정혁은 꼼꼼히 눈에 담았다.
카메라만 들이대면 고개를 돌려버리는 연인의 놓치고 싶지 않은 한 순간을, 모두 마음에, 기억에 담아 남기려고 뚫어져라 응시하곤 했던 그 언젠가의 습관처럼.
문득, 왜 하필 지금일까, 왜 하필 이곳일까. 생각해본다. 말 한마디를 해도 떠오르는 사람이 많아지는 이때에,
금방이라도 툭하고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녀석의 뺨을 쓰다듬어 줄 수도 없는 이곳일까, 하고.
하지만 이내, 여전히 덩그러니 서있기만 하는 사내를 향해 악수하듯 손을 내밀며 고개를 흔든다. 이때, 이곳이 아니면, 또 언제 녀석을 만나보겠는가. 하면서.
“아빠아아-!”
누그러진 표정으로, 사내는 달려온 아이를 제 품으로 안아 올렸다. 그 모습에 정혁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돌아섰다.
행복해보이니 되었다고, 아주 아프게 살고 있지는 않아 다행이라고, 속으로 말들을 삼킨다.
“혁아.”
“네-.” “-!!!”
“…왜 이제 왔어. 많이… 보고 싶었어, 아빠가.”
“엄마랑 책 읽었어요! 선호네 아줌마도 만나고, 선호도 만났어!”
“혁아… 미안해, 많이 미안해….”
“응? 아빠 왜 미안해?”
“다음에 와서 꼭 사줄게, 너… 갖고 싶은 거.”
“응! 아빠 나랑 약속!”
“응, 그래, 약속. 혁아- 아빠… 사랑해?”
목소리가 벌써 저만치 멀어졌다. 정혁은 다시 뒤돌아서, 아이를 안고 걸어가는 사내를 본다. 한 걸음, 두 걸음, 모퉁이를 돌기엔 두 걸음 모자라는 거리.
그곳에 멈춰 선다.
“아빠도… 많이 사랑해. 혁아- 아빠가… 혁이 많이 사랑해.”
숨이 멎을 듯이 뛰는 심장을 손으로 투덕인다. 아이가 이쪽을 보고 손을 흔든다. 안녕. 정혁도 손을 들어, 이미 사라진 아이를 향해 손을 흔든다.
‘혁아-.’
그리고 자꾸만 맴도는,
기억 속 빛바랜 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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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이름은 외자로 정 혁 입니다.
신화어린이집 주황반 정 혁 어린이....ㅎㅎ
'정'으로 이어지는 릭셩의 선천적 케미....ㄷㄷ...ㅋㅋㅋㅋㅋㅋ
혜성오빠 이름이 일절 언급되지 않은 이유는 성이 정氏인데 이름은 '혜성'인 것이 어색해서 그냥 뺐습니다.
자연스럽게 봐주셨다면 감사할 것 같아요..^^
+)음... 표현적이 부족한 제 필력을 대신해 보조 설명을 달자면,
마지막까지 이어지는 셩의 대사는 미안하게도 아이가 아니라 릭을 향한 것이라고 봐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ㅎㅎ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깜빡하고 그룹이랑 커플링 표시를 안했네요ㄷㄷㄷㄷㄷㄷ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