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아니었다고 나는 자부한다. 그저 익숙했던 그리움에 목말랐을 뿐이었다. 이것은 사랑이 아니다. 서로 보듬지 못했으며 그럴 생각도 서로 하지 않았다. 연인처럼 달짝지근하지도 친구처럼 다정하지도 않은 우리사이의 정의를 사랑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다.
그저 나는 지금 내 옆의 사람의 존재가 필요했을 뿐이었다. 날 사랑해주지도 사랑해달라고하지도 않았던 존재.
그래서 나는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지만 사랑한다. 내 옆에서 바로 옆에 놓인 손을 잡지 못하고 의자위에 가지런히 놓인 그 손을 나는 사랑한다.
나는 그를. 사랑하지 않았을까
[현성] 모래시계
1. 모래시계는 멈춰져 있다.
깊고 깊은 꿈을 꿨다. 꿈에서 나는 한 사람을 바라보며 웃고 있었고 그 사람 역시 나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웃으며 내게 다가왔고 내가 그 사람을 향해 한 발짝 다가가자,
[버림받은 기분은 어때?]
나를 절벽 밑으로 밀어버렸다. 거기까지가 방금 전까지 내가 꾼 꿈의 내용이었다. 그 꿈의 내용은 많이 새롭게 각색되었지만 그가 나를 버렸다는 점은 똑같았다. 실제로 그가 나를 절벽 밑으로 떨어트린 적이 있거나 하물며 담장위에 서 있는 나를 밀어본적 없었지만 나를 버리고 떠났다는 점에서는 절벽위에서 떨어트린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냥 내가 느낀 감정이 딱 그 정도 수위였으니까.
"커피 한잔 나왔습니다."
내 앞에 수증기가 몽글몽글 서려있는 잔 하나가 달그락 소리를 내며 놓여진다. 그리고 내 앞쪽에 놓인 의자에 풀썩 소리를 내며 커피를 가져다 준 남자가 앉았다.
"커피 한잔 나왔다고."
남자는 내가 커피를 들지 않는 것에 못마땅했던 것인지 꽤나 불퉁스런 목소리로 커피 잔을 손가락으로 땡땡 쳤다. 유리잔과 손톱이 부딪히는 소리가 청아하게 카페 안을 울렸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탁자 위에 엎드렸고, 한참 청아하게 울리던 그 소리는 멈췄다. 다시 카페 안은 남자가 내 곁으로 오기 전처럼 고요해졌다. 나는 탁자위에 엎드려있었다. 그리고 내 앞에 놓여 있는 커피 잔을 바라만 보았다. 무기력하게도 나는 엎드려서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먹지도 않을 커피. 뭣 하러 시킨 거야."
남자는 내 앞의 커피를 들어 자신의 쪽으로 가져갔다. 커피 잔이 내 눈앞에서 멀어졌다.
[버림받은 기분은 어때?]
[모르겠다. 이게 잘하는 짓인지는.]
[다만 확실하다면 이것이 최선의 선택이고,]
[너에게도 이득이 되는 일 아니겠어?]
커피 잔이 내 눈앞에서 멀어져간다. 그도 멀어져간다. 엎어져있던 상체를 일으켜 커피 잔을 들고 가던 남자의 손을 붙잡았다. 남자는 놀란 눈으로 나를 봐라봤고 나는 남자의 손에서 커피 잔을 뺏어가 입가로 가져갔다. 남자는 잠시 멍하니 나를 쳐다보더니 이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내게 붙잡힌 손을 털었다.
"뭐야, 음식 앞에 두고서 고사에 고사를 지내더니……."
"성열아."
"뭐."
"이제 그만 할 때가 온 것 같다."
"여기 찾아오는 거? 야, 잘됐다. 너 벌써 내 카페 찾아온 지 일주일째야, 벌써. 어서 네 생활 찾아야지. 좋은 아침부터 이러고 설치지 말고, 내 살길 찾아……."
"아니."
커피 한 모금을 입에 머금었다. 다분히 그의 취향이라고 추정되는 이 커피는 너무나도 달았다. 사실 그가 이 커피를 좋아하는지 아닌지는 잘 모르지만, 아니 그가 커피자체를 좋아하는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남자, 성열이는 내 말에 배시시 웃고 있던 얼굴을 굳혔다. 그리고 화가 난 듯 의자를 뒤로 세게 밀고 일어났다. 의자가 땅에 끌리는 기괴한 소리가 울렸다.
"성열아."
성열은 그저 뚜벅뚜벅 앞으로 걸어갔다.
"이제 그만 할 때가 온 것 같아."
주춤. 성열의 발이 잠시 멈췄다.
"이제 그만……. 성규 형이 있는 곳을 알려줘."
성열이 무너졌다. 서있던 자리에서 풀썩 주저앉고는 고개를 돌려 나를 원망스런 얼굴로 쳐다보았다. 나는 성열의 눈을 마주하지 못했다. 고개를 돌렸다. 창가자리에 위치한 내가 앉은 자리에 건물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햇빛이 나를 비췄다.
"나는 그를, 만나봐야 할 것 같아."
오늘은 날씨가 좋았다. 그와 처음 만났던 날과는 다르게, 오늘은 날씨가 참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