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사랑을 해 본 적이 있냐 물으면 그저 수줍게 웃던 소년이 있었다.
자신의 대답은 모두 했다는 듯이 웃었다.
다음 말을 꺼내지 말라는 듯이, 더 이상 물어보지 말라고 하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이 꽤 간절해 보여서 물어보지 않았다. 더 이상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그냥 소년을 웃음이 예쁘던 소년으로 기억했다.
ㅡ
"남준아!"
윤기다. 이 목소리, 발걸음, 분위기, 그 공기. 모든 게 민윤기다.
" 김남준! "
뒤돌아 보지 말아야지. 이번엔 꼭 기다려주지 말아야지.
" 야!!"
이번에도 걸음을 멈추면 난 바보야.
"응, 윤기야. "
그래, 너한테 난 이미 바보니까 괜찮아. 너랑 같이 갈 수 있는데 그게 뭐가 중요해. 내가 바보든 천재든 윤기는 그런 거 궁금해하지 않는다고.
" 김남준 뭐야. 오늘 왜 빨리 안 멈췄냐. 내 목소리 안 들렸어? "
" 아니, 그냥 걸음을 멈춰야 하는데 멈추는 법을 잊어서. 좀 오래 걸렸어. "
"뭐래 이 바보가. "
" 그런가. "
" 아니 아무튼 내가 부르면 좀 멈춰. 너 걸음도 빨라서 따라가기 힘들어. "
" 그래. 이제 빨리 멈추도록 노력해볼게. "
" 그래. 그러던가. "
아무 말 없이 걷는 이 등굣길이 좋다. 너와 함께하는 이 순간이 너무 따듯하다.
날이 아무리 추워도 심장이 빨리 뛰는 탓인가 전혀 춥지 않다. 손부터 발끝까지 따듯한 이 온기를 너에게도 알려주고 싶다.
달랑거리며 흔들리는 네 손을 잡고 싶다. 간질거리는 기분 때문에 아무 죄 없는 손등을 긁었다.
아무리 긁고 또 긁어도 사라지지 않는 간지러움 때문에 살이 까지는 것도 모르고 긁었다.
그러다 네가 내 손을 잡아줘서 알았다. 피가 나는구나. 좋다.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전혀 아프지 않다.
나를 걱정스러운 얼굴로 올려다보는 네가 너무 좋다. 입을 비죽이며 네가 대신 아파해 주는 것도, 가방을 뒤적거리며 밴드를 찾는 것도. 다 좋아.
" 윤기야 좋아해. "
"...? 뭐래 바보가. "
" 응. 그런 거 같아. 바보 맞는 거 같아. "
" 응 확실해. "
"응. "
"어. "
웃음이 난다. 바보같이 헤헤 웃는 거 윤기는 싫어하는데 내가 이렇게 웃을 때 네가 내 머리를 헝클이는 게 좋아서 자꾸 이렇게 웃게 된다.
내 머릴 쓰다듬으려 손을 올리면 그 사이로 날 쳐다보는 네가 보이거든. 민윤기는 나를 바보로 여긴다. 참 다행이다.
적어도 하루에도 몇 번씩 하는 저 고백들이 진심으로 들리진 않는 것 같아. 정말 다행이다. 이렇게 친구로 남을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 아 맞다. 남준아. "
"응? "
" 나 이사 간 데. "
"어디로? 언제? "
"몰라, 좀 멀어, 한, 일주일 뒤? "
" 빨리 가네... 어딘데. "
" 어, 한국은 아니래. 아부지 해외 발령 났는데 그 해외가 아직 안 정해졌나 봐. "
"... 어? "
" 뭐, 아무튼 나는 유학이고 가족들은 그냥 이민을 간 데. "
" 뭔 소리야. "
" 그러니까, 나 유학 갔다 온다고. 대충 군대 갈 때쯤 올 거 같다. "
" 그럼, "
너랑 나 떨어져?
" ? "
" 그럼... "
나 너랑 이렇게 같이 못 있는 거야?
네가 날 잊으면 어쩌지.
" 나 잊지 마. 다시 돌아와서 또 나랑 같이 이렇게, 걸어가자. "
" 어딜? 그땐 너나 나나 다 졸업했어. 그게 어디든. "
" 어디든 상관없어. 그냥 지금처럼 만. "
" 뭐야 싱겁게. "
" 윤기야. "
"어. "
" 좋아해. "
" 알아. "
"응. "
" 어. "
" 많이 좋아해. "
" 그래 고맙다. 안 잊을게. "
" 응. 고마워. "
윤기랑 걷는 마지막일지 모르는 순간이라고 여기니 그리 따듯하던 모든 게 뜨겁게 변했다.
손도, 얼굴도, 눈시울도. 눈이 아팠다. 울지 않으려고 억지로 눈을 부릅떴다.
그 모습에 너는 웃었지만 상관없다. 이제 와서 너한테 잘 보이는 게 무슨 소용인가.
네가 떠난다는 말에 일주일을 내리 울었다. 네가 비행기를 타고 훌쩍 떠나는 날 나는 한심하게도 너를 보지 못 했다.
나는 학교를 빼지 못했고 야속하지만 너는 내가 학교에 있을 시간에 비행기를 탔다.
너는 나에게 말 한마디 없이 새벽에 공항으로 출발했다고 꽤 시간이 흐른 뒤에 어머니에게 전해 들어서 알았다.
네가 없는 일상은 추웠다. 아침에 등교하는 그 길이 너와 함께일 때는 그렇게 짧았는데
네가 없으니 그 길이 너와 떨어져 있는 거리처럼 너무 멀었다.
겁이 나서 가지 못 할 정도로. 학교가 가기 싫다고 처음으로 어머니에게 혼나 봤다.
그날 아버지에게 맞아 죽을뻔했다. 다행히 어머니가 말려주셨지만, 저녁은 먹을 수 없었다.
너 없이 고등학교 3년을 보내고 수능도 봤다. 네가 돌아왔을 때 내가 아직 바보 면 너는 나를 지나쳐 만나 주지 않을까.
나를 너무 한심하게 여길까 봐 무서워서 공부도 열심히 했다. 결과는 흡족했다.
너에게 내 진심을 전해도 네가 바보라고 생각하지 않을 정도가 됐다고 속으로 생각한다.
수능이 끝나고 남은 시간은 온통 네 생각만 하며 지냈다. 그러다 우연히 아버지가 하시는 통화 내용을 들었다.
아버지는 강인한 분이시다. 나는 아버지가 눈물을 흘리시는 걸 본 적이 없다.
근데 그날 아버지는 울고 계셨고, 나도 함께 울었다.
윤기의 아버지는 해외로 가 열심히 하셨다고 한다.
하지만 노력에 언제나 결과가 비례하진 않듯 실적은 좋지 않다고 했다.
그 결과 본사에선 윤기네 아버님 부서를 없애버렸다고 한다.
한순간에 아저씨는 평생을 받쳐 일한 징작이 사라졌다.
아저씨가 많이 힘들어하셨다고 한다. 아줌마는 그런 아저씨를 대신해 여기저기 돈이 되는 일은 다 하러 다니셨다고 한다.
하지만 아줌마가 동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아줌마는 부당한 대우를 받으셨다고 한다.
노력과 시간은 공정하지 않았고 윤기는 그 상황 속에서 더 이상 학교를 다닐 수가 없다고,
마지막 남은 등록금을 내지 못 할 걸 알아 홀로 자퇴를 했다고 했다.
윤기가 자퇴한 날 아저씨가 좋지 않은 선택을 하셨다.
아저씨는 한국으로 돌아가자며 가족들을 데리고 스스로 운전을 해 공항으로 가셨다고 한다.
아저씨는 공항 가는 길에 있던 바다, 그 위 절벽을 달리며 그림 같던 풍경 속으로 뛰어드셨다고 한다.
절벽 밑은 파도가 심한 파도였고 차는 으스러져 찾을 수가 없다고 한다.
그 안엔 윤기가 있다. 우리 윤기가 있다. 내 3년을 버티게 해준 윤기가 있었다고 한다.
내게 돌아오겠다 약속한 윤기가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너무 아팠다.
그리고 윤기가 나에게 쓴 편지하나가 왔다. 윤기의 유품들을 정리하던 와중에 내게 보낼 것이었는지 내 이름이 쓰여 있었다고 내게 보내줬다.
남준이에게.
남준아 잘 지냈냐. 나 잊은 거 아니지?
한국은 지금 춥나? 여긴 그냥 미적지근하다. 여름도 아니고 가을도 아냐.
나 이제 곧 너 만나러 갈 수 있어. 학교 졸업은 잘 했어?
나 한국 가서 검정고시나 보려고. 너 공부는 잘했으니까
나 좀 도와줘라. 음악 말고 공무원이나 할라니까.
딱 한 번만 더 내면 됐는데 그 한 번이 그렇게 어렵더라.
뭔 등록금이 그렇게 비싼지.
딱 한 번이니까 그것만 내면 나도 어떻게든 음악 하면서 살았을 텐데. 진짜 아쉬워.
남준아 보고 싶다. 여긴 별로 날 좋아하지 않아.
네가 바보처럼 웃는 거 보고 싶어.
나한테 좋아한다고 네가 하도 말해서 남들은 안 해주나 봐
너한테 들으라고.
근데 넌 무슨 연락이 한 번 없냐. 너무하다 지가 먼저 기억하라고 그랬으면서 네가 먼저 잊은 건 아니지?
남준아 나 네가 너무 보고 싶어. 너도 친구들도, 학교도, 한국도다.
그냥 여기 오기 전에 너랑 마지막으로 걸었던 그 길.
다시 가고 싶다. 너랑 다시 걸어가면서 나 어디 간다고 그러면 네가 나 좀 잡아줬으면 좋겠다.
그러면 좀 달라졌을 수도 있는데. 아쉬워라.
아니 아무튼 잘 지내냐고. 그냥 곧 한국가니까 가면 아는 척도 좀 해주고 나 좀 도와달라고.
이메일 주소 까먹어서 내가 손편지를 다 쓴다.
그냥 아무튼 나 갈 때까지 건강하게 잘 지내. 아프지 말고.
나 보면 또 좋아한다고 해줘. 그거 너무 듣고 싶어.
사실 진심인 거 아는데 맨날 그냥 넘어가서 미안하다.
그래도 속으론 엄청 좋아했어.
뭐, 이런다고 네가 알기나 하냐. 남준아 이제 다시 만나면
네가 하는 말 진심으로 들을 거야. 나 이제 후회도 안 해.
그냥 만나고만 싶다.
20131200
민윤기.
윤기 네가 준 편지가 젖을 까 울지도 못했어.
네가 곧 온다고 써놔서 나 잠도 안 자고 밥도 안 먹고 하루 종일 널 기다려 윤기야.
이 편지가, 네 소식이 3년 만에 나한테 온 것처럼 내가 기다리면 너도 올 것 같아.
그래서 기다리고 있어. 나 이제 네가 부르면 바로 멈출 수 있어. 한 번이라도 좋아. 딱 한 번만 불러주면 돼는데
왜, 너나 나나 그 한 번이 어렵냐.
윤기는 따듯하다. 그 모든 순간이.
너는 내게 있어 가장 찬란한 것이었다.
내 모든 걸 통틀어서 말이다.
목이 아릿하다. 눈 뒤에서 뭔가가 눈을 꾹 누른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아서 옷소매로 눈을 비볐다.
여기서 울면 네가 바보라고 놀릴 것 같아서.
난 내가 멋있어진 줄 알았는데
난 아직도 네가 떠난 날에 멈춘 17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