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예찬 靑春禮讚
; 청춘을 마음껏 칭찬하다.
作 교지부 강동원
창고로 쓰이는 방 앞에서 우두커니 서있기를 얼마간, 바지춤에 손에 밴 땀을 문지르고 문고리를 돌렸다.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을 거치지 않아 먼지가 자욱한 게 목이 간질거렸다.
목을 몇 번 매만지고 멈추었던 발을 움직여 책장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디 있었더라-.
서가 위로 분주히 움직이던 시선 끝에는,
영화고 제8회 졸업앨범
켜켜이 먼지가 쌓인 추억 한 움큼이 자리하고 있었다. 천천히 손을 뻗어 그것을 꺼내들었다.
1반, 2반. 익숙한 얼굴들이 지나가며 내 추억 상자의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열린 문틈으로 지나간 내 고교시절이 가슴 한편을 가득 메웠다. 지나가버린 시절은 시간이 흐르며 퇴색되고 미화된다. 3년 동안 비참하고 끔찍한 기분을 수없이 맛보았을 텐데도 지금의 내게 그 3년은, 그저 한없이 싱그럽고 풋풋했던 시절로 남아있다.
천천히 페이지를 넘기던 손이 일순 멈췄다.
3학년 7반 정재현.
정갈하게 적힌 그 이름.
나는 네 이름을 보면 선명히 떠오르는 잔상이 있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나의 발목을 붙잡고 늘어지는, 그런 잔상이 있다.
불현듯 눈가가 뜨거워지며 시야가 일렁였다. 반듯한 글자들은 물이 번진 수채화 그림처럼 형태를 잃고 부유했다. 이내 눈물이 보조개가 움푹 파인 네 두 볼을 적셔갔다.
한국행 비행기를 타면서도 떨리지 않던 가슴이, 병원 내 엘리베이터를 타자마자 쿵쾅거렸다. 이제야 한국에 온 실감이 나는 건가.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썩 유쾌한 떨림은 아니었다. 엄마의 병실이 있는 층을 누르곤 거울을 보니 한껏 울상인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먼 타지에서 그렇게나 보고 싶던 엄마를 보는 날인데 뭔 울상이래. 양손을 들어 양쪽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가관이다. 띵- 기계음과 동시에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고 나는 숨을 크게 한 번 들이쉬고선 당찬 첫걸음을 내디뎠다. 알싸한 약 냄새가 미미하게 코끝을 맴돌았다.
“김간 있지 1024호 학생 오늘 아침에…”
“저기 죄송한데…, 윤혜숙환자 몇 호실인지 알 수 있을까요?”
“아, 네. 잠시만요.”
간호사가 알려준 병실은 긴 복도 끝에 위치하고 있었다. 1024호. 윤혜숙. 병실 문엔 엄마의 성함만이 홀로 쓰여있었다.
문을 조심스레 열자 침대에 모로 누운 엄마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적막한 병실의 분위기와 조금 야윈 듯한 엄마의 모습에 난 괜히 소리 높여 엄마를 대차게 불렀다.
나는 옆자리 아저씨가 코를 무지막지하게 고는 바람에 한국으로 오는 동안 한숨도 자지 못했다는 사소한 이야기를 재잘재잘 늘어놨다. 엄마는 깎은 배에 포크를 찍어 내게 건네주며 내 눈을 가만히 바라보셨다.
“ 여주, 너도 이제 한국에 발붙여야지…. 엄마도 이렇게 아픈데. ”
미국에서 있었던 일, 비행기를 타고 오며 있었던 일. 어쩌면 이 모든 시답잖은 이야기들은, 엄마의 이 말을 피하고자 하는 내 얄팍한 술수였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시선을 피하며 배를 한입 베어 물었다. 시큼한 과즙이 입안에서 톡톡 터진다.
“ 이제 좀 나아졌다곤 하지만…, 막말로 엄마가 또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 거 아니니. ”
“ …엄마는 무슨 그런 소릴 해. 건강하셔야죠. 우리 윤 여사님. ”
나는 이번에도 웃음으로 상황을 무마했다. 짬이 나도 한국으로 오지 않았던 것. 때때로 엄마의 전화를 받지 않았던 것. 나는 엄마의 이 말이 늘 두려웠다. 한국에 정착. 엄마의 바람이 간절한 것은 그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난 엄마의 말을 따를 수 없다. 그래서 난 늘 엄마에게 죄인이었다. 가슴에 무겁게 내려앉은 죄책감이 날 자꾸 도망치게 했다. 이번엔 혹시 마주할 용기가 생기지 않을까 했으나 역시 그대로였다.
하얗고 두툼한 배를 괜스레 포크로 푹푹 찔러댔다. 과즙이 접시에 배어 나온다. 문득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옆 침대가 휑한 게 눈에 들어왔다. 유학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엄마와 통화를 할 적이면 엄마는 늘 통화 마지막 무렵에 눈물을 흘리시곤 하셨다. 그런데 어느 날에 평소와도 같이 걸려온 엄마의 전화는 가득 활기차 있었다. 낯선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메말라가던 나조차도 덩달아 신이 나 무슨 좋은 일이 생겼냐고 여쭸던 기억이 난다. 엄마는 병실에 나랑 동갑인 남학생이 들어왔는데 아들같이 싹싹하게 굴어서 여간 귀여운 게 아니라고 하셨었다. 문득 그때의 생각이 나 엄마에게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엄마, 옆 침대 비었네? 그 남자애는 어디 있어? 나랑 동갑이라고 했던.”
“아, 걔? 많이 나아져서 오늘 퇴원했어. 너무 잘 됐지.”
“한 번 보고 싶었는데, 아쉽네. 엄마가 하도 잘생겼다고 했어야지. 근데 걔는 어디가 아파서?”
“선천적으로 심장이 약했대.”
포크로 배를 쿡쿡 찔러대던 손이 멈췄다. 안 먹고 뭐 해? 엄마가 물은 후에야 난 고개를 끄덕이며 입에 배를 넣고 씹길 반복했다. 시큼했던 과즙의 맛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들고 온 짐이 한 보따리인 터라 집에 가야만 했다. 엄마에게 집에 들렀다 온다고 말씀드린 후에 병실을 나섰고 그 길로 바로 택시를 타, 집에 도착했다. 오랜만에 오는 집. 내 방. 침대에 대자로 뻗어 누워있다가 다시 몸을 벌떡 일으켜 짐을 정리했다. 대충 화장품만 화장대에 올려놓고 옷도 간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방을 나와 물을 마시려 주방으로 향하는데, 창고로 쓰이는 방이 눈에 밟혔다.
창고로 쓰이는 방 앞에서 우두커니 서있기를 얼마간, 바지춤에 손에 밴 땀을 문지르고 문고리를 돌렸다.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을 거치지 않아 먼지가 자욱한 게 목이 간질거렸다.
목을 몇 번 매만지고 멈추었던 발을 움직여 책장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디 있었더라-.
서가 위로 분주히 움직이던 시선 끝에는,
영화고 제8회 졸업앨범
켜켜이 먼지가 쌓인 추억 한 움큼이 자리하고 있었다. 천천히 손을 뻗어 그것을 꺼내들었다.
1반, 2반. 익숙한 얼굴들이 지나가며 내 추억 상자의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열린 문틈으로 지나간 내 고교시절이 가슴 한편을 가득 메웠다. 지나가버린 시절은 시간이 흐르며 퇴색되고 미화된다. 3년 동안 비참하고 끔찍한 기분을 수없이 맛보았을 텐데도 지금의 내게 그 3년은, 그저 한없이 싱그럽고 풋풋했던 시절로 남아있다.
천천히 페이지를 넘기던 손이 일순 멈췄다.
3학년 7반 정재현.
정갈하게 적힌 그 이름.
나는 네 이름을 보면 선명히 떠오르는 잔상이 있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나의 발목을 붙잡고 늘어지는, 그런 잔상이 있다.
불현듯 눈가가 뜨거워지며 시야가 일렁였다. 반듯한 글자들은 물이 번진 수채화 그림처럼 형태를 잃고 부유했다. 이내 눈물이 보조개가 움푹 파인 네 두 볼을 적셔갔다.
“악! 야! 정수정 너 죽을래!”
전쟁은 적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됐다. 차가운 물줄기가 급작스레 내 얼굴을 덮쳤다. 그 공격을 선두로 나는 체육복 소매를 위로 걷으며 기다렸다는 듯 수돗가로 달려가 손에 물을 담고 적군에게 무차별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고, 내 옆에 있다가 영문도 모르고 봉변을 당한 아이들도 너 나 할 것 없이 앞다투어 물줄기를 뿌려대기 바빴다. 어제부로 시험도 끝나고 방금 7교시 체육도 끝났으니 묘한 해방감이 우리를 부추겼다. 아군인지 적군인지 구별도 없이 무작정 서로에게 공격을 가하는,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잠시 목을 축이려 수돗가로 걸어오던 아이들도 이 난장판에 합세했다.
내게 처음 공격을 퍼부은 수정이가 항복을 선언하며 이 전쟁은 종전에 가까워졌다. 아이들도 이젠 지쳤는지 비 맞은 생쥐처럼 쫄딱 젖은 서로를 보면서 킬킬대며 웃었다. 나도 체육복 상의를 비틀어 물을 짜내면서 배가 당길 때까지 웃었다. 야- 이제 가자. 수정이가 벗어두었던 체육복 상의를 걸치며 수돗가를 먼저 나섰다. 나도 덩달아 교실로 들어가려 하는데 문득 내 눈에 수돗가 한편에 버려진 빈 생수병이 들어왔다. 뒤돌아가는 수정이의 뒷모습을 한번, 빈 생수병을 한번. 씩,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야, 정수정! 받아라!”
살금살금 발소리를 죽이며 정수정의 뒤로 다가갔다. 이 정도면 도망갈 거리는 확보했고. 너도 당해봐라!
꾹 다문 입새로 킬킬 거리는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금방이라도 도망갈 태세를 갖추고 차가운 물로 꽉 채운 생수병을 수정이에게 휘두르려는 찰나,
“잠깐만- ”
별안간 날 치고 지나간 반 애 덕에 물줄기가 예상과는 다른 방향으로 뻗어나가는 것이 보였다. 어…… 안돼, 안돼…!
허공으로 애처롭게 뻗은 내 손이 무색하게도, 가야 할 목적지를 잃은 물줄기는 애꿎은 곳에 종착했다.
“ ………. ”
물방울이 턱끝으로 방울지며 떨어져 내렸다. 나는 차마 물을 뒤집어쓴 애의 얼굴을 볼 수 없어, 급하게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 애의 키가 꽤 큰 건지 시선이 닿은 연한 회색 바지에는 그을린 것 마냥 짙은 얼룩이 져있었고, 시선을 천천히 올리자 보이는 하얀 와이셔츠도 이미 푹 젖어버려 속에 입은 검은색 티가 비쳤다. 이름이 새겨진 푸른색 이름표도 짙은 남색으로 물들어갔다. 정재현 나는 그 세 글자가 새겨진 이름표에만 시선을 고정했다.
“……저, 저기… ”
“ ……. ”
“미, 미안! 나는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진짜 미안!”
살짝 눈을 올려 그 애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그 애는 턱 끝으로 연신 떨어져 내리는 물방울을 손등으로 훔치며 날 잠자코 보고 있었다.
“아, 내가 수건 가져올게.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줘! 진짜 미안해.”
여름이라 그런지 예고도 없이 쏟아지는 소나기로 늘 사물함에 수건을 두고 다녔던 게 불행 중 다행이었다. 속으로 연신 큰일 났다 큰일 났다 외치며 계단을 두 칸씩 뛰어올라갔다.
반에 도착하자마자 숨을 고를 새도 없이 사물함에서 곱게 개어진 수건을 품 안에 넣었다. 혹시 몰라 사물함 한 편에 놓여진 휴지도 집었다. 아, 기다리겠다. 아무리 여름이라 해도 꽤 추울 텐데…. 그런 생각이 내 발걸음을 부추겼다.
“아씨, 비 오네. 우산도 없는데…!”
우뚝. 들려오는 보미의 짜증 섞인 목소리에 문가로 향하던 발걸음이 멈췄다.
비…?
고개를 돌리니 굵은 빗줄기가 희뿌연 하늘에서 연신 쏟아지는 게 눈에 들어왔다.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적막한 교실을 가득 메웠다. 운동장에 있을 그 애……. 나는 허겁지겁 발길을 돌려 창가로 다가갔다.
“ 여주야, 나와봐. 창문 닫게. ”
어느새 팔이 열린 창문으로 들어온 빗방울로 흠뻑 젖었다. 옆으로 다가온 보미의 말에도 나는 아무런 미동도 없이 열린 창문으로 운동장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운동장을 가로질러 가고 있는 그 애. 굵어지는 빗줄기를 그대로 맞으며 걸어가는 그 애. 정재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