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러는 걸까. 왜 나는 자꾸 널 보러 오는 시간을 앞당기고 싶고 네가 웃는 게 보고싶고 막무가내로 떼를 쓰게 되는 걸까.
좀처럼 답이 나오지 않아 고개를 흔든 석진이 버스에 올라탔다. 어둑하게 내려앉은 하늘이 슬펐다. 석진은 창밖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여주를 떠올렸다. 그 애는 언제부터 이 거리에 섞이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며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그는 짙은 한숨과 함께 눈을 감았다.
“야, 너 오늘 시간 있냐?”
“….”
“시간 있냐고!”
“….”
“야! 김석진!”
“어! 어?”
“무슨 생각을 하길래 정신을 아예 빼고 있어?”
“아무 생각 안했는데?”
“지나가던 개가 웃겠네.”
친구가 어이없다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석진은 제가 말하고도 믿지 않을 말에 멋쩍은 얼굴을 하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멋쩍은 얼굴을 하는 석진에 친구가 고개를 흔들며 인심 쓴다는 얼굴로 말했다.
“오늘 시간 있냐고.”
“오늘? 없을 것 같은데. 왜?”
“뭐야, 왜 없는데!”
“갈 곳 있어.”
“여자 보러 가냐?!”
“….”
“대박- 진짜?”
여자 보러 가느냐는 친구의 말에 석진이 대답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자 친구가 호들갑스럽게 행동했다. 주변의 시선이 그에게 몰려 들었다. 무슨 말이 듣고 싶은 건지 친구는 계속해서 어떤 여자인지 물어봤지만 그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한참을 시달리고 있던 차에 교수가 들어오고 서야 석진은 친구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
앞에서 교수가 열정적으로 강의를 하고 있었으나 석진의 귀에는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여주의 생각 밖에 없었다. 처음이었다. 제가 없는 동안 여주가 무얼 하고 있을지에 대한 궁금증이 생긴 것은.
보통 사람들은 누군가를 기다릴 때 제가 해야 할 일을 하면서 기다리거나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기다린다. 하지만 여주는…? 그 애는 무엇을 하면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해야 할 일? 지금 그 애에게 해야 할 일이라는 게 있나? 아니면 하고 싶은 일? 있을까?
그러고 보니 여주에게서 그녀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다는 것을 석진은 그제야 알아차렸다. 항상 저만 말해왔지 단 한 번도 여주가 말했던 적은 없었다.
“아….”
그는 순간 먹먹해졌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는 것 하나 없는 남과 다름없는 사이였다. 석진은 당장 여주에게 달려가 제가 모르는 여주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초조하게 몸이 들썩거렸다.
“야, 오늘만 진짜 안 돼?”
“안 돼. 뭐 때문에 그러는데.”
“과팅….”
“…난 못 간다.”
듣는 둥 마는 둥으로 강의를 끝까지 들은 석진이 자리에서 일어나기 무섭게 친구가 석진의 소매를 잡고 늘어졌다. 불쌍한 얼굴로 말하는 친구에 뭔가 중요한 일인가 싶어 묻자 들려오는 대답에 그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젓고 매몰차게 강의실을 나갔다. 병원으로 향하는 걸음이 무거우면서 가벼웠다. 점점 속도가 붙은 발걸음에 석진의 얼굴에도 작은 웃음이 점차 번져갔다.
…보고 싶다. 어서 가 보고 싶다.
그는 제가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무의식에 번지는 생각은 홀로 병실에 있을 여주의 모습을 제 멋대로 그려냈다.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앉아있을 지 누워있을지, 확실하지 않은 모습을 여러 차례 그려낸 석진은 눈동자에 병원만을 담으며 빠르게 걸었다.
“후….”
신난 걸음으로 오긴 했는데 막상 병원 앞에 도달하니 이상하게 긴장되기 시작했다. 손바닥에 배이는 식은땀에 그가 손바닥을 비비며 긴장된 몸을 풀었다. 천천히 들어선 병원은 고요했다. 병원으로 오기까지 걸었던 거리와 다른 세상인 것 같았다. 석진은 발소리에 주의하며 여주가 있을 병실로 조용히 걸었다. 한발짝 한발짝 병실과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손바닥에 땀이 더 배였다. 마침내 문 앞에 선 그가 숨을 마시고 천천히 쉬어 냈다.
“….”
이 문을 열면 여주가 있다. 석진이 마른 침을 삼켰다. 질끈 눈을 감은 그가 떨리는 마음으로 문을 열었다.
“…반장?”
“…아-.”
석진은 여주의 목소리를 들으며 눈을 떴다. 생각하지 못했던 장면이었다. 낮과 저녁의 경계선 같은 하늘빛에 비친 여주의 모습은 바스라 질 것 같으면서도 눈부셨다.
“안 들어오고 뭐해.”
여주가 웃음을 섞으며 말했다. 살짝 지어진 웃음에 석진이 살짝 벌리고 있던 입술을 닫고 서둘러 여주에게로 다가갔다.
“달려왔어?”
“어, 어? 아니, 왜?”
“땀 났길래.”
가까이 다가온 석진의 얼굴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땀을 가리키며 말하자 석진이 놀란 눈으로 땀을 닦아냈다. 처음 보는 모습과 행동에 여주가 비실 나오는 웃음을 숨기지 않고 연신 웃자 그가 민망한 듯 입술을 오므리고 피기를 반복하다 여주를 흘긋 보며 말했다.
“뭐 하나 부탁해도 돼?”
“부탁? 뭔데?”
부탁은 제가 하기만 했지 처음 받는 부탁에 여주가 궁금증을 한가득 담고 석진을 올려보자 그가 살풋 웃으며 말했다.
“널 알고 싶어.”
“응?”
“네 이야기를 듣고 싶어.”
“….”
“나에게 널 들려줄래?”
나를 들려 달라니.
여주는 석진의 말을 곱씹는 듯 한참을 대답하지 않은 채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반장. 네가 나에게 해준 이야기처럼, 즐겁고 기분 좋은 일들은 겪어본 적이 별로 없는데. 굳이 말하자면, 지금 네가 여기 있어주는 것 정도. 그게 내 인생에서 가장 즐겁고, 기분 좋은 일인데.
낯빛이 어두워진 채로 여주는 한참을 고민했다. 아프고 나서부터의 이야기는 늘상 똑같았다. 아프거나, 덜 아프거나. 몸이 아주 조금이라도 괜찮은 날이면 도피하듯 옥상정원으로 가는 게 일상이었고, 무언가를 먹을 수 있는 날보다는 먹지 못하는 날들이 더 많았다. 최근에는 컨디션이 더 안 좋아져 꾸역꾸역 먹은 음식들이 속을 부대끼게 만들어 게워내기 일쑤였다. 하지만 석진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진 않았다. 그는 제가 조금 늦게 일어나는 것에도 안절부절못하는 사람이니까. 제가 그를 생각하는 마음과, 그가 저를 생각하는 마음은 분명 다를지라도. 석진에게 저는 항상 예뻐 보였으면 하니까.
“….”
“….”
여주가 한참동안 말이 없자 석진의 얼굴은 괜한 말을 꺼낸 것이 아닌가 싶어 어두워졌다. 멋대로 흐르는 시선을 따라 그의 얼굴을 본 여주가 부러 밝은척하며 입을 열었다.
“내 이야기? 반장 내가 궁금하구나.”
“응, 네 이야기. 나만 이야기했잖아, 나도 궁금해.”
일부러 한음 높인 목소리에 석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는 안도한 기색에 여주가 작게 웃었다. 아무리 봐도 고등학생 때와 다를 바 없는 때 묻지 않은 순수한 구석에 여주가 이불이 덮힌 무릎을 끌어안고서 다시 생각해도 비식 웃음 나는 그 때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여기 오고선 옥상정원에 매일같이 갔어. 거기 올라 있으면, 세상이 한눈에 보이잖아. 내가 예전에 탔던 버스도 보이고 내가 알 것 같은 사람들도 막 돌아다니고- 형형색색으로 물든 세상을 내려 보고 있으면 그게 활기차보여서 나도 덩달아 신나곤 했어.”
“…응.”
“하루는 산책로를 따라서 걷는데 갑자기 초콜릿이 너무 먹고 싶은 거야. 몸에 안 좋으니까 간호사언니한테 부탁하면 분명 안 된다고 하면서도 어떻게든 갖다 줄 걸 알고 있는데도 그냥, 내가 사러 가고 싶은 거야. 그래서 엄청 고집을 부렸다?”
“…응. 그래서?”
왠지 석진의 목소리에 눈물이 걸려있는 것 같았다. 시선을 돌려 그를 바라보면 목소리와 같이 눈에도 눈물이 걸려있을 것 같아 여주는 시선을 애써 시선을 다른 곳으로 고정시키고 마른 입술을 슬쩍 깨물었다.
너에게는 밝고 즐거운 이야기들만 전해주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 미안하지만, 그래도 이게 나니까. 네가 슬퍼하지 않고 들어주면 좋겠다.
“…고집을 부리고 나갔는데, 막상 나가니까 길을 하나도 모르겠는 거야. 그래서 어떻게 했게?”
“어떻게 했는데?”
약간 장난스러운 여주의 말투에 석진의 말투에도 장난이 묻어났다. 그 목소리에 여주가 안도하며 시선을 그에게 맞췄다.
“반장, 너 지금 엄청 기대하는 눈인데.”
석진의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반짝거리는 눈을 보고 있자니 아까 눈을 보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항상 밝은 척하는 제가 초콜릿을 사먹고 돌아왔을 거라 분명 생각할 테지만 사실은 그러지 못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가 된 것처럼 앞에 펼쳐진 세상이 두렵고 무서워서 결국 뒤고 안 돌아보고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던 과거의 기억에 여주는 까끌한 입을 다셨다.
그때, 네가 있었으면 흔들림 없는 모습으로 손을 잡아줬을 텐데.
“아니야~ 그래서 어떻게 했는데?”
“…당연히 사먹었지. 그렇게 먼 길도 아니던걸, 뭐. 초콜릿 진짜 맛있었는데.”
무서움에 세상으로 한발 디디지도 못하고 초콜릿도 사먹지 못했으면서도 석진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것은 싫어 여주는 미세하게 떨리는 제 목소리를 숨기며 거짓말 했다. 이런 내용으로 거짓말 한다는 것이 우습기도 했지만 그녀는 그가 이 거짓말을 믿고 웃어주는 것만으로도 거짓말 할 이유가 충분했다.
“…맛있었겠네.”
“그치? 아- 그리고 또 무슨 일이 있었더라.”
거짓말이어도 좋아, 그러니까 나도 너를 알고 싶어.
석진은 물끄러미 횡설수설하는 여주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칠라 하면 재빠르게 다른 곳으로 피하는 그녀를 보며 석진은 본능적으로 여주가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는 눈치가 빠른 편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는 모르는 척 하기로 마음먹었다. 여주가 기껏 제 생각을 하며 해주고 있을 얘기를 망치고 싶지 않아 석진은 다정한 시선으로 계속해 여주를 바라보았다. 다만, 여주의 목소리가 조금씩 작아지다 이내는 흐느낌으로 바뀌는 걸 제 눈으로 보고 있는 지금. 더 이상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0ㅁ0
오랜만입니다! 설 잘 보내셨나요?
저는 아주 잘 보냈습니다!
다음편을 얼른 올리고 싶었는데 3일동안 비밀번호를 찾지 못해 고생하다
드디어 올리게 되었습니다 하하하
오늘도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땅위], [디즈니], [열렬], [윤기윤기], [어른꾹꾹], [잠만보], [너만볼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