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고 싶어서 또 지워 버리고 싶어서
자신을 내리누르는 감정의 무게를 덜어내 버리고 싶어서
차가운 겨울 바람을 뚫고 무작정 달렸다.
그렇게 미친듯이 뛰다 보니 마음이 조금 후련해졌다 싶었는 줄 알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태형의 착각이였을 뿐
또 다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탄소에 대한 추억이 다시 파도처럼 밀려와 태형을 집어삼켜 버리니
단 하루도 멀쩡하게 살아있는거 같지 않다는 것을 느껴버린 태형은 괴로움에 몸부림을 치다가
결국 제 머리를 양손으로 감싸 쥔 다음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그렇게라도 해야 제 안에 남아있는 슬픔을 분출할 수 있을거 같아서...
"미쳤지 내가 무슨 자격으로 또..."
그렇게 정신 없이 뛰다 보면 제 의지와 상관없이 늘 항상 도착하는 곳은 탄소의 집 근처였고
태형은 아직도 탄소를 잊지 못한 자기 자신이 한심하고 원망스러웠던건지
제 옆의 아무 죄도 없는 전봇대를 손바닥으로 여러번 내리치고 말았다.
끼이익-
순간 제 귀에 들리는 꺼림칙한 대문 열리는 소리에 재빠르게 반응한 태형은
전봇대 옆으로 제 몸을 숨겼고 누가 문을 열고 나왔는지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조심스레 내밀었다.
"번호 차단했다더니 어떻게 한번을 연락 안하냐? 나쁜자식..."
탄소였다.
매일 밤 꿈속에 나타나 태형의 마음을 괴롭히는 것도 모자라
하루에도 수십 번 눈물이 터져 나올 때마다 목놓아 부르던 탄소가 지금 태형의 눈에 들어왔다.
"탄소야...김탄소..."
차마 탄소가 들을 정도로 크게는 말할 자신이 없었던 건지
멀리서 바라보며 작은 목소리로 애처롭게 탄소의 이름을 여러번 되뇌이다가
결국 제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던 나머지
태형은 다시 전봇대 옆으로 몸을 숨긴 채 제 오른손을 들어 눈물을 닦았다.
"난 언제쯤 네게 어울리는 멋진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그렇게 한참동안 그 자리에서 서성이며 탄소를 지켜보던 태형은 도저히 버틸 자신이 없어 많이 힘들었던건지
결국 그 자리에서 뛰쳐나와 다시 제 집을 향해 미친듯이 뛰기 시작하고 말았다.
"이게 도대체 몇번째 선자리 입니까?"
"죄송합니다 도련님. 오늘은 꼭 나가보시라는 회장님의 말씀이 계셔서..."
"아버지는 항상 그런식이죠. 집안의 자존심만 챙기고 하나밖에 없는 아들은 나몰라라 하시고..."
이번에는 또 누굴까 하며 지겹다는 듯이 말하고 있는 이 남자.
표면상으론 대한민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어마무시하다는 J 그룹을 진두지휘하는 전회장의 하나 밖에 없는 아들 전정국이지만
그를 아는 사람들 사이에선 여자들의 눈물, 콧물을 쏙 빼는 악명높은 나쁜남자로 소문이 난지 꽤 오래되었다.
"도련님. 지난번에도 도련님께서 안나오시고 도망가시는 바람에 H그룹과의 중요한 계약이 깨질 뻔했던거 기억 안나십니까?
게다가 그 파투 날뻔한 계약을 다시 성사 시키느라 회장님께서도 이래저래 고생을 많이 하셨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게 내 탓인가? 그 자리에 나온 따님께서 내 스타일이 전혀 아니였는데...
김비서님도 잘 아시다시피 난 내 마음에 안드는 여자는 두 눈으로 직접보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거든요.
맘에 안드는데 거기 가는거 자체가 내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는거 잖아. 안그래요?"
"물론 도련님께서 힘드신거 저도 잘 압니다만...오늘만큼은 도망치시면 절대로 안됩니다.
회장님께서 만에하나 오늘도 도련님이 약속을 어기시고 나오시지 않으신다면
경영권 승계는 없던 일로 하겠다는 이 말을 토씨 하나 빼먹지말고 그대로 도련님께 전해달라 하셨거든요."
"아 망할 놈의 후계자, 경영권..."
정국은 여자를 울릴 줄 아는 만큼 회사와 일에 대한 욕심 또한 커 일찍부터 아버지의 뒤를 잇기 위해 경영 수업을 적극적으로 들었다.
그리고 정국의 그 야심을 전회장 또한 잘 알고 있었기에 정국을 꼼짝 못하게 만들기 위해 이번 맞선 자리에 경영권을 걸었던거고
"그래서. 오늘은 맞선 자리에 몇시까지 나가면 되는겁니까?"
"저녁 8시 전까지 J호텔 바로 옆에 있는 레스토랑의 VVIP 특실에 따로 미리 예약을 해뒀으니 시간에 늦지 않게 가시면 됩니다."
"알겠어요. 아 참! 근데 이상한게...왜 지난번과는 달리 이번에는 상대방 사진이나 프로필 같은 사전 정보를 안주는 겁니까?"
"그거야...도련님께서 사진을 보실때마다 매몰차게 거절을 하시다보니 이번 만큼은 회장님께서 도련님께 그 어떠한 정보도 미리 주지 말라고 지시를 내리셨습니다."
"참 나 어이가 없어서. 이번에는 얼굴도 이름도 나이도 모르는 비밀 맞선이라니...왠지 쥐도새도 모르게 어디로 팔려가는 기분이 드네요?
뭐 아무튼 이번에는 비서님 걱정은 안시킬테니까 너무 걱정마세요. 회사가서 일 좀 하다가 제 시간에 맞춰서 갈테니까..."
상대방의 사진은 물론 이름조차 알아내지도 못한 정국은 이런 아버지의 명령에 금방이라도 대기권 밖을 뛰쳐나가고 싶을 정도로 기가 차고 황당했지만
이렇게 된거 이내 산더미처럼 쌓인 남은 업무나 처리하면서 시간이나 때우자는 생각이 들어 곧바로 집을 나섰다.
"네 엄마...안그래도 지금 택시타고 약속 장소로 가고 있어요.
늦지 않을테니까 걱정하지 마시구요. 이만 전화 끊을게요."
김탄소의 23년 인생에 있어서 가장 슬프고 처량한 날이 있다면 바로 지금 이 순간일 것이다.
안그래도 서글픈데 비까지 주구장창 내리니 이 무슨 기괴한 조합이란 말인가.
태형과의 이별 이후 원치도 않은 남자와의 맞선에 좌절을 한 탄소였지만 끝내 엄마의 말을 거역할 수가 없었고
결국 택시에 몸을 실어 약속 장소로 가고 있는 중이다.
사실 말이 좋아 맞선이지 실제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와 다를게 없다느낀 탄소는 자신이 지금 처한 상황이 원망스러운 나머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끼이익-!
순식간이였다. 제 귓가에 파고드는 강렬한 소음과 함께 탄소가 타고 있던 택시가 갑작스럽게 멈추고 말았고
뒤이어서 주변에 있던 다른 차들도 하나 둘씩 멈춰 서더니 너 나 할 것 없이 앞 다투어서 경적을 울리기 시작하였다.
"저기 기사님. 이게 갑자기 어떻게 된건가요?"
"글쎄요. 이거 아무래도 비가 와서 길이 미끄럽다보니 앞에서 사고가 난 듯 한데..."
사고라니. 약속 시간이 얼마 안 남은 상황에서 탄소는 갑자기 초조해지기 시작하였고
결국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어 택시비를 지불하고 도로 한복판에서 내려 있는 힘껏 약속 장소를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다만 우산을 썼어도 세차게 내린 비 때문에 양말이고 옷이고 흠뻑 젖은데다가 전속력으로 뛰어가다 보니
머리까지 산발이 된 말 그대로 꼴이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변해가는 것도 모른채로 말이다.
"어쭈? 배짱 한번 대단하시네. 감히 약속 시간을 넘겨?"
약속 장소인 레스토랑에 미리 도착을 한 정국은 의자에 앉아서 누군지도 모를 상대방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늦어진 탓일까 약속 시간보다 30분이 지났는데도 오기로한 상대는 털끝 하나 보이지 않았고
결국 참다참다 인내심의 한계를 느낀 정국은 끝내 폭발해버리고 말아 이내 김비서에게 전화를 걸어 신경질을 내며 따지기 시작했다.
"예 김비서님. 전 분명히 약속 장소에 안 늦고 도착했거든요?
근데 오기로 한 여성분이 30분째 안오셨네? 이건 도대체 뭘 의미하는걸까요? 어?!"
"저 도련님 혹시 오시기로 한 분께 피치 못할 사정이 생기신게 아닐까요? 그러지 않고서야 늦을리가 없지 않..."
"이봐요 김비서님.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어떤 정신나간 사람이 중요한 약속을 앞두고 그런 말도 안되는 일을 벌여?!"
"그게 도련님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시는건 어떨까요? 제가 곧바로 그분과 통화를 해서 무슨 일이 생겼는지 확인해 보겠습니다."
"아 됐어요! 나 기분 잡쳤으니까 약속이고 뭐고 그냥 나갈거에요! 그런줄 알..."
화를 주체 못한 정국이 김비서와의 통화를 끊으려한 그 순간
갑자기 제 앞에 나타난 처참한 몰골을 하고 있는 누군가를 마주하게 되었고
그 모습을 본 순간 할 말이 바람에 날린 듯 머릿속에서 순식간에 지워졌는지 아무런 말도 없이 핸드폰을 든 채로 멍하니 제 앞에 나타난 그 사람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헉...헉...늦어서 정말로 죄송합니다."
"그쪽이 설마...내 맞선 상대?"
"네. 김탄소라고 합니다..."
김탄소. 그 이름 세 글자를 정확하게 들은 순간이였다.
정국이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도중 이내 자신도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갑작스럽게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미묘한 감정의 물결이 일렁이기 시작해 크게 요동을 치고 말았고
끝내 억지로나마 제 표정을 딱딱하게 굳힐 수 밖에 없었다.
금방이라도 들킬 것만 같은 제 마음이 탄소로 인해 몇년 만에 다시 깨어난 듯한 그 생생하면서도 이질적인 느낌을 받아서일까...
왜 이제서야 나타난걸까?
내 마음을 주체 못 할 정도로 불타오르게 만든 것도 너였고
얼음처럼 차갑게 식어버리게 한 것도 너였는데...
널 잊지못해 마치 탕자처럼 사막을 방황하다가
생명의 근원 오아시스를 다시 마주하게 된 나는
반갑다고 해야될까?
아니면 저주했다고 해야될까?
물론 어떤 답을 선택하든지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겠지
어차피 내 마음의 방향은
계속해서 너를 가리키고 있으니까.
(이번 화에 정국이가 드디어 본격적으로 등장했습니다. 짜라란!ㅎㅎㅎ)
(태태는 맘이 아프지만 2화에선 재벌 2세 꾹이를 더 멋지게 쓰고 싶었는데 말이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