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 이야기이다. 초등학교도 입학하기 전의 일이니까 오래된 이야기이다. 일곱살 무렵, 엄마와 아빠가 자주 싸웠다. 매일 소리를 지르고 접시, 쿠션, 라디오, 내 장난감까지 던져지는 것들이 있었고 눈물과 짜증이 계속 되던 때였다. 내가 그 상황들에 겁을 먹다못해 익숙해질 때 즈음 나는 할머니 댁에 맡겨졌다. 할머니의 집은 완전 시골이라기엔 도시쪽에 가깝고, 도시라기엔 또 시골인 곳이었다. 그 곳에는 자그만 뒷산같은게 있었는데 거기로 향하는 외진 길에는 산지 몇백년은 된듯한 나무가 있었다. 할머니 말에 따르면 예전부터, 왕과 왕비가 있던 때부터 기리는 제사도 하고(지금 생각해보면 굿인 것 같다.) 여러 사람들의 수호신같은 존재였다고 했다. 지금은 그런 문화도 적어지고 전쟁 등 혼란스러운 시기를 거치며 사람들도 나무도 많이 상해서 거진 잊혀진 상태라고 했다. 어쨌든 나는 그 사연많은 나무를 좋아했다. 또래 하나 없는 할머니 댁에서 그 나무는 꽤나 괜찮은 친구였다. 그 나무를 지나 조금만 올라가면 동산이었고, 작은 개울도 있었고. 어느 날, 늘 그렇듯 나무에서 놀던 나는 깜박 잠이 들었다. 그 커다란 나무에 기대어 잠이 들었는데 눈을 뜨니 캄캄한 밤이었다. 사실 실제 시간을 따지자면 여덟시 쯤이었겠지만 시골인데다, 산이라 그런지 더 어두웠다. 눈을 감으나 뜨나 똑같은 어둠이었으니까. 그때 두려움에 울음을 터트렸다. 보이는 건 없고, 쌀쌀하고, 밖이었으니까. 일곱살 짜리가 겁을 먹기엔 충분했었다. 움직이지도 못하고 울고 있는데 웅크려 앉은 내 앞으로 빛이 보였다. 발끝 앞으로 보이는 빛에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면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정말 환한, 그러나 내가 놀라지 않을만큼의 빛을 내면서 내 앞에 서있었다. 손전등도, 불도 없이 그 사람은 혼자서 그렇게 빛을 냈다. ㅡ 그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앞장섰다. 낯선 사람이었지만 가는 길이 익숙했고, 그의 빛덕에 보이는 것이 생겼으니 그의 뒤를 따랐다. 그 사람은 집으로 가는 내내 훌쩍이는 나를 달래지도, 조금씩 뒤쳐지는 나를 기다리지도 않고 그저 앞에서 걸었다. 집에 도착해서 쭈뼛거리며 인사하는 내 모습에도 고개를 끄덕이거나 하는 어떤 반응도 없이 바로 등을 돌려 사라졌었다. ㅡ 그 날 이후로 나는 할머니 집에 있는 커다란 화분같은 손전등을 들고 나무 곁에 진을 쳤다. 손전등을 들고 나가 내내 그 나무 주변에서 놀다 저녁이 되어 해가 지면 손전등을 켜놓고 잠들었던 자리에 쭈그려앉아 있었다. 그 어렸을 때 어떤 마음, 생각으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호기심이었는지, 어린 내 눈에 보인 것이 있었던 것인지. 아마 그에게서 느껴진 무언가가 있기 때문 아니었을까. 처음 일주일이 지나는 동안 나는 그 사람을 볼 수 없었다. 늦어진 귀가에 할머니가 직접 오셔서 내 손을 잡고 집으로 향할 때까지 머물러도 그 사람을 볼 수가 없었다. 기다림과 실망 속에서 일곱살이었던 내가 했던 생각은 '그때와 같은 상황이 아니어서 안 오나보다.' 였다. 모습을 드러냈던 그때와 달리 내가 빛을 가지고 있어서, 또 다른 빛이 있어서 못 온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손전등을 놓고 나무로 갔다. 안 나타나면 어쩔 셈이었는지 겁도 없이 빈 손으로 나무 곁에 진을 쳤다. 바람의 온도가 차가워지고, 땅거미가 다 질 때까지. 혹시라도 오는 걸 보지 못할까봐 어두워지는 중에도 눈을 뜬채로.(사실 무서워서 손으로 눈을 가린채 빼꼼하고 시야 확보를 조금 해둔 상태였다.) 손틈사이로 분간 안되는 어둠 속을 이리저리 살피기를 계속해도 그 사람을 찾지 못했다. 실망에 이어 손전등의 부재에 다시 겁을 집어삼킬 때 나타났다, 그 사람이. 다시 그 환한 빛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