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학 개론
-0교시-
[ Let's talk about love, let me talk about love ~ ]
시계 침이 정확히 8시 10분을 가리킬 때면 365일 중 주말, 빨간 날, 개교기념일을 제외한 모든 날에 베개 속에 파묻힌 나의 휴대폰이 요란히도 울려댄다. 아침에 누군가 깨워주지 않는 이상 도저히 못 일어나는 나나, 그런 나를 위해 1년이 넘도록 같은 시간에 전화를 걸어주는 너나. 예전에는 살짝 미안했는데 요즘 보면 저가 더 신나하는 거 같단 말이지.
" 응.. "
[ 잘 잤어? ]
" 으응.. "
[ 그럼 일어나서 세수해 ]
" ....ㅇ... "
[ 얼른 일어나- ]
" 일어났어... "
[ 아직 침대에서 안 일어난거 다 안다 ]
그 말에 눈이 번쩍 떠지며 다급히 일어나 화장실로 걸어갔다.
물소리를 들려주고 나서야 전화를 종료하고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로 세수와 양치질을 마치고, 의자에 걸쳐놓았던 교복을 입고, 동생이 건네는 내 토스트는 입에 물고 민형이 줄 토스트는 손에 쥐어 대충 신발을 구겨 신고 문을 열어 계단을 내려오면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는 민형이가 보인다.
시계를 보던 민형이 나와 눈이 마주치자 웃는다.
" 거봐, 내가 뭐랬어. 어제 영화보고 펑펑 울더니 눈도 제대로 못 뜨네 "
나는 대답하기도 귀찮아서 눈을 뜨는 둥 마는 둥 한 체로 민형이에게 토스트를 건넸다. 땡큐. 바삭- 맛있는 소리를 내며 토스트를 먹던 민형이 자연스럽게 뒤로 와서 나의 가방을 뒤적거렸다.
" 교과서는 다 챙겼고, 컴퓨터 사인펜은? "
" 아.., 가다가 사면 돼. "
" 너 저번 주에 하나 샀잖아. "
" 필통에 없어? "
" 어휴, 내가 너 그럴 줄 알고 두 개 챙겨왔지. 다음부턴 안 줄 거니까 잃어버리지 마 "
가방 지퍼를 잠근 민형이 다시 내 앞으로 왔다. 그리곤 칠칠맞게 자꾸 잃어버리지 말라며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매일 아침 학교에 가기 전 치르는 의식과도 같은 시간이다. 덜렁거리고 공부에도 별 관심 없는 나에 비해 꼼꼼하고 성적도 잘 나오는 민형이는 이렇게 매일 내 가방을 체크하고 나에게 다짐을 듣고나서야 학교로 가는 발걸음을 옮겼다.
" 야, 너 근데 머리 안 감았지. "
" 응. 왜? "
" 왜긴 왜겠어. 머리가 아주 반질반질 윤기가 흘러서 물었다. "
" 좀 심하냐? "
" 많이 "
나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어제 감아서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네.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토스트를 입에 크게 구겨 넣었다. 그런 나를 보던 민형이 한 마디 툭 던진다.
" 넌 정말 애기 때랑 변한 게 없어. "
" 뭐가 "
" 맨날 뭐 먹을 때마다 입을 이만~큼 벌려서 가득 채워 먹잖아 "
" 나처럼 먹는 게 너처럼 깨작깨작 먹는 것보다 맛있어 "
내 말에 눈 밑에 보조개를 띄우며 웃는 민형이 내 볼을 툭 건드렸다. 나는 별 신경 안 쓰고 묵묵히 빵을 먹으며 걸어갔다. 말랑말랑해. 내 볼을 만지던 민형의 혼잣말이 들렸다.
" 좀 귀엽지? "
" 글쎄.. "
" 뭐야, 그 미적지근한 반응 "
" 그래. 귀엽다 귀여워 "
그렇게 몇 마디가 오고 가니 벌써 학교 앞에 도착했다. 애들이 줄을 지어 교문에 서있는 걸 보아하니 교복 검사를 하는 것 같다. 망했네, 하필이면 줄인 치마를 입고 온 날에 교복 검사라니. 나는 휑한 다리가 신경 쓰여 조금이라도 치마를 내려보려 낑낑거렸다. 그런 날 눈치챘는지 민형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 너, 내가 치마 줄이지 말랬지. "
" 아이.. 치마 길면 웃기단 말이야 "
" 그게 더 예뻐 바보야. "
" 뭘 모르네, 치마는 짧을수록 예쁜 거야 "
" 나는 긴 게 더 예쁘던데, 너한테도 잘 어울리고 "
" 누가 보면 너가 내 애인인 줄 알겠네 "
너스레를 떨며 민형을 올려다보는데 갑자기 먼 산을 보며 헛기침을 한다. 뭐야, 감기 걸렸나. 나는 최대한 치마를 내려보려 했고 결국 학주에게 걸려 붙잡혔다. 나는 애처로운 눈으로 민형일 보며 먼저 가라고 손짓했다. 바보- 입모양을 알아챈 내가 허공에 주먹을 날리자 민형이 치아가 보이게 웃는다. 저게 진짜! 발 차기 까지 선보이려는데 학주가 나의 귀를 잡고 옆으로 데려갔다.
" 아아, 선생님, 말로 해요. 말로 "
" 김여주, 한겨울에 춥지도 않냐? "
나는 두 손을 가지런히 배꼽 위에 올리고 선생님의 올바른 지도에 고개를 수천 번 끄덕거리며 반성의 시간을 보냈다. 추워 보이는거 알면 히터 나오는 교무실에서 혼내주지. 지각을 할세라 선생님의 말씀이 끝나자마자 인사를 하고 운동장을 가로질러 뛰려는데 옆에서 불쑥 이민형이 나왔다.
" 뭐야, 안 가고 있었어? "
" 됐고 얼른 뛰어! "
쌩- 하고 순식간에 나한테서 멀어지는 이민형에게 야! 같이 가야지! 소리치며 뒤를 따라갔다. 미친 듯이 뛰어 교실 문을 열자마자 출석을 부르는 선생님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나는 자리에 앉자마자 책상에 엎어져 거친 숨을 골랐다. 그런 내 등을 토닥이며 지은이가 말을 걸었다.
" 너 학주한테 걸렸지? "
" 어떻게 알았냐. "
" 창문으로 다 보였어. 오늘 걸린 애 너밖에 없는거 알아? "
" 아.. 담임한테 불리겠네 "
" 맞다, 여주 너 컴싸 내 책상에 있어. "
" 너 가져. "
" 오다가 하나 샀구나? "
" 아니. 이민형이 줬어 "
아무렇지 않게 필통을 꺼내 사인펜을 보여주자 지은이 무언가 할 말이 있는 표정이었지만 입을 꾹 다물고 있길래 물어보려다 숨이 너무 차올라 그냥 지나쳤다.
사랑학 개론 :: 1교시
" 영어 듣기 평가는 잘 풀었어? "
" 그냥 뭐, 대충 "
" 어제 나랑 같이 공부했잖아. 그럼 잘 봐야지 "
" 나 원래 잘해서 괜찮아. "
" 오늘 들은 말 중에 제일 웃겼다. "
" 오늘 여기까지만 살아볼래? "
떡볶이를 찍으려던 포크를 그대로 들어 올리려 하자 민형이 미안 미안, 웃으며 막아섰다.
아침부터 학주에게 혼나고 또 담임에게도 혼나 기분이 꿀꿀해 매운 떡볶이집을 오자 했는데, 민형이가 매운 음식을 못 먹는 건 알았지만 내가 다섯 입 먹을 때 한 입을 겨우 먹는 걸 보니 답답하고 미안해 괜히 퉁명스럽게 말이 나왔다.
" 먹기 싫으면 진작 말하던가, 돈 아깝게 "
" 응? 뭐가? "
" 너무 안 먹잖아. "
" 잘 먹고 있는데 왜 그래. 지금 나 생각해주는 거야? "
" 웩, 절대 아니거든 "
" 아니면 아니라고만 하지 웩은 뭐냐. "
나는 입술을 내밀고 괜히 단무지만 포크로 쿡쿡 찔러댔다. 그러자 또 민형이는 웃으며 내 볼을 아프지 않게 꼬집고 만다. 나는 물 컵을 하나 더 가져와 물을 따르고 떡볶이 하나를 물에 넣어 양념을 씻어냈다. 내 행동을 멀뚱멀뚱 쳐다보는 민형이에게 하얀 떡을 들이밀었다. 처음엔 뒤로 몸을 빼던 민형이 뚝심 있게 떡을 내미는 나에 못 이겨 받아먹었다.
" 어때? "
" 먹을만하다고 하면 계속 그렇게 해서 줄 거야? "
" 아니 너가 해 먹어야지 "
그럴 줄 알았다. 민형은 떡볶이 여러 개를 집어 내 접시에 담았다. 항상 무언갈 같이 먹을 때, 특히 그 음식이 뜨거운 음식일 때 항상 민형이는 이렇게 해주었다. 익숙하게 호호- 불며 떡볶이를 식히는데 식당 안으로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들어왔다. 내 짝꿍 지은이와 같은 반 친구였다. 인사를 하고 자연스럽게 둘은 우리의 옆자리에 앉았다.
민형은 혼자 다른 반이었다. 하지만 지은이는 나와 1학년 때부터 같은 반이었기에 이제는 좀 친해질 때도 되지 않았나 싶지만 여전히 어색하게 인사를 나누는 지은이와 민형이었다. 지은이는 전부터 민형이와 친해지고 싶다곤 했으나 워낙에 낯을 가리는 민형이 탓에 매번 실패했다.
" 여주야, 야자 안 해? "
" 응. 오늘은 안 하려고 "
" 그래? 그럼 나랑 영화 보러 가자, 마지막 첫사랑 그저께 개봉했대. "
" 아, 미안 나 그거 어제 봤어. "
" 응? 뭐야아 나랑 같이 보기로 했잖아- "
" 미안 미안, 얘가 자꾸 보재서. "
턱으로 내 앞에 민형일 가리키자 지은이가 민형이를 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갑자기 이민형이 떡볶이를 잘 먹는건 기분 탓인가. 나는 지은이에게 사과를 하며 얘기했다.
" 그럼 오늘 무한적아 개봉했잖아. 그거 볼래? "
" 이미 예매했는데 "
" ...어? "
" 오늘 밤에 예매했다고 그거. "
" 아.. 아 진짜? "
" 그러면 나도 같이 보자! "
나와 민형이는 서로 영화 보는 것을 좋아해서 어릴 적부터 영화가 개봉하면 민형이 알아서 예약을 하고 나는 쫓아가기만 할 뿐이었다.
나는 다시 미안하다고 지은이에게 말하려는데, 지은이가 먼저 말을 가로챘다. 셋이서? 나의 물음에 지은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말없이 민형이를 보았다. 접시만 보던 민형이 고개를 들어 내 눈을 마주했다. 나는 눈빛으로 어떻냐고 물었는데 이민형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저거 얼굴 보니까 싫다는 표정인데.. 이걸 어쩐담. 나는 다시 지은이의 눈치를 살폈다.
" 그.. 저기.... "
" 혹시 둘이 사귀어? "
" 어? 나랑 얘랑? 절대 아니! "
" 그럼 같이 봐도 되지 않아? 그래도 우리 안지 1년 넘었는데.. "
지은이가 민형이를 슬쩍 보며 말끝을 흐렸다. 그러게 민형아. 이번엔 씹지 말고 대답 좀 해줄래. 나는 무언의 압박을 보냈고 민형은 알아챘는지 고개를 들어 지은이를 보았다.
" ...그래. "
사랑학 개론 :: 1교시
영화가 끝이 나고 지은이와 각자 집으로 가는 갈림길에서 잠시 멈춰 인사를 나누었다. 민형인 우리에게서 조금 떨어져 있었다.
" 오늘 영화 재밌었어. "
" 난 재밌었어. 그 중국 배우들 너무 귀여워 "
" 그치! 민형이 너는 어땠어? "
" ..나는 그냥 그렇던데. "
왜인지 지은이가 무안해하는 얼굴이다. 나는 대신 지은이의 기분을 풀어주려 했고 지은이와 겨우 마지막 인사를 했다. 지은이가 조금 멀어진 걸 확인하자마자 민형이를 툭 쳤다.
" 야, 너 아까부터 왜 그래? "
" 내가 뭐 "
" 아까 앉을 때도 지은이 무안하게 자리 바꾸어 앉질 않나, 계속 주머니에 손 넣고 말도 안 하고 "
" 내가 꼭 말을 해야 해? "
" 지은이 내 친구잖아. 걔가 무안해하잖아 "
" 너 친구지 내 친구가 아닌데 뭘 "
" 야 이 나쁜 놈아! "
오늘따라도 아니라 지은이와 영화를 보러 가면서부터 달라진 민형이의 모습에 나는 당황스러우면서 화가났다. 이민형 너 때문에 내가 계속 지은이의 눈치를 살피고 기분을 맞춰주느라 힘들었는데 쟤는 그걸 모르나 보다. 아니,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거다 저건.
" 내가 왜 나쁜 놈이야, 너가 더 나쁘지 "
" 뭐? 내가 뭘 잘못했는데, 얼른 말해 봐 "
" 말해봤자 뭐 해. 그렇다고 지금 우리가 싸우는 이 상황이 바뀌는 것도 아니고 "
" 말을 해서 좋게좋게 풀어야지. "
내 말에 신발 앞코로 바닥만 두들기던 민형이 나를 슥 쳐다보았다. 그러곤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또또 시작이다. 나는 기분이 좋지 않거나 화가 났을 때 무조건 그 자리에서 말로 푸는 성격이었다. 하지만 민형인 나와 정반대였다. 무언가 맘에 들지 않거나 기분이 좋지 않으면 말수가 급격히 줄어들고 대화를 피한다. 뱃속에서부터 이웃으로 지내왔지만 오늘처럼 투닥거리는 건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 됐다. 집에나 가자 "
나는 민형일 앞질러 걸어갔다. 잘 가, 내일 봐. 라는 말도 않고 나는 먼저 문을 쾅 소리 나게 닫고 집에 들어왔다. 방에 들어와 침대에 눕자마자 메신저 도착 소리가 들려 핸드폰을 확인했다.
[ 너 가방 우리집에 있다 - 17년 지기 ]
" 아.. 아 맞다. "
아악! 나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늘 영화 보러 갈 때 집까지 올라가기 귀찮아서 밑에 사는 민형이 집에 가방을 두고 가는 버릇 아닌 버릇이 있었는데 그걸 까먹고 있었다. 멍청한 김여주.
어쩌지.. 답장을 하려다 자리에서 일어나 밖을 나왔다. 예전 같으면 직접 우리 집까지 올라와 가방을 주거나 전화를 했을 텐데. 자기 딴에도 삐졌다는 걸 티내는 건가.
" 나야, 가방 가지러 왔어. "
문을 두드리며 최대한 나도 아직 화가 덜 풀렸다는 표정을 짓고 민형일 기다렸다. 문이 열리고 민형이와 눈이 마주쳤다. 민형인 세상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한 번 보곤 고개를 돌리며 가방만 떡하니 건넨다.
아오 저 쫌생이가.. 거칠게 가방을 받자마자 민형이 문을 닫으려 하길래 나도 모르게 반쯤 닫힌 문을 잡고 놓지 않았다. 민형이는 살짝 놀랐는지 토끼눈을 뜨며 나를 쳐다봤다. 뒷일을 생각 못 하고 저지른 짓이라 나도 나대로 놀라 아무런 말도, 행동도 하지 못했다.
어색한 침묵을 먼전 깬 건 민형이었다.
" 뭐.. 뭐야. "
" 그, 그게-... 동혁이 안에 있어? "
" ...갑자기 걔는 왜 "
" 아니 그냥. 오늘 하루 종일 못 봐서 인사나 하려고! "
" 너 동혁이랑 안 친하잖아. "
" .... "
" 정말 동혁이 때문에 이러는 거야? "
나는 차마 민형이 눈을 보지 못하고 고개를 아주 살짝 저었다. 미세하지만 민형이 피식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를 들으니 안심이 되면서 다시 정색을 했다. 내 머리 위로 커다란 손이 살포시 내려앉는다.
" 내일 보자 여주야. "
" ....응. "
" 잘 자고, 동혁이한텐 내가 대신 말해줄게. "
" 뭐.. 딱히 안 그래도 되는데...아니 뭐 해주면 고맙고.. "
" 귀여워, 알겠어. "
그제야 문이 닫히고 나는 멍청이 김여주! 를 소리 없이 아우성치며 집으로 올라갔다. 쿵쾅거리며 방에 들어오자마자 문에 기대어 가만히 있었다.
왜.. 왜 이렇게 심장이 뛰지. 볼을 만져보니 뜨뜻한게 기분이 묘했다. 뭐야 나 정신 나갔나.
" 정신차려라 김여주! "
* 같은 시간 민형의 집*
" 형, 여주 누나네 집 왜 저렇게 쿵쾅거려, 시끄러워 "
" 내버려 둬. 저러다 말아 "
" 그걸 어떻게 알아. 나 게임하는데 집중 안 돼 "
" 부끄러워서 그러는 거야. "
" 뭐라는 거야.. 하나도 못 알아듣겠네.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