굵은 숫자는 여주 시점에서 진행되는 글입니다!
4.
도대체 석민 오빠는 무슨 생각으로 그런 작자들을 데려온 걸까.
텅 빈 교실을 정리하며 생각했다. 보아하니 이번에 동경으로 유학 간 김 선생님을 대신할 사람을 찾아주려고 제 친구들을 데리고 온 모양인데, 그렇게 팔랑팔랑 가벼워서 야학은커녕 제 앞가림은 할 수 있겠냔 말이다. 생글생글 웃으며 얄미운 말만 해 대는 얼굴이 금세 떠올랐다.
-아, 구구단도 몰라서 죄송합니다! 학교도 못 가본 촌년이라 죄송하게 됐습니다!
... 적막 속에 내 목소리만 우렁찼다. 괜스레 민망해져 재빨리 교실을 벗어났다. 학교, 학교. 어렸을 적부터 글을 배우고 공부하는 것이 소원이었다. 아는 것은 없지만 세상이 변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히 알았던 어머니는 자신의 일터-친일파 지주의 대궐같은 저택-에서 주인집 아이들이 버린 한글 교본 따위를 주워 주곤 했다. 혼자 눈치껏 배운 글자지만 세상을 한 자, 한 자 읽어내며 앎의 맛을 알았다. 그러다가 우리 마을에도 야학이 세워진 것이 겨우 반 년 전. 나는, 정말이지 죽어라 공부했다. 그 덕에 선생님들과도 가까워지고 이제는 보조 선생님 노릇까지 하게 되었지만 결국은 구구단 하나를 제대로 못 읊어 조롱받는 게 현실이라니.
-우울하다.
우울하다, 정말.
5.
꼭두새벽부터 기차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삼 주 전부터 미츠코시 백화점의 양요릿집에서 일하게 된 까닭이다. 빠듯한 생활에 보태기 위한 것도 있지만, 사실 속셈은 따로 있다.
-여주야, 너 학교 한 번 안 다녀볼래?
한 달 전이었다. 수업이 끝나고 주섬주섬 짐을 챙기던 석민 오빠가 말을 꺼냈다. 갑자기 웬 학교에요? 나의 반문에도 아랑곳 않고 그는 설명을 이어갔다.
-그러니까, 이화여자고보라고 선교사가 세운 여학교가 있거든. 네가 항상 공부하고 싶어 하는 거 우리도 다 아니까, 여기 교회 목사님께 한 번 말씀드렸는데 내년에 입학할 수 있도록 알아봐 주시겠대. 대신에 학비는 네가 마련해야 하는데, 당장 서울 시내 식당에서 일하면서 모아야 할 거야.
여주는 얼굴도 예쁘고 일본어도 어느 정도 할 수 있으니까 일자리는 수월케 구해질 걸- 석민 오빠의 말이 저 멀리서 전해오는 듯 아득했다. 학교. 학교? 내가, 학교에? 두 번 생각할 필요도 없다.
-할게요!! 저 학교 다니고 싶어요!
그렇게 일을 시작했다. 막 깨어나기 시작한 명동 한복판을 가로질러 백화점에 들어섰다. 양식 유니폼을 단정하게 차려 입고, 머리를 힘껏 틀어 올리면 오늘의 일과도 시작된다. 정갈하게 음식을 담은 쟁반을 들고 너른 홀을 누비길 벌써 몇 시간 째, 또 새로운 손님들이 테이블에 앉았다.
-미스김, 저쪽 주문부터 받고 와.
군말 없이 메뉴판을 받아들고 손님에게 다가갔다. 남자 하나와 여자 하나, 연인이라도 되는 모양이다.
-주문 도와드리겠습니다, 손님.
-아, 저는 이걸로 주세요.
일본어다. 그럼 남자도 일본인이려나?
-손님은 어떤 것으로 도와드릴,
-아, 또 만나네요. 구구단 연습은 많이 했어요?
-...?
-참고로 나는 조선 사람입니다. 저도 같은 걸로 하나 주세요.
어떻게, 이렇게 재수 없을 수가.
6.
우리들 사이서 통칭 ‘구구단 사건’도 벌써 3일 전이다. 한 번 더 그녀를 찾아가볼까 싶기도 했지만 귀찮아서 관뒀다. 찾아가면 또 뭘 하겠어, 게다가 이석민에게 관심 있는 척 했다가 야학에 코 꿰이기라도 하면 진짜 귀찮아진다-가 내 솔직한 속내였다. 해가 떴는데도 날은 쉬이 밝지 않았다. 어둑한 이불 속에서 뒤척이고 있으려니 어김없이 하인 하나가 방문을 두드린다.
-정한 도련님, 이제 준비하실 시간이에요.
-알겠어, 나갈게-
아버지는, 선택과 집중-그러니까 일본에 연줄을 잘 대서-으로 대번에 신흥 부자 대열에 올라선 사람이었다. 그 덕에 멋들어진 신식 주택도 올리고 게으른 차남의 방문을 두들겨 줄 하인까지 갖췄건만 아버지는 여전히 만족할 줄을 몰라서, 나는 일요일 아침 한정 게으름도 포기하고 ‘선’자리에 내몰린 것이다.
-정한아, 중요한 자리다. 실수하지 말고 제대로 처신해라.
-예, 아버지.
아버지가 끝 모를 욕심을 채울 날까지 나는 잘생긴 장기말로 얌전히 놀이판 위나 구를 테다. 아, 재미없다.
7.
주말의 명동은 미어터질 듯 혼잡했다. 약속 장소는 미츠코시 백화점의 양식당이라고 했다. 느긋하게 걸어가니 숱한 시선들이 달라붙는다. 하인들이 정성껏 다림질한 셔츠에 심혈을 기울여 고른 타이와 베스트, 꼭 맞춘 듯 어울리는 코트까지 어느 하나 최고급품이 아닌 것이 없으니 쳐다볼 만도 하다. 물론 그 중에서도 가장 잘난 것은 내 얼굴이지만. 없는 게 없는 인생, 그래서 내 인생은 더없이 재미없다.
백화점 로비에서 여자와 만났다. 나름대로 예쁘게 생겼다. 그래도 난 나보다 못생긴 여자는 취급 안하는데.
-정한 상, 사진보다 실제로 보니 훨씬 더 멋지세요,
-감사합니다. 아야코 상도 오늘 정말 아름다우시네요.
일본어로 마구 지껄이는 여자에게 마음에도 없는 칭찬이나 건네며 자리에 앉았다. 곧 여급 하나가 이쪽으로 걸어온다.
-주문 도와드리겠습니다, 손님.
어?
-아, 저는 이걸로 주세요.
너무 뻔한 이야기 아냐?
-손님은 어떤 것으로 도와드릴,
-아, 또 만나네요. 구구단 연습은 많이 했어요?
이러나저러나, 너랑 난 이대로 끝날 사이는 아닌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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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편으로 넘어가기 위해 이번은 루즈해진 감이 있습니다ㅠㅠ처음이라 넘나 미숙한 점 양해해주세요ㅠㅠ
더 쫄깃한 3화로 찾아오겠습니다..!
*참고
1)미쓰코시 백화점이 정식으로 백화점 명칭을 달고 개업한 것은 1929년이지만, 편의를 위해 백화점이라는 명칭을 사용했습니다.
2)마찬가지로 양식이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온 것도 1925년이나 이야기 상 편의를 위해 이미 서양 음식점이 들어온 것으로 가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