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이여주 여기 있다ㅋㅋㅋㅋ"
왁자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별안간 화장실 칸을 넘어 구정물이 쏟아져내렸다. 흰 교복 와이셔츠가 진회색으로 물들어갔다.
근데 이여주 교실 들어오면 우리한테만 피해 아니냐? 걸레냄새나서 어떡해~ㅋㅋㅋㅋ 아 뭘 새삼.. 쟤한테 원래 걸레냄새 났잖아, 엄마가 창년데. 따위의 얘기를 하면서 그 애들은 다시 화장실 밖으로 나가는 듯 했다.
나는 익숙하게 세면대에서 대충 구정물을 씻어내었다. 그리고 바로 교문으로 향했다. 가방따위 중요한 게 아니었다. 길거리에서, 한산한 버스 안에서 사람들의 의문 가득한 시선을 받아내며, 구정물 떨어지는 교복을 입고 꾸역꾸역 도착한 우리집.
넓디넓은 집 한켠에서 높은 교성이 들려왔다. 내 새엄마, 정확히 말하자면, 이민형의 엄마가 내지르는 교성. 그 여자를 품에 안고있는 사람은 필시 나의 아빠일 것이다.
여섯살 때. 그러니까 그 전의 기억은 단편적인 조각으로만 남아있을 만큼 어릴 적에, 나는 엄마와 살던 작은 반지하 단칸방에서 나와 이 대궐같은 집에 살게 되었다. 공간의 크기, 그리고 함께 사는 사람이 엄마에서 아빠로 바뀌었을 뿐, 사랑받지 못하고 방치되었다는 점에선 같았다.
내게 아빠란 주말에 가끔씩 젊고 예쁜 여자와 집에 나타나는 사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내 엄마도 그 젊고 예쁜 여자들 중에 한 사람이었다고 했다.
그런데 덜컥 내가 생겨버려서 엄마는 아빠로부터 매달 돈을 받기로 하고 나를 아빠에게 팔았다.
아빠는 젊은 자수성가형 사업가였다. 아빠는 인생을 즐기고 싶어하는 사람이었고 주변의 결혼 독촉을 굉장히 싫어했다. 그래서, 곁에 나를 두기로 한 것이다. 주변사람들의 시선이 어떻든, 애가 있으면 결혼 이야기 따위 꺼내기 쉽지 않을 테니까.
그러던 어느날 아빠가 결혼을 할 거라고 했다. 여자는 중견 의류업체의 사장이었다. 이번엔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며, 친엄마 생겼다 생각하고 잘 대하라는 말도 덧붙였다. 나랑 동갑인 아들도 있으니 잘 지내보라고 했다.
난 그때까지 맹세코, 그 아들이라는 것이 이민형이리라곤 상상조차 못했다.
내 첫사랑이자, 지금은 내가 제일 싫어하는 담배냄새를 풍기는 아이.
집을 합치던 날. 그러니까, 새엄마라는 사람과 이민형이 우리 집에 들어오던 날 밤, 이민형은 아무도 없는 거실 소파에서 대놓고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이민형."
"..."
"집에서 담배는 피우지 말아줄래?"
이민형은 피식 웃더니, 나를 빤히 쳐다보며 보란듯이 소파에 담배를 지져 껐다. 그리고는 내게 다가와, 내 얼굴에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매캐한 담배연기에 나는 쉴새없이 기침을 했다. 이민형은 내 한 쪽 어깨를 그러쥐고 귀에 속삭였다.
"뭐 이런 걸 가지고 벌써 힘들어해, 여주야."
그리고 그 다음날 내 책상에는 '창녀 딸 이여주'라는 글자가 유성매직으로 한가득 적혀 있었고, 교과서들은 무참히 찢겨 있었다. 입꼬리에 경련이 일었다. 대체 누가, 왜..? 나는 항상 반에서 조용히 지내왔다. 같은 반 남자애들이랑은 말조차 한 적이 없으며 친한 여자애는 나랑 비슷하게 조용한 아이 두어 명이 다였다.
아까 반에 들어설 때부터 나를 바라보는 반 아이들의 기류가 이상했다. 나랑 친했던 친구 둘도, 내가 바라보자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코끝이 찡해져 왔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만큼 찢긴 교과서를 쥐고, 정신없이 반 아이들을 둘러봤다. 누가, 왜, 누가, 왜...
그리고 내 시선의 끝에는
제 친구들에 둘러싸여 비스듬히 앉아있는 이민형이 있었다.
그 다음날부터 나는 급식 받고 가다가 다리걸려 넘어지기, 책상 서랍에서 죽은 쥐 시체 발견하기 등 갖은 수모를 겪었다. 이유도 모른채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 이제는 전교생이 날 기피한다. '2반에 걔, 이민형이 엄청 싫어한다더라' '걔네 반 노는애들이 이여주 책상에 죽은 쥐 넣어놨다더라'
구정물에 젖은 교복을 신경질적으로 한 쪽 구석에 밀어넣고, 내가 좋아하는 꽃향기가 가득한 바디워시로 몸을 몇 번이나 씻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아무리 씻어내어도 아까 내 몸에 가득했던 구정물의 냄새가 지워지지 않는 듯했다. 분명, 내 친엄마가 그런 일 하는 사람이었다는 걸 알 만한 사람은 이민형밖에 없었다. 이민형이 그런 것이다. 어디 나서기 싫어하는 걔가 직접 그런 짓을 했을 리 없고, 같이 노는 무리 애들에게 그런 소문을 흘렸을 게 분명하다.
아까 화장실 밖에서 나던 목소리도 우리 반에서 이민형 옆에 항상 붙어있던 여자애들의 것이었다. 치가 떨리게 싫었다.
3년 전 내게 수줍게 맞춰왔었던 이민형의 입술 사이에 물린 담배를 발견했던 그 순간보다도 더.
샤워를 마친 다음 대충 옷을 갖춰입고 나오는데, 욕실 문 앞에는 이민형이 쭈그려 앉아 있었다. 내가 나오자 이민형은 고개를 올려 웃어보였다. 내 가방을 손에 쥔 채였다. 이거, 두고갔어. 이민형의 얼굴을 보자마자 토악질이 올라올 것만 같았다.
얼굴에 붉은 빛이 돌고 술 냄새도 얼핏 풍기는 게, 친구들이랑 술을 마시고 온 모양이다. 가지가지한다, 진짜. 무시하고 그냥 내 방으로 올라가려는데, 이민형은 내 뒤를 따라오며 계속 말을 걸었다.
여주야, 왜 도망쳤어.
구정물이 그렇게 싫었어? 그건 하지 말라고 할까?
내 방 문 앞에 다다랐다. 더이상 꼴도 보기 싫어서 방문을 닫으려고 하는데 별안간 이민형이 내 손목을 붙잡았다. 나는 표정을 굳히고 이민형을 있는 힘껏 노려봤다. 놔. 이민형은 내 표정을 보더니 생각보다 쉽게 붙잡은 손을 풀어주었다.
그 대신 나를 끌어당겨 나를 제 품에 안았다. 술 냄새, 담배 냄새. 하여간 내가 싫어하는 냄새라고는 전부 이민형에게서 풍겨왔다. 분명히 몇 년 전 이민형의 품에서는 포근한 섬유유연제 향이 났던 것 같은데.
이민형은 한참동안 내 어깨에 고개를 묻고 가만히 서 있었다. 내 목덜미에 닿는 숨이 뜨거웠다. 몇 년 전에는, 이렇게까지 키차이가 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이민형은 지금 그때보다 훌쩍 커 있었다.
이민형은 한참을 내게 안겨있다가, 별안간 침대에 나를 눕혔다. 제 몸을 내 몸 위에 겹친 채였다.
".. 너 지금 뭐하는거야."
"...."
"뭐하는 거냐고.."
나와 몸을 겹친채 이민형은, 내 목덜미에 고개를 묻고 더운 숨만 내뱉었다. 내가 그 밑에서 벗어나려 바르작거리자, 이민형은 떨리는 손으로 아무렇게나 놓여있던 내 손을 잡아왔다. 그리고 말했다. ..미안해. 미안해, 여주야. 목에 뜨거운 것이 닿아 흘렀다. 이민형은 울고 있었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민형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3년 전에, 왜 갑자기 떠나버렸는지. 그 사이 어떤 일이 있었던건지, 다시 돌아와서 내게 왜 이러는건지.
다음날, 이민형은 어젯밤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듯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