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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막내동생 찬이가 소파에 드러누워 울고 있었다.
"누나, 나 누나랑 헤어지기 싫어……."
???
"아니 찬아 그게 웬 개소리야? 찬이 너 어디 유배 가니?"
"응…… 나 미국으로 유학 갈 거래. 그리고 누나도 집 말고 다른 데로 갈 거래."
그 말을 듣자마자 나봉은 당장 차를 불러서 아빠가 일하시는 본부로 직진해 계단으로 뛰어서 아빠가 계시는 사무실로 쳐들어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세상에 이찬이랑 나만큼 우애 좋은 남매도 따로 없는데 우릴 떨어뜨리려고 음해하다니.
그리고 그 음해하는 사람이 우리 아빠라니. 분명 아빠가 말실수하거나 장난친 걸 찬이가 잘못 들은 게 틀림 없음.
"아빠!"
사무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서자 의자에 앉아계신 아빠가 보였음.
나봉은 그대로 터벅터벅 걸어가 아빠의 책상 앞에서 발을 멈췄음.
"네가 올 줄 알고 있었단다."
아빠는 웃으며 날 반겼지만 나봉은 전혀 웃을 생각이 없었음. 장난이 아니라 진짜 진지한 상황이었음.
아빠의 얼굴을 보자 괜히 치밀어 오르는 분노와 배신감에 잠시 말을 않고 심호흡을 하고 있자, 아빠가 먼저 말을 꺼냈음.
"찬이랑 헤어지게 된 건 유감이지만, 한동안 각자 집에서 나가 지내는 게 너네들에게는 좋겠구나."
"왜죠?"
"너도 알다시피 몇 주 전에 영준파랑 시비가 붙어서 우리가 그쪽을 쳤었어. 그때 일로 그쪽에서는 몇 명 죽었었지."
"제가 묻잖아요. 찬이랑 저랑 왜 떨어지냐고요."
"아무래도 그 몇 명중에 주요 인물이 있었던 모양이야. 그래서 며칠 전 팩스로 영준파에게 협박을 받았다. 너네 둘을 인질로 잡아 똑같이 죽여버리겠다고."
"……."
아빠의 말에 수긍할 수 밖에 없었다.
아빠가 이렇게 어두운 세계에서 일하시는 이상, 그의 자녀로 태어난 찬이와 나는 이런 상황에 어쩔 수 없이 당도하게 된 것이니까.
어떻게 보면 아빠의 말을 잘 듣는 것이 우리가 처한 환경에서 가장 안전한 방법일 테니까.
분노로 일그러졌던 내 표정이 금세 근심 어린 낯빛으로 바뀌어 버리자 아빠는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다.
"걱정하지 마렴. 너를 위해 최선의 방책을 준비해뒀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 최선의 방책은 경호원 세 명과 함께 촌자락에 있는 남고에 남장시켜서 보내는 거였다.
개빡친다.
저는 남고생이고요, 제가 하고 있는 건 개고생입니다
W. 봄꽃이 피면
부제: 시작이 반이라던데 저는 이미 절반을 말아먹었군요
"거울은 그만 집어넣고 이제 학교 가야지."
"나 진짜 괜찮아? 진짜로? 진짜 여자인 거 안 들킬 것 같아?"
"응. 완벽해요, 우리 동생."
거울만 적어도 3천 번은 봤을 것이다. 머리는 어디 부자연스러운 데는 없는지, 어깨뽕은 멀쩡한 지, 눈썹은 지워지지 않은 건지.
혹시라도 여자인 게 들통나면 어쩌지 하는 걱정에 사로잡혀 전날 밤 잠을 못 이룬 탓에 내려온 다크서클은 심각한 지까지.
승철 오빠가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괜찮다고 해 주니 마음이 조금 가벼워지는가 싶기도 했다가, 김민규의 심각한 표정에 나도 모르게 다시 긴장이 되었음.
"존나 심각한데."
"뭐가?"
"너 여자인 거 까먹을 뻔했어."
"아, 뭐야. 괜히 긴장했네."
"내 추측인데, 아마 신이 널 만드실 때 불알을 넣는 걸 깜빡…"
이 새끼 말이 좀 심하다.
"…김민규 넌 이따 봐."
"앗, 무서워라."
김민규는 내 뭣도 안 되는 협박에 약올리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내 손에 있던 거울을 가방에 넣어줌. 지랄.
신이 난 듯 들썩이는 김민규의 눈썹을 보며 나는 오늘도 여느 때처럼 굳게 다짐함.
언젠가는 저 새끼를 조져서 매운탕으로 끓여 먹으리.
"너네는 무슨 아침부터 싸우고 그러냐. 원우 기다리겠다. 빨리 들어가."
"아, 맞다. 원우 오빠 먼저 갔었지."
"오빠가 아니지."
"아… 자꾸 까먹네. 전원우가, 원우는 먼저 갔었지. 그럼 갈게."
빨리 들어가라는 승철 오빠의 재촉에 땀난 손으로 가방끈을 쥐여 매고 나봉은 민규와 함께 천천히 교문 앞으로 갔음.
교문 앞에서는 서너 명의 선도부가 학생들의 교복 상태를 확인하고 있었음. 나한테 시선을 줄 사람은 그게 다인듯. ㅇㅇ
괜시리 더 밀려오는 긴장감을 완화하려고 심호흡을 하고는 앞서 가는 김민규의 뒤를 따라 앞으로 한 발자국씩 내딛으며 어제 연습했던 걸 생각했음.
어제 승철 오빠가 말해줬던 대로, 긴장하지 말고 차분히, 자연스럽게, 어깨를 피고 당당히. 그리고 속으로 자기 최면을 시작함.
나는 남자다. 나는 남자다. 나는 남자다. 나는 남ㅈ…
"야, 거기."
뒤통수에 날아오는 선도부의 목소리에 나봉은 김민규도 못 듣고 선도부도 못 듣고 오로지 혼자만 들을 수 있을 작은 목소리로 욕을 읊조렸음. 시발시발시발.
분명이 이쪽이었음. 절대 오른쪽이나 왼쪽으로 치우침 없이 내 뒤통수에 대놓고 야 거기라고 부른 거임.
내가 선배인지 후배인지 어떻게 알고 야라고 부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나봉이 핵쫄았다는 사실만은 명백함.
이미 무너져버린 심장은 잔뜩 달음질 치고 나대면서 나를 최고조로 긴장하게 만들었음.
제발 '거기'라는 호칭이 절대 나를 가리킨 것이 아니기를 간절히 바라…
"거기, 빨간색 조던 넘버스 신은 애. 이리로 오라고."
…바랬는데 내가 맞는가 보다.
이 주변에서 조던 넘버스 신은 사람은 나 한 명밖에 없을 뿐더러, 빨간 운동화 신은 사람도 나 한 명밖에 없음.
이건 분명히 나를 불러세운 거임.
그래도 나봉 잃어버린 이성에 비해 매우 무덤하게 뒤를 돌아서 나를 부른 선도부에게 다가감.
사실 나봉 키 168인데 그 선도부는 나보다 조금 더 키가 작았었음. 이런 말 미안하지만 중딩 같았음.
하지만 중딩이고 뭐고 자시고 나봉은 매우 쫄아있었기 때문에 쭈구리처럼 선도부에게 말을 걸었음.
"그… 저는 왜 부르셨어요?"
"두발 불량. 머리 보라색이잖아."
아.
아아아아아아.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그제서야 나봉은 원효대사 해골물이라도 마신마냥 깨달음을 얻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음.
전에 나봉이 다니던 학교에서는 두발이 자유여서 마음껏 탈색과 염색을 시도하고 다녔었는데 이 학교는 두발에 제한이 있었던 거임.
그리고 그걸 바보같이 조사도 안 해보고 전학을 온 거임.
"됐고, 학년 반 번호 이름 불러."
"아… 전학생이라서 아직 반 번호 모르는데……."
"아, 전학생."
"네……."
"그럼 가 봐."
이대로 그냥 보내주는 건가 싶어 살짝 안심하는 마음으로 뒤를 돌아 다시 갈 길을 가려하니 그 선도부가 뒤에서 하는 소리가,
"발랑 까져가지고는."
?
불의를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는 나봉은 그 자리에서 헥토파스칼킥을 갈겨버림.
"아니, 이세봉 저 미친… 뭐하는 짓이야."
((((경호원 김민규 의문의 1패))))
내 발차기에 그 선도부 새끼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고, 나봉은 그 새끼를 내려다 보면서 면상에 대놓고 소리를 지름.
"야 이 나쁜 쉐끼야!!!!!!!!! 니가 뭔데!!!!!!!!! 우리 아빠 자식한테 까졌네 마네 고나리질이야!!!!!!!!!!!!!! 전학생이면 두발 제한 있는지 모를 수도 있지!!!!!!!!!!!!"
"……."
"사람이 멋 좀 부리고 다닐 수 있지!!!!!!!! 왜 발랑 까진 건데!!!!!!!!!! 내가 술을 하냐!!!!!!!!! 담배를 피다 걸렸냐!!!!!!!!!"
"……."
"억울해서 세상 못 살겠!!!!!!!!"
"야, 이세봉."
"야, 저 땅딸막한 새끼가 나한테 뭐라했는지 못 들었……!!"
"니 혈기 때문에 내가 경위서를 써야겠냐고."
"…알겠어."
김민규의 압박에 기세가 눌린 나봉이 쭈구리가 되자 김민규는 나를 거의 끌고 가다시피 하며 자리를 뜸.
저 새끼랑 다시는 마주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미친 새끼."
***
나는 불타오르는 분노를 겨우 삭혀내고 김민규와 함께 교무실로 가서 선생님과 전입 신고를 함.
근데 갑자기 나 여기 너무 좋아짐. 우리 담임선생님 핵존잘.
"민규랑 세봉이… 원우랑 사촌지간이랬지?"
"네."
"우리 반이 생각보다 인원이 많이 부족해서 연속해서 세 명이나 전학생을 받게 되네. 셋이서 같이 적응하면 되겠다."
"하하… 네, 그러면 될 것 같네요."
"그래, 반 애들이랑도 친하게 지내고. 근데 세봉이는 남자치고 이름이 예쁘네?"
…존나 뜨끔하네.
선생님께서 혹시라도 의심하실까봐 나봉은 잔뜩 한숨을 쉬며 하소연함.
"사실은 저희 부모님이 딸을 너무 바라셔서 이름을 미리 세봉이라고 지어두셨는데… 하필 남자로 태어나 버렸네요."
"항상 이름이 여자같다고 놀림받아서 이름이 컴플렉스에요……."
"저도 민규나 원우처럼 남성적인 이름을 원했는데……."
물론 구라다.
"그랬구나. 컴플렉스였다면 미안해."
아닙니다 선생님처럼 홀리하고 잘생기신 분이 한낯 미물인 제게 뭐가 미안할 것이 있다고
시발 너무 잘생겼잖아 시발 미모로 세상에 공헌을 하고 있는 대단한 분께 제가 감히 거짓말을 치다니 당장 오라를 내려주세요
"그럼 먼저 반에 들어가 있으렴. 선생님은 업무 처리할게 좀 있어서."
"네ㅎㅎㅎㅎ"
선생님이 나가시라면! 나가야죠! ^^
선생님의 말씀에 따라 김민규를 끌고교무실에서 나갔는데 김민규의 표정이 미묘하다.
비웃는 것 같으면서도 그냥 혼자서 실실 쪼개는 듯 하기도 하고, 쪼개는 것 같기도 하면서 비웃는 듯 한 알 수 없는 표정.
"야, 무슨 일 있어?"
"으응? 아닌데?"
"너 진짜 거짓말 못한다. 표정에 뭔 일 있다고 써져 있거든?"
"없다니까."
분명 숨기는 무언가가 있다.
호기심의 끝판왕인 나봉은 김민규가 제 입으로 대답할 때까지 절대 놔줄 생각이 없었음.
"민규야, 응? 뭔데?"
"아무 것도 아니라니까."
"아, 빨리 대답해줘."
"별 거 없는데."
"별 거 아니니까 알려줘도 되겠네. 그래서 뭔데?"
"아, 거 참……."
나봉이 집요하게 묻고, 또 묻자 내 질문에 신물이 났는지 김민규는 반 뒷문에서 피식 웃으며 대답해 줌.
넌 근성으로는 절대 날 이기지 못한단다 민규야 ㅎㅅㅎ
"그냥, 선생님이 잘생겨서."
…김민규 게이였어?
***
"이번 판에서 가장 먼저 파산하는 사람이 벌칙 수행하는 걸로, 콜?"
"콜."
"개콜."
사실은 어제 원우 오빠와 민규와 함께 부루마블을 하다가 어쩌다 보니 내기를 하게 되었음.
한참 게임이 팽팽하게 진행될 때, 원우 오빠가 내기 걸고 하면 더 재밌지 않겠냐는 의견을 내놓았고, 순진한 십팔세 남녀 둘은 그걸 또 좋다고 받아들임.
이 내기를 내건 사람이 전략 게임이라면 온오프 가리지 않고 천재적으로 잘하는 전원우였음을 망각하고...^^
!!!!!!!!!!!!!!!!!!!!
"뉴욕 호텔에서 숙박하시려면 서울 파셔야겠네요, 아가씨."
"아 잠시만요 원우 오빠… 한 번만 봐주라고…!"
"승부의 세계에서 봐주고 말고 할게 어디 있어. 서울 넘겨."
"염병……."
그렇게 나봉은 전원우의 전략에 휘말려서 서울을 잃고 가장 먼저 파산하게 되고, 두 광견들은 아주 좋다고 박수 갈채를 해댐. ^^
원우 오빠의 꾐에 넘어가 억울하든 말든 나봉은 꼴찌를 한 것이 맍고, 1등을 한 전원우가 내세운 벌칙을 수행하게 되었으니 그 벌칙은 바로…
"애들아, 서울에서 전학 온 친구가 있어~ 둘 다 원우 사촌이래. 그럼 세봉이부터 자기소개 해 볼래?"
"……."
"세봉아?"
"여기 일짱이 누구냐?"
"……."
"……."
"……."
"……."
"……."
"……."
…망했군.
봄꽃이 피면 |
김민규 게이 아닙니다. |
내 봄꽃들 |
[AAA] [A인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