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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스] 에피소드 스릴러 <세피아의 지하철> 2~4 | 인스티즈

 

 

 

 

Episode thriller

세피아의 지하철

 

 

 

 

2

3

4

 

 

 


2

당황한 너의 시선을 읽었는지 남자가 조금 두루뭉실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어.

왜 그래?

남자가 내뱉은 건 단 세 글자 뿐이었는데도 넌 알 수 없는 감정에 허덕이느라 정신을 잡기가 힘들었어.

너는 남자를 모르는데, 남자는 마치 너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한 친근한 태도였지. 너는 그것에서 좀처럼 견디기 어려운 이질감을 느꼈어.

속이 울렁거렸어. 너는 모르는 누군가가 너를 알고 있다는 사실이.

 

 

가로등의 불빛이 은은하게 깜빡거리다 이내 잠들었어.

이젠 정말로, 남자와 너. 단 둘 뿐이었고 매서운 겨울 바람이 적막한 너와 남자의 사이를 스치며 지나갔지.

문득 무릎이 조금 아프다고 생각했던 것도 같아.

정신을 차려보니 남자는 걱정스런 얼굴로 너를 바라보고 있었고 넌 다리에 힘이 풀린 채로 바닥에 엎어져 있었어.

성음아. 하고 남자는 다시 한 번 네 이름을 불렀어.

살갗이 쓸리면서 찢어졌는지 다리를 움직일 수 없었어.

그런 너를 걱정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던 남자는 이윽고 업히라며 등을 돌리곤 무릎을 굽혔어.

 

 

뭔지는 확실케 알 수 없었지만. 무언가가 이상한 것만은 확실한 상황에서 너는 약하게 입술을 깨물었어.

남자는 겉보기엔 너무나도 부드러운 외양을 가지고 있었지만 반대로 그만큼 부자연스러웠거든.

마치 인간이 아닌 것처럼 창백한 피부에 묘한 분위기를 내뿜고 있었지.

너는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하고서 멀거니 남자의 뒷모습을 올려다 봤어. 얼어있는 땅바닥과 닿은 다리가 점점 차가워지고 있었어.

가로등의 불빛이 사라져 자세히 보이진 않았지만, 남자의 등판은 넓었어.

고민하던 너는 남자의 허리로 손을 뻗었고 그 손바닥을 따뜻하게 움켜쥔 남자가 가뿐하게 널 들어 올렸어.

넌 거의 남자에게 대롱거리는 것처럼 안겨 있었지.

 

 

남자는 널 업은 채로 천천히 앞을 향해 걸어 나갔어.

찢어진 스타킹 사이로 추운 바람이 들어왔어. 너는 인상을 찌푸렸고, 남자의 목 부근에 걸쳐둔 팔목에 좀 더 힘을 주었어.

그 움직임에 남자가 바람이 빠진 듯한 목소리로 물었어.

너 나 진짜로 기억 안 나?

 

 

 

 

  "장난치는 거지? 네가 날 기억 못할 리가 없는데."

  "네?"

  "나 이홍빈이잖아."

  "."

  "근데 너 되게 무겁다."

 

 

 

 

아무 반응 없는 너의 얼굴을 슬쩍 한 번 쳐다보고, 남자, 그러니까 이홍빈은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어.

이홍빈? 일단 입 안에서 발음을 굴려보니 크게 낯선 이름은 아니었어.

넌 최대한 정신을 집중시키면서 이홍빈을 떠올리느라 안달이었어. 기억이 날 것도 같은데.

 

 

잘 알지도 못하는 남자에게 업히는 기분은 그다지 좋지 않았어. 외투를 걸치고 있는 이홍빈은 그렇다 쳐도, 넌 겉에 걸치고 있는 거라곤 교복 자켓이 다였거든.

천과 천을 맞댄 살결 사이로 약간의 정전기가 일어났어.

잠시 막힌 숨을 들이키는 너를 확인하곤 이홍빈이 괜찮으냐고 물었어. 너는 대충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금 생각에 잠겼지.

중학교는 여자 중학교를 나왔으니 패스. 작년에 이홍빈을 만난 적 역시 없으니 고등학교도 패스.

실마리를 찾기 위해 남은 건 초등학교와 유치원 뿐이었지만 스물을 향해 달려가는 청춘에게 유년기를 떠올리기란 굉장히 버거운 일이었어.

너는 천천히 기억을 되새김질하기 시작했자,

일 학년. 이 학년. 사 학년. 오 학년.

아, 생각났어!

 

 

 

 

  "너 초등학교 때 맨날 딱지 가져와서 놀던 애, 그 이홍빈 맞지? 오 학년 때 육 반이었고."

  "되게 섭섭하다. 난 너 모자마자 바로 알아보고 도와주고 있는 건데."

 

 

 

 

그 말에 넌 정신을 차렸어.

 

 

 

 

  "근데 우리 지금 어디 가?

  "버스 놓친 거 아냐?"

 

 

 

 

역까지 데려다 줄게. 그렇게 말한 이홍빈이 언뜻 시리게 웃었어.

 

 

 

 

  "나 지금 시장에 전화 빌리러 가는 길이었는데? 그리고 역까지 가야 되는 건 어떻게 알았어?"

  "요즘 같은 세상에 전화를 빌려주는 데가 어디 있어."

  "그런가. 무튼. 그럼 너 나 계속 따라왔던 게 그것 때문이야?"

  "응. 데려다 주려고. 위험하잖아."

  "말을 하면 되지. 왜 뒤에서 따라오고 있어? 나쁜 사람인 줄 알고 완전 놀랐잖아."

  "나쁜 사람?"

  "응."

  "난 나름 서프라이즈였지. 놀래켜 주려고 했던 건 맞는데 넘어질 줄이야."

 

 

 

 

너는 가볍게 웃음을 터뜨리는 이홍빈의 등을 아프지 않게 꼬집었어.

어. 그러고 보니까.

너가 이렇게까지 남자에게 스스럼이 없던 사람이었나.

 

 

이내 너는 복잡한 생각들은 집어치우고 아까처럼 초등학교 시절의 기억을 떠올려 보기로 했어. 솟아나는 향수의 기억은, 희미했어.

이홍빈은 반 아이들 중에서도 체구가 작은 학생이었던 걸로 기억해.

별명이 죄다 말라깽이, 홍삼, 텐텐. 뭐, 이런 것들이었으니까.

나 기억력 되게 좋다. 너는 새삼 감탄하면서 마지막으로 그 시절의 이홍빈을 어렴풋이 떠올렸어.

잘 웃지만 그만큼 잘 울던 애. 너에게 이홍빈은 그런 존재로 기억되고 있었어.

절친한 사이도 아니었던 것 같은ㅇ데 술술 뻗어나오는 회상의 파편에 넌 잠시 손톱을 깨물었어. 이렇게 잘 기억하고 있었으면서.

아까는 왜 몰라봤을까. 넌 생각했어.

 

 

어두워서 그런 거겠지? 가로등이 있었어도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으니까.

아니. 그것보다도 허약했던 체구가 이렇게 불어날 거라고는 넌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어.

내가 너를 알아보지 못한 건 아마도 그것 때문일 거야. 너는 그렇게 애써 합리화를 했어.

이홍빈과 너는. 실없는 농담과 안부를 주고 받으며 걸어가고 있었어.

 

 

 

 

  "전학을 왔다고? 저번 주에?"

  "응. 새로 이사를 하는 바람에. 같은 학굔지는 몰랐어. 아까 친구가 알려줘서 알았거든."

  "근데 너 키 되게 많이 컸다. 얼굴도 엄청 많이 변하고."

  "그래."

  "너 나랑 같은 반 되고 그 다음 해에 전학갔었지?"

  "글쎄."

  "그랬던 것 같은데?"

 

 

 

 

마지막 너의 말에 이홍빈은 대답하지 않았어.

그나저나 남자는 원래 이렇게 다들 힘이 센 걸까.

이홍빈은 오른손으로는 너의 무게를 안아 지탱하고 있었고 반대 손으로는 낡은 자전거의 손잡이를 쥐고 앞으로 끌어 나가고 있었어.

자전거에 날 태우면 될 걸. 그렇게 문득 생각하고 있다가 너는 잠시 입을 다물었어.

아까보다 빠르게 돌진하고 있는 자전거.

그런데 끽끽거리는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어.

아까 그 소음의 정체는. 정말로 이홍빈이 말한 것처럼 단지 녹이 슬어 뻑뻑해진 자전거의 체인이었던 걸까?

어느새 이홍빈과 너의 눈 앞에 역의 입구와 함께 지하철로 이어지는 계단이 보이기 시작했어.

그리고 어디선가. 폭죽이 터지는 것처럼 부산스러운 굉음이 들려왔어.

 

 

 


3

너는 두 팔로 이홍빈의 목을 세게 껴아으며 말했어. 이제 내려 줘, 걸어 갈게.

굉음이 들린 것도 아마 그 쯤이었을 거야. 이홍빈이 널 바닥에 내려놓음과 동시에 고막을 찢어버릴 것만 같은 저돌적인 기세로 무시무시한 굉음이 들려왔어.

너는 당혹감에 차가워진 이홍빈의 손을 맞잡았어.

 

 

 

 

  "이 소리 뭐야? 어디서 들려오는 거야?"

  "별 것 아냐. 가자. 지하철 놓쳐."

 

 

 

 

아까와는 다르게 묘하게 굳어버린 음성과 딱딱한 표정이 너의 시야로 들어왔어. 이홍빈은 잡고 있는 너의 손을 푸르고 깍지를 끼면서 너를 이끌었어.

그러나 너는 순순히 이홍빈을 따라 움직이지 않았어. 뭔가, 되게, 불길했거든.

이홍빈은 그런 너를 잠시 무표정하게 바라보다가 이내 다시 깍지를 낀 손에 힘을 주었어.

생각보다 강한 완력에 너는 별 다른 저항 한 번 못해보고 끌려 갈 수밖에 없었지.

다행으로 치부해도 되는 걸까. 그 이후로 굉음은 터져 나오지 않았어.

 

 

역의 입구가 나타났고 너는 깍지를 손을 풀었어.

이홍빈은 검푸르게 낡아 빠진 자전거를 역 입구 근처에 세워두곤 앞장을 섰어. 바쁘게 계단을 내려가는 뒷모습이 보였지.

길게 잘 빠진 다리를 이용해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가는 이홍빈과는 다르게 너는 짧은 보폭 탓에 금세 그 뒷모습과 멀어지고 말았어.

다행히도 그런 너를 알아차린 이홍빈이 계단 중간 지점에서 걸음을 멈추고 너를 기다려 줬어.

너는 너를 기다리는 이홍빈의 시간이 의미 없이 지나가지 않도록 좀 더 빠르게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어.

그리고 삐끗. 발목이 엇갈렸어.

다행히도 이홍빈이 너의 몸을 빠르게 낚아채어 잡아준 덕분에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심장이 놀라서 너는 한동안 움직일 수 없었어.

오늘만 몇 번짼지. 너는 황급히 이홍빈과 몸을 떼어내고선 창피함에 조용히 중얼거렸어.

 

 

 

 

  "그 때나 지금이나 엄청 덜렁대네. 애도 아니고."

  "어?"

  "아냐. 가자."

 

 

 

 

이홍빈이. 부드럽게 웃었어.

다시 한 번 계단을 내려가 플랫폼 앞으로 들어선 너와 이홍빈은 자판기에서 음료수 하나를 뽑아 사이 좋게 나눠 마셨어. 물론 돈은 이홍빈이 냈어.

너는 돈이 없었으니까.

넌 방금 전 너의 집 근처 역으로 향하는 일회용 교통카드를 멍하게 쳐다보면서 생각했어. 집에 가서 아버지를 빨리 보고 싶어.

 

 

너는 잠시 주변을 둘러봤어. 근데 이상하게, 주위에 사람이 하나도 없었어.

원래라면. 야근을 한 아저씨들과 새벽을 즐기는 젊은이들의 무리가 있었어야 했는데.

전에도 이런 경험이 몇 번 있었기 때문에 넌 그 무렵의 상황을 아득하게 떠올렸어.

분명 이렇게 조용하고 한산한 것 같지는 않았는데. 의자에 앉아 지하철을 기다리는 건 너와 이홍빈 뿐이었어.

 

 

맞다. 하며 너는 얘기를 꺼냈어.

 

 

 

 

  "나 지금 핸드폰 밧데리가 나가서. 핸드폰 좀 잠깐 빌려 줄 수 있어? 아빠한테 전화해야 할 것 같아."

  "그래."

 

 

 

 

겉옷 주머니를 잠시 뒤적거리는가 싶더니, 이홍빈은 시원스런 액정을 자랑하는 핸드폰을 너에게 내밀었어.

이홍빈은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자리를 떴고 너는 빨리 갔다오라며 고개를 끄덕였어.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잠금을 풀었는데 패턴이 걸려 있었어.

뭐지. 인상을 찌푸리면서 이것 저것 패턴을 그려보는데, 좀처럼 풀리지 않아.

하는 수 없었어. 너는 이홍빈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지.

 

 

그렇게 몇 분을 기다렸어. 한 대의 지하철이 지나갔고, 넌 다시 혼자 남았어.

두어 번 전화가 걸려오는 것 같기도 했는데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넌 받지 않았어.

그러다가 다시 한 번 이홍빈의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렸어. 이번엔 좀 더 끈질겼지.

아무래도 중요한 전화인 걸까. 생각하며 너는 수신 버튼을 눌렀어.

전화를 받은 넌 액정에 떠올랐던 저장되어 있지 않은 열 하나의 번호를 빠르게 잊었어.

 

 

 

 

  "뭐? 들릴 데가 있다고? 지금 이 시간에?"

 

 

 

 

반대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이홍빈이었어. 이홍빈은 들릴 데가 있다며 먼저 지하철을 타라고 했지.

다음 행 지하철을 타 금방 따라갈 테니, 도착하면 바로 출구로 나가지 말고 기다리라는 말까지 남겼어.

너는 전화를 끊고 잠시 불퉁하게 입술을 내밀었어. 혼자는 무서운데.

 

 

곧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지하철이 달려왔어. 너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고 차분하게 열리는 플랫폼 속으로 걸어갔지.

지하철 안은 한산했어. 알 수 없는 적막감이 흘렀고, 넌 괜히 마음이 불안해서 대학생으로 보이는 남자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어.

서울에 위치한 유명한 대학교의 야구잠바를 걸친 대학생은 흘긋거리는 시선으로 너를 쳐다봤어.

 

 

 

 

  "저, 오늘따라 지하철에 사람이 없네요. 대학생이세요?"

  "응."

  "와. 공부 되게 잘하시나 봐. 여기 들어가려면 수능에서 막, 한 개 틀리고 그래야 되는 거 아니에요?"

  "에이. 그 정도는 아니었어."

 

 

 

 

나 때는. 덧붙이면서 대학생은 새파랗게 웃었어.

대학생은 다정하고 친절했어. 무엇보다 목소리에 활기가 돌았고 표정도 다양했어.

넌 점점 대학생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는 중이었지.

이름이 학연이라던 대학생은 야구잠바 밑엔 검은색 바지를 입고 있었어. 누가 보아도 평범한 차림새였지.

한참 얘기를 나누다가 너는 좀처럼 운행하지 않는 지하철에 의아함을 품으며 차학연에게 물었어. 이거 운행 안 해요?

 

 

 

 

  "전 사당까지 가는데. 오빠는 어디로 가세요? 환승하시려면 피곤하겠다. 늦었는데."

  "응? 여긴 그런 거 없는데?"

  "네? 뭐가 없어요?"

  "잘 왔다는 소리야. 미친 년아."

 

 

 

 

차학연이 해맑게 킬킬거리며 말했어.

그리고 넌. 차마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어.

 

 

곧 열차가 출발하오니, 승객 여러분 께서는 안전을 위해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주시기 바랍니다.

지하철이. 움직이기 시작했어.

 

 

 


4

넌 머릿속의 사고회로가 정지된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어.

여전히 다정하게 웃으면서 너를 바라보고 있던 차학연의 얼굴이 조금씩 굳어갔고, 그걸 쳐다보고 있는 너의 표정 또한 느리게 굳어갔어.

 

 

 

 

  "여긴 어떻게 들어왔어?"

  "네, 네?"

  "뭐. 상관 없어. 죽든 말든 그건 내 알 바 아니니까. 근데 이거 평생 안 멈춰. 알고는 들어온 거야?"

  "."

  "몰랐겠지. 진짜 병신 같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어. 그저 넌.

홍빈이. 이홍빈이 생각났어.

이홍빈은 이걸 알고 있었던 걸까?

 

 

거짓말 말라며 차학연을 다그쳤던 너의 말이 무색하게 지하철은 정말로 수 많은 역 구간들을 건너 뛰며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고 있었어.

어디로 가는지는. 그 누구도 몰랐어.

더불어 언제 멈추어지는지도.

지하철 안에 차분히 가라앉은 공포스런 적막감이 흘렀어.

지하철의 유리창을 두드리던 너는 곧 소용이 없단 것을 깨닫고는 손을 주머니에 꽂아 넣었어.

점점 빠르게 질주하기 시작한 지하철 때문에 밖에 있는 풍경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게 된 거야.

 

 

너는 이홍빈의 핸드폰을 움켜 잡았어. 여전히 패턴을 알 길은 없었어.

긴급통화 버튼이라도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이홍빈은 그 기능을 설정하지 않은 모양이야. 패턴이 떠오르는 액정엔 자정이 넘은 시각을 무덤덤하게 일러주고 있었어.

너를 기다리고 계실 아버지 생각이 났어. 그러자 바보처럼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기 시작했어.

거짓말 같은 상황. 저질스런 B급 영화에나 나오는 판타지스런 일이 지금 너한테 일어난 거야.

차라리 장난이었으면 좋겠다고. 너는 생각했어.

 

 

차학연은 반대편에 앉아 있었어. 여덟 좌석이나 되는 긴 좌석 가운데에 홀로 앉아있는 그의 모습은 퍽 처량해 보였어.

따스한 웃음과는 다르게 거칠던 말투가 다시금 생각나면서 너는 질끈 두 눈을 감았어.

잘 왔다고. 차학연은 그랬어.

눈 앞에 암전이 찾아왔어. 깜깜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넌 느리게 손가락을 움직였어.

그저 방전된 휴대폰과 돈이 없었음에 버스를 놓쳤고 이홍빈을 만났어. 그리고 단지 집으로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탄 것 뿐이었는데.

뭐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끝도 없이 펼쳐지는 망상과 걱정의 꼬리를 잘라 버린 건 덜컹거리며 열린 지하철의 통로였어.

지하철과 지하철을 이어주는 그 구간엔 놀랍게도 사람이 하나 서 있었어.

남자는 조금 숨이 찬지 가파르게 호흡을 헐떡였어.

이윽고 동그랗게 눈을 뜨고 있는 너를 발견한 남자는, 빠르게 너에게로 달려오며 악력 있는 발음으로 무언가를 소리치기 시작했어.

날렵하게 갈린 칼과 혈흔이 묻은 셔츠를 입고 있는 남자. 그런 남자가 미친듯이 너에게로 뛰어오고 있었어.

넌 기겁을 하며 남자를 피했지만 남자는 너를 와락 품에 안으며 알 수 없는 말들을 중얼거리기 시작했어.

 

 

 

 

  "너 내 말 잘 들어. 이 분 있다가 지하철이 십 초 동안 멈춰.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 기회는 그 때가 전부야."

  "."

  "정신 놓고 있지 마! 저 새끼가 여기에 환각제를 풀었어. 이렇게 정신 놓고 있다가는 정말로 죽어."

 

 

 

 

남자가 '저 새끼'로 지칭한 건 아마 차학연인 것 같았어. 차학연은 남자의 말에 미동도 하지 않으며 그저 우리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어.

그 시선에 너는 작게 몸을 떨었어. 머리부터 발 끝까지 먹잇감을 노리고 있는 듯한 사자의 맹렬함 같은 그 끈질기고 지독한 시선은 살기가 묻어 있었어.

남자에게선 피 비린내가 났어. 그에 너는 작게 미간을 좁혔고 주머니 속으로 이홍빈의 휴대폰을 집어 넣었어.

정신 없는 상황 속에서도 너는 여전히 이홍빈 생각 뿐이었지. 내가 이 곳에서 미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동안 너는 대체 뭘하고 있을까.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어. 멍하게 있지만 말고 생각을 해. 가족이든. 친구들이든. 아무래도 다 좋아. 정신만 차리고 있어."

  "."

  "그 때동안 난 비상용 망치로 유리창을 깨부술 거야. 이 분이 넘어가면 유리창이 깨져도 아무런 소용이 없어."

  "."

  "그러니까 내 말은 이 분 안에. 우리는 여기서 나가야 돼."

 

 

 

 

뜨겁게 일렁이고 있는 남자의 눈동자가 보였어. 그제서야 퍼뜩 정신을 차린 넌 남자에게 작게 고개를 끄덕이곤 눈을 감았지.

뭘 생각해야 할까.

수진이? 꿈? 공부? 아버지? 이홍빈?

눈을 감고 있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곧 무언가가 찌그러지는 소리가 들렸어. 남자가 정말로 유리창을 부수기 시작한 걸까.

 

 

곧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어. 넌 천천히 눈을 떴어.

그리고 눈 앞에 펼쳐진 상황에 넌 덜덜 몸을 떨었어.

남자가 쥐고 있던 칼이 차학연의 손에 있었어.

안 돼! 넌 빠르게 외쳤지만 아무것도 모르고 부수어진 유리창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남자는 바닥으로 고꾸라졌어.

차학연이. 남자의 배를 찔렀어.

검붉은 피가 지하철 바닥을 적시기 시작했어. 느리고, 완벽하게 젖어 들어가기 시작한 바닥은 얼마 지나지 않아 새빨갛게 변해버렸어.

남자가 말했던 십 초가 다가오고 있는 걸까. 질주하던 지하철의 속도가 점차 무디게 느려졌어.

억눌린 신음을 흘리는 남자를 즐겁게 바라보던 차학연이 문득 고개를 들어 너를 응시했어.

 

 

너는 굳어버린 몸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

차학연이 피가 흥건히 묻은 칼을 네 쪽으로 던졌어. 차학연의 표정은 시시각각 변하며 너를 조롱하고 있었어.

이제 완전히 지하철이 멈췄어. 숨이 막혀버릴 듯한 정적에 너는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어.

만일 남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 나가지 않으면 남자와 너, 그리고 차학연은 모두 죽어.

 

 

십 초.

바닥에 쓰러져 있던 남자가 배를 움켜 잡으며 천천히 일어섰어. 그리고 여전히 너를 주시하고 있는 차학연의 등을 발로 가격했어.

구 초. 팔 초.

남자가 피 묻은 손으로 너의 손바닥을 잡아 너를 일으켜 세웠어.

칠 초. 달려갔어.

육 초. 부수어진 유리창 사이로 남자가 너를 떠밀었어.

오 초. 차학연이 남자를 노려보며 일어났어.

사 초. 남자가 유리창 사이로 다리를 넣었어.

삼 초. 지하철이 다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고, 차학연이 남자의 허리를 붙잡았어.

 

 

 

 

  "미리 경고하는데 저 년은 다시 여기로 오게 돼 있어."

  "."

  "내 말 저 계집애한테 똑바로 전해."

  "닥쳐."

 

 

 

 

이 초. 차학연이 남자를 놓았어.

일 초. 남자가 지하철의 유리창을 빠져 나왔어.

 

 

차학연이 있는 지하철이 다시금 매서운 속도로 앞을 향해 나아갔어.

너는 피 비린내가 풍기는 상황 속에서 멍하니 헛웃음을 지었어. 꿈인지, 생신지, 귀신에게 홀린 건지 너는 구별할 수 없었어.

그저 이 모든 게 꿈 같기만 했어.

 

 

남자는 나사가 풀린 것처럼 앉아 있는 너에게 다가왔어.

 

 

 

 

  "야. 괜찮아?"

  "."

  "이거 완전 정신이 나갔네."

  "."

  "하긴. 그럴 만도 하지."

  "."

  "나가자."

 

 

 

 

이제 남자의 셔츠는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짙은 색의 핏자국이 남았어. 고통에 찌그러진 얼굴이 너를 바라봤어.

너는 멍청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피가 묻은 교복 치마를 털어내며 자리에서 일어섰어.

 

 

그리고 다시 한 번. 요란한 소리를 내며 또 한 대의 지하철이 너와 남자의 앞에 나타났어.

그 속에는.

차갑게 식어 너를 바라보고 있는 이홍빈이 있었어.

 

 

 

 

 

 

 

 

단톡방에선 만만한 게 학연인데 여기선 완전 괴물처럼 나오네요... 적응하기가 힘들어...!! 땀땀... ㅋㅋㅋㅋㅋㅋ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 정말 정말 고맙습니다.

아... 그리고 일 편에서 나온 자전거남을 홍빈이로 맞추신 분들이 꽤 계시더라구여.

우리 독자님들은 눈썰미도 좋으신가봉가. 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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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코코볼이에요
10년 전
독자3
우왕 첫댓첫댓ㅠㅠㅠㅠㅠㅠ 헐 차학연 니가뭔데 악역이여ㅠㅠㅠㅠㅠㅠㅠㅠㅠㅜㅜㅜㅜ이홍빈은 또 뭐고ㅠㅠㅠㅠㅠ와취향저격쩐다ㅠㅠㅠㅠㅠ작가님사랑해요ㅠㅠㅠㅠ엉엉 와진짜좋다ㅠㅠㅠㅠㅠ
10년 전
독자2
선댓!옥동자입니당!
10년 전
독자8
헐대박이다ㅠㅠㅠㅠㅠㅠ지금까지학연이와는다른컨셉이네ㅠㅠㅠㅠㅠ작가님자꾸저이렇게취향저격하시면저는주거염..ㅇ<-<탄톡방에이어이것도신알뜰때마다와야겠군여ㅠㅠㅠ작가님사댱해염ㅠㅠㅠㅠㅠㅠ
10년 전
독자5
우와.......이거진짜최고에요와ㅠㅠㅠㅠㅠㅠㅠㅠ
10년 전
독자6
누누 아? 이게 뭐지 찔린남자는 누구야 난 상혁일줄 알앗는데 홍빈이네 어..뭐지 다음편이 시급해..
10년 전
독자7
ㅋ...콩이도 나쁜남잔가..?.....찔린사람은 누구지?태긔?시기?효기?음..
10년 전
독자9
블루밍이예요 우와 이거 진짜 뭐지...... 무서워...... 학연아....... 홍빈아...... 남자는 또 누구죠? 아 뭐야 무서우ㅓㅠㅠㅠㅠㅠㅠㅠㅠ 차학연 말 너무 소름돋아요 다시 오게 되어있다니..... 다음 편이 기대되네요ㅠㅠㅠㅠㅠ
10년 전
독자10
찔린사람은누구지?홍빈이가죽일려고했던건가?뭐지?뭔진모르지만소름돋아ㅜㅜㅠㅠㅠㅠㅠ이런거너무좋아요ㅠㅠㅠㅠㅠㅠ
10년 전
독자11
다람쥐에요! 1편부터 느꼈지만 정말 어마어마한 대작이 나올거같은 느낌!!!! 취향저격 제대로 당했네요... 다음편 기대할게요 엄청 많이 기대할거에요!(๑•́ ₃ •̀๑)
10년 전
독자12
선댓!옥동자입니당!
10년 전
독자14
헐욕할때소름;;;;;;;; 재미따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다음편진짜기대하고있어요ㅜㅜㅜㅜㅜㅜㅜㅜ
10년 전
독자15
어....어우어넝..........이거무셔워여ㅕㅠㅠㅜㅜㅜㅜㅜ우아우ㅜㅜㅜㅜㅜㅜㅜㅜ학여니ㅜㅜㅜㅜㅜㅜㅜㅜ무어야ㅜㅜㅜㅜ
10년 전
독자16
헐헐콩빈이에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헐무서워요ㅠㅠㅠㅠ작가님대박금손이신듯...와우
10년 전
독자17
콧수염이에요!!!와...이번편들도 소름이 쫙!!!!!ㄷㄷ 항상 디스당하는 학연이가 이렇게 변하니까 상상이 안가기도 하고..ㄷㄷ너무 재밌어요!!!ㅜㅠ아 그리고 빚쟁이를 구해준 또다른 남자는 누굴까요..?흠 저는 뭔가 원식이같기도하고...ㅋㅋㅋㅋㅋㅋ다음편도 기대하겠습니다!!
10년 전
독자18
이거 진짜 제스타일이에여ㅠㅜㅜㅠㅠㅠㅠ자까님 사랑해여ㅜㅜㅜㅜㅜㅜ ㅜ
10년 전
독자19
귤이애요!!우왕ㅠㅜㅜㅜㅜㅜㅠㅜㅜ홍비니는 뭘까ㅠㅠㅜㅜ적인가?ㅜㅠㅜㅠㅜ
10년 전
독자20
헐ㅜㅠㅜㅜㅜㅜㅜ어떡해ㅜㅜㅜㅜㅜㅜ이 글 어떡해ㅠ ㅠㅜㅜㅠ너무 재밌어요 작가님ㅜㅜㅜㅜㅜㅜ스릴러 처음 보는건데ㅜㅜㅠㅜ짱짱ㅜㅜㅠ
10년 전
독자21
뚱바에요...헐...뭐죠...나지금떨고있어요....헐....무서움...
10년 전
독자22
허..헐..작가님 이런거 진짜..
짱이다..

10년 전
독자23
이게 뭐예요ㅠㅠㅠㅠㅠ무섭잖아요ㅠㅠㅠㅠㅠㅠ어어어어아엉유ㅠㅠㅠㅠㅠ 지하철 어떻게 타라고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무서우어ㅓ어아어아아ㅏ아아아아ㅏ아아아아ㅠ뭐가 뭔지고 모르겠아!!!!! 머리가 돌인가봐ㅠㅠㅠㅠㅠ엉어어엉유ㅠㅠㅠ므서워ㅠㅠㅠㅠ
10년 전
독자24
헐... 요구르트에요ㅠㅠㅠㅠ 이런분위기는 또 처음인데여ㅠㅠㅠ♥♥ 학연이가 나쁘게 나오지만서도 싫지않은이유는...? 소름 대박 ... 저 보면서 계속 소름 돋았자냐여!!!! ㅠㅠㅠㅠㅠ 이런 소재 감사합니닷..^★^
10년 전
독자25
엉엉 왜 안뜨지?ㅠㅠ
10년 전
독자26
헐이거뭐예여ㅜㅜㅜㅜㅜㅜㅜㅜㅜ이런스릴러진챠좋아여ㅜㅜㅜㅜㅜㅜ홍비니는죽은거예요? 안돼ㅜㅠㅜ
10년 전
독자27
와이게뭐지..이게뭘까요..진짜너무좋아요이런거ㅠㅠㅠㅠㅠㅠㅠ으아ㅠㅠㅠㅠ
10년 전
독자28
헐....진짜 재밌어요.... 너무 좋다..... 대박
10년 전
독자29
어ㅠ오ㅇ오ㅠ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소름....뮤서유ㅓ요ㅠㅠㅠㅍ퓨ㅠ
10년 전
독자30
빵떡이에야.....하...허....학연이....으...아....어...소름....우튜튜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하큐튜큐ㅠㅠㅠㅠㅠㅠ작가님은 이런소재도 잘쓰시나봉가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ㅜ
10년 전
독자31
소오오오오르으으으ㅡ음ㅠㅜㅜㅠㅠㅜ 학연앜ㅋㅋ
10년 전
독자32
대박 저 진짜소름돋앗어요와 짱이다 진짜 짱드센 하트하트
10년 전
독자33
뭐믜뭐뭐뭐뮤ㅠ뭔데요ㅠㅠ저잠못자요ㅠㅠ
10년 전
독자35
헐 무셔.. 해 다뜬 아침에 읽는데도 무서워... 진짜무서워ㅠㅠㅠㅠㅠㅠㅠㅠ오또케ㅠㅠㅠㅠㅠㅍㅍㅍㅍㅍㅍ퓨ㅠㅠㅠㅠㅠㅠㅠ진짜 엄청난 스토리잖아!!!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10년 전
독자36
?.....뭐야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10년 전
독자37
헐 뭐야 이거 새벽에 읽는 무서운글이에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무셔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10년 전
독자38
헐대박....진짜대ㅣ박...우와...댑악...어리둥절하면서도 충격쩌네요..우와 작가님짱짱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10년 전
독자39
헐대박.......무서워퓨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10년 전
독자40
헐..재미져ㅠㅠㅠㅠ이런스토리 조으다
10년 전
독자41
허루ㅜㅜㅜㅜㅜ완전소름돋아여ㅠㅜㅜㅜ허유ㅜㅜㅜ무서부두ㅜㅠㅜㅜ
10년 전
독자42
자까님 사랑해여🫶
2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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