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성용
애증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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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히 창 밖 소복히 쌓인 눈으로 덮인 하얀 세상을 바라보았다.손에 들고 있는 빨간색의 머그잔에서 하얀 김이 올라왔다.
그러고 보니 머그잔도,머그잔 안에 담긴 커피도 다 네가 좋아하는 것들이네.
나에 대해 관심도 없던 너는 온 집 안이 하얀 내 집안에 어울리지도 않는,그렇다고 또 어울리는 듯한 빨간 머그잔을 사다주었다.
마치 순백의 하얀 눈발에 핀 붉은 장미마냥,네 존재를 꼭 나에게 상기시키기리도 하듯 이 컵은 항상 도드라졌다.
나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없는 네가 밉기만 한데,그렇다고 또 밉지는 않은 이런 모순적인 관계
나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없는 네가 또 좋기만 한데,그렇다고 좋지도 않은 이런 모순적인 관계
밉지만,좋은 그런 애증스러운 관계.
괜히 네 생각이 나 눈 내리는 풍경을 바라보다 커피를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목구멍이 달달씁쓸하다.너도 달달씁쓸하다.너는 커피같은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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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밤이였나?그래 뭐 그쯤되었겠지.
너와 있는 매 순간은 항상 그 순간만 생각했더니,나중되어 기억을 꺼내려하니 기억도 제대로 안난다.새삼 기억을 되짚다 네 존재에 대해 다시 깨닫는다.
라임 향의 톡톡 튀는 상큼한 냄새의 입욕제로 몸을 발끝부터 담구고 있다가 네가 문을 열고 들어온 소리에 한숨을 쉬곤 몸에 묻은 거품을 물에 흘려보냈다.
항상 관계할 때 느끼는 쾌락보다는 내 몸에서 나는 향에 대해 더 집착을 하는 너였기에,코를 찌르르하게 만들 진한 샤워코롱을 몸에 뿌리곤 샤워가운을 입고 나왔다.
방 안의 작은 탁상 위 놓여있는 와인을 바라보다 괜한 웃음이 나왔다.
왠일이야,나는 그렇게 싫어하던 네가.
그가 화장대 끝에 멀끔한 수트를 걸쳐입고는 앉아있었다.그런 그의 옆으로 다가가 화장대에 앉아 머리에 두르고 있던 수건을 풀어 머리를 탈탈 털었다.
물이 튀는 듯 작게 미간을 찌푸리던 너를 지나쳐 옷장 앞에서 말없이 샤워가운을 벗었다.
너는 항상 이런 식이다.네 앞에서 나체로 있던,말던.네 앞에서 울음을 흘리던,말던.네 앞에서 죽어가던,말던.
너는 내게 아무감정도 없었다.아니,없는 게 아닌가.그래,미워하는 것도 사람 말려가는 감정이겠지.
밑에는 아무것도 입지 않은 채,큰 하얀 색의 와이셔츠를 하나 걸쳐입곤 탁상 앞 의자에 앉았다.
자연스레 그가 앞에 앉아 와인의 코르크 마개를 땄다.
방 안엔 은은한 노란빛의 조명만 켜 있었고,달달한 와인이 들어가 분위기가 더 이상해진다.
서로를 말없이 바라보다가 이내 입을 맞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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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내 위에서 입을 맞추며 내려다보고 있다.이미 위에 입고 있던 하얀 와이셔츠는 벗겨진지 오래.
나체가 되버린,인간의 모양인,자신들의 쾌락만 찾는 그 짐승같은 모습.내가 만약 너와 내가 관계를 하고 있는 걸 보면 되게 역겨울거 같아.
비록 너도 그럴테지만.
목과 어깨 사이,오목하게 들어간 부분에 네가 얼굴을 묻고는 냄새를 맡았다.그러고 있지만 네 손은 이미 내 몸을 훑으며 지나간다.
여러 곳을 만져대는 네 손에,작게 갸릉거렸다.
갑자기 목에 축축한 것이 닿았다.그리고 곧이어 울음에 잠긴 네 목소리가 들렸다.
"세상에는 단어가 몇개쯤 있을까."
"상식 밖의 단어까지 포함하면 사람의 뇌로는 정의할 수 없지 않을까."
네 터무니없는 질문에 나는 또 터무니없는 대답을 내놓았다.
내 말에 네가 잠겨버려 작게 새어나오는 웃음을 내뱉고는 말했다.
"그럼 그렇게 많은 단어들 중 우리 사이를 정의할 단어는 몇이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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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가 자욱하게 낀 아침,고속도로에서 엑셀을 더 밟아 속력을 내어 안개를 가로질러 달렸다.
전조등이 괜히 뿌연 안개에 흩어져 은은한 빛이 났다.곧 긴 터널이 나왔고 마치 안개 속으로 들어가는 듯이 그 속으로 들어갔다.
꽉 막힌 긴 터널에서 이렇게 달리고 있으니,괜히 네 생각이 났다.벌써 널 안 본 것도 일주일가량 되었나.
그 의미심장한 질문을 끝으로 나는 그에게 아무말도 하지를 못했다.
이게 사랑하는 게 맞는 건지,미워하는 게 맞는 건지.딱히 뭐라 할 감정이 아니였다.
이렇게 너같이 꽉 막히고,끝이 안 보이는 터널을 달리다보니.네 질문에 대한 대답이 떠올랐다.
"있기라도 할까?만약 있다면,그건 우리의 관계 뿐만 아니라 감정을 정의해주는 단어기도 할테지."
어쩔 땐 죽도록 밉고,어쩔 땐 죽도록 사랑하는.이 모순적인 관계
그렇다고 아무런 감정도 없는 것이 아니고,감정은 남아있는데.이 감정마저도 가짜일까봐 걱정스러운 우리 관계
이토록 애증스런 우리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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