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
Bloody Romance
W. DKN
H.
저도 모르게 자리를 피해버린 성규가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쿵쾅대는 심장을 붙잡고 방으로 들어와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보니 가관이다. 손을 올려 발갛게 물든 뺨 위로 가져다 댔다. 차가운 손이 와 닿는데도 열은 쉽게 사그라질 생각을 안 한다. 이런 모습이 저답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르륵 미끄러지듯 소파에 앉은 성규가 팔꿈치를 오므려 제 턱을 괴고선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아이러니하다. 그토록 바라던 말이었는데 왜 피해버린 걸까. 술에 취한 것도, 어디가 아픈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제 본능이었다. 본능적으로 우현에게서 도망친 것이었다. 단숨에 낼름 집어삼킬 것처럼 굴던 제가 우현을 밀어낸 꼴이었다.
‘지금은 그 말…, 후회 중이에요.’
마음이 복잡해진다. 문득 옛 기억이 떠올랐다. 인간이었을 땐 느껴보지 못했던 그 감정, 심리, 행동. 가지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두려워하던 눈, 파리해진 입술, 떨리던 손. 어쩌면 내면에 그대로 박제되어 있던 기억이 우현에 의해 끄집어내진 건지도 모르겠다. 쿠궁, 무거운 쇠추가 심장 위로 떨어진 것 같았다. 더는 가까이하면 안 되는 걸까. 지금 이대로가 가장 좋은 걸까. 오랫동안 손을 타지 않아 먼지가 내려앉은 서랍장 손잡이를 열자 박스채로 놓여있는 담배 더미가 보였다. 그 중 한 갑만 빼내어 손가락을 쑤셔 넣는다. 곧이어 손가락에 잡혀 올라온 하얀 담배의 필터 끝을 입에 문 성규가 라이터를 찾는다. 꼭 찾으려고만 하면 안 보이는 라이터에 짜증이 치민다.
“라이터 찾냐?”
“…….”
재수 없는 웃음이 걸려있는 명수였다. 제 바지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성규에게 던진 명수가 옆 소파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는다. 아까 얘기하고 있던 애는 누구야? 막 불을 붙이려던 성규의 손이 멎는다. 손을 들어 물고 있던 담배를 빼냈다. 필터 끝이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봤어? 성규의 물음에 명수의 고개가 위아래로 흔들린다.
“제대로 네 취향이던데?”
목에 끼어있던 기침이 쿨럭, 하고 내뱉어졌다. 그런 거 아니야. 부정하는 성규의 귀 끝이 새빨갛다. 씰룩거리는 명수의 눈썹이 귀신은 속여도 난 못 속여, 라고 말하는 것 같아 성규는 애써 그런 그의 눈길을 피했다. 말을 아끼는 성규의 모습에 정말 이상함을 느낀 명수가 무어라 말을 던지려 하자, 성규가 먼저 선수를 쳐 물었다.
“김재규는,”
“…….”
“만나봤어?”
무언가 말하려다 금세 가라앉는 입을 보니 아무래도 만난 듯싶었다. 발갛게 물들었던 뺨이 어느새 본래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건조하기 짝이 없는 방 안 공기가 텁텁하게만 느껴졌다. 방 한켠에 자리 잡은 침대가 시야로 들어오자마자 분노가 치민다.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늘 자리를 꿰차고 있는 붉은색의 침대. 저를 탐하는 시선.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제 피를 탐하는 시선. 그것을 갈취하기 위해 무의미하게 이어지는 섹스까지. 어느 것 하나 성규가 원하던 건 아니었다. 너무나도 손쉽게 구속에서 벗어난 명수와는 달리, 벌써 몇 년째 지긋지긋하게 저를 따라붙는 재규를 받아내기엔 이제 너무 지쳐버렸다. 한 줄기 희망과도 같은 명수의 시린 손을 붙잡았다. 어디서 만났어?
“네가 싫대.”
“…김재규가?”
“근데 네 피는,”
“…….”
“좋대.”
온몸의 피가 몸 밖으로 새나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맥이 빠진다. 진전 하나 없는 상황이 이제는 당연하게만 느껴졌다. 허탈한 웃음이 성규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여전히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이디? 젖었던 부위가 마르며 쭈글쭈글해진 필터를 다시 집어 물었다. 그와 동시에 제 앞으로 뻗어진 불이 다시 멀어지는 걸 붙잡는다. 너도 한대 필래? 라이터를 손에 쥔 명수가 고개를 저으며 다시 그것을 제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예고 없던 침묵이 방안을 끼얹었다. 한참의 정적이 이어졌고, 재떨이에 쌓인 꽁초가 수북해질 때까지 명수는 선뜻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을 굳히고 담배만 빨던 성규가 마지막 개비를 집어 들었다. 벌써 비워진 담뱃갑만 해도 두 갑이었다. 폐부가 시꺼멓게 다 타들어 갈 듯이 피워댔지만 그것은 조금도 성규의 두려움을 가라앉혀주진 못했다. 그때, 방문이 벌컥 열렸다.
“사장님, 마감 준비 안 해요? 벌써 손님들 다 나가셨는데.”
“몇 시지?”
“두 시 십분 전요.”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나. 명수도, 저도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우진아, 이것 좀 버려. 제가 더럽혀 놓은 재떨이를 본 우진의 눈이 크게 뜨인다. 이거 사장님이 다 피운 거에요? 곧 이어질 잔소리를 피해 빠르게 몸을 피한 성규가 복도를 지나 주방 쪽으로 걸어가다가 테이블 위에 엎어져 있는 인영에 걸음을 멈추었다. 엎어진 술잔에서 흘러나온 솔방울이 바닥으로 똑, 똑 떨어지고 있었다. 아무렇게나 처박힌 얼굴, 동그란 뒤통수. 아마 제일 먼저 비워졌을 와인 메독 옆으로 늘어선 위스키병들. 위태롭게 놓여있던 시바스 리갈을 들어올렸다. 비워진 병이 가볍게 성규의 손아래에서 흔들린다. 그런 성규의 옆으로 다가온 진석이 불평을 토로한다. 이 손님, 아까부터 깨웠는데 절대 안 일어나요. 어떡하죠?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주방보조 애들 다 퇴근시켜. 창고에 재고 들여놓고 너도 퇴근해.”
꾸벅,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 진석의 모습을 바라보던 성규가 다시 제 앞에 쓰러진 우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술은 또 언제 이렇게 마셨는지, 깡그리 다 비워진 술병들이 우현을 수호하듯 테이블 위에서 번쩍거리고 있었다. 옆에 놓여있던 빈 쟁반에 그것들을 모두 옮긴 뒤 이제야 방에서 비척거리며 나오는 명수에게 쥐여주었다. 어, 뭐야. 얘 언제 이렇게 꽐라 됐어? 제게로 넘겨진 쟁반을 엉거주춤 받아든 명수가 우현의 꼴을 보며 혀를 찼다. 네 선글라스나 똑바로 쓰고 말해, 멍청아. 쓴 소리를 날린 성규가 우현의 앞 테이블 의자를 빼어 앉았다.
“너 뭐하냐.”
“고민 중.”
나머지 알바생들도 모두 퇴근하고 명수와 성규, 우현만 남은 지금. 성큼성큼 다가온 명수가 대뜸 우현의 엉덩이며 배 부근을 더듬거리기에 화들짝 놀란 성규가 뭐하냐며 그런 명수의 팔을 붙들었다. 술집에 핸드폰도 안 들고 오는 병신도 있네, 이거. 성규의 낯빛이 절망으로 뒤바뀐다. 핸드폰은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일단 너도 들어가.”
“얜 어쩌게?”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가, 좀!”
너, 이상한 짓 꾸미지 마. 익살스러운 명수의 목소리가 문 너머로 빠르게 흩어진다. 쫓아갈 듯이 몸을 일으켰던 성규가 다시 의자에 앉으며 잠든 우현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다지 하얀 편은 못 되는 까무잡잡한 피부, 밤이 늦은 지금도 솜털 하나 없이 맨질맨질한 턱가, 울긋불긋 꽃이 핀 목덜미. 목덜미? 성규의 손이 쭉 뻗어 우현의 목덜미로 향한다. 그러나 손이 채 닿기도 전에 정신이 번쩍 든 성규가 빠르게 손을 치워냈다. 머리카락 끝이 바짝바짝 솟는 게 정신이 아찔했다. 더 이상 이렇게 보고만 있다가는 날 샐 것 같아 별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코트를 챙겨 입었다. 단추까지 꼭꼭 잠근 성규가 우현을 일으켜 세웠다. 축 늘어진 몸이 이리저리 갈피를 못 잡고 휘청 이다 성규의 품 안으로 안착했다. 독한 술 냄새 사이로 훅, 끼치는 향이 역시나 우현다워 입가에 웃음이 걸린다.
술을 먹고 뻗은 사람의 무게는 충격적일 정도로 무겁다. 끙끙 앓는 소리까지 내가며 우현을 들쳐 업고 주차장까지 힘겹게 내려온 성규가 주머니에서 차 키를 꺼내 버튼을 꾹 눌렀다. 노란 불빛이 번쩍이는 차 문을 벌컥 열어 우현을 천천히 밀어 넣었다. 벌써 제 옷깃까지 베인 술 냄새가 코끝을 쿡쿡 쑤신다. 간신히 차에 태우고 문을 닫은 성규의 안색이 그다지 좋지만은 않다. 어찌저찌해서 차에 태우긴 했지만, 앞으로가 더 문제였다. 차에 올라타 차 키를 꽂은 성규가 안전벨트를 매다 말고 뒤를 돌아 우현의 얼굴을 확인한다. 희미한 노란 전등불 밑으로 창문에 위태롭게 기대어 있는 자그마한 얼굴이 보인다. 차라리 앞좌석에 태워 시트를 뒤로 젖혀줄 걸 그랬나. 차에 시동이 걸리며 차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같이 덜덜 떨리는 우현의 얼굴을 보니 풋, 하고 웃음이 터졌다.
-7층. 문이 닫힙니다.
거울에 비친 둘의 행색을 보아하니, 다른 사람이 본다면 비웃을 게 뻔한 모습이다. 다행히 시각이 늦어 사람이 없는 게 다행이지 싶었다. 우현의 팔을 목에 두르고 간신히 허리를 받쳐 겨우 입성한 아파트. 점점 다가오는 층수에 다시 내릴 채비를 한 성규의 팔에 힘이 들어간다. 끙, 끙 앓는 소리까지 내가며 힘겹게 걸음을 뗀 성규가 금방이라도 고꾸라질 것 같은 우현의 몸을 한 손으로 지탱하며 비밀번호를 눌렀다. 문이 열리자마자, 더는 무리였는지 순식간에 팔 힘이 풀려 우현이 현관에 철푸덕 쓰러지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동조차 없는 우현에, 혼자 놀란 성규가 다급히 무릎을 쪼그리고 앉아 우현의 몸을 살폈다. 회색빛 로퍼를 벗겨 내자마자 성가시게 굴던 코트를 벗어 던졌다. 우현의 목덜미를 세게 잡아 쥐고 끌어당기자 우현이 그대로 바닥에 질질 끌려온다. 본디 손님방은 윗층에 있었지만, 아무래도 계단을 오르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 생각하고 그대로 우현을 잡아당겨 다른 방으로 이끌었다. 문턱을 넘기기 직전, 먼저 방으로 들어가 침대 이불보를 들춰낸 성규가 목덜미가 잔뜩 늘어난 우현의 카디건을 풀어내고 겨드랑이로 손을 넣어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쪼끄만 게… 무겁긴… 되게 무겁네.”
침대에 우현을 집어던지듯 내려놓은 성규가 그제야 한숨을 돌렸다. 이런 진상 짓, 다신 안 해. 방을 나와 부엌으로 향한 성규가 식탁 위에 올려져 있는 컵을 집어 물을 들이부었다. 바닥에 떨구어져 있는 우현의 흔적들이 지저분해 보였지만 딱히 지금 치우고 싶진 않았다. 이미 지칠대로 지쳐버린 몸을 이끌고 샤워실로 향하던 성규가 활짝 열린 우현의 방문을 돌아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다시 발을 돌려 우현의 방으로 향한 성규가 이불을 우현의 코까지 올려 덮어주었다. 팔에서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카디건을 걸리적거리지 않게 잡아 빼어 의자 등받이에 걸쳤두었다. 불을 끄고 나온 성규가 조용히 방문을 닫았다. 성큼성큼 발을 내딛은 성규가 문득 든 생각에 고민에 빠졌다. 내일 무슨 얘기를 먼저 꺼내야 할지, 또 무슨 얘기가 그 입에서 들려올지.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았다.
Say_
빨리 가져오고 싶어서 검토조차 안해보고 올리네요 ㅠㅠ.. 며칠동안 바쁠 것 같아 미리 글 띄워두고 가요
회원전용을 풀어서 그런지, 확실히 함께하는 독자분들이 늘어났어요! 모자란 제 글 보러 와주시는 분들 정말 늘 감사드립니다 :D
여러분들 덕에 힘이나요! 암호닉들은 다 기억하고 있으니 언제나 언급해주세요 ! 환영입니다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