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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주전에 올린게 마지막이라니 넘 스레기같아 상 중편 구독료 풀어뒀습니다 기억 안나시면 같이 읽으시조... _(┐「ε:)_❤<<
* 전체글이 다 파란색인건 지훈이 시점입니다 *
AM 12:10
뭐 먹을건데? 빨리 말해라. ㅃㄹㅃㄹㅃㄹㅃㄹㅃㄹ
답장이 없다. 눈꺼풀은 진즉부터 무거웠지만 한마디라도 더 하고 싶었다. 맘같아선 뭐하냐고 추궁하고 싶은데, 보채면 그것대로 의심스러울까봐 괜히 화면만 괴롭혔다. 메시지 옆의 1은 지워질 생각이 없다. 인터넷도 괜히 한번 들어갔다가 시덥잖은 연예계 기사 서른개나 봤는데 아직도 1이 지워지지 않았다.
AM 12:31
자?
얘도 지금 자나?
...
나도 졸린데.
AM 12:50
껌뻑 설잠에 들었다가 급하게 깼다. 혹시나 카톡에 들어갔지만 아직도 읽은 티는 없다. 불현듯 주학년이 스쳤다. 혹시 같이 있는 거 아냐? 걔가 정신나가서 주학년한테 고백하면 어떡해.
손에 익은 번호를 눌렀다. 수화음이 오래간 이어졌다. 전화를 안 받는다. 원래 휴대폰 잘 가지고 다니는데. 정신이 번쩍들어서 몸을 일으킨다. 재다이얼을 눌렀다.
다섯 통째 전화를 받지 않는다. 진짜 주학년이랑 있나? 그래서 카톡도 안 보나?
AM 1:05
전화받으라고 톡을 했다. 눈으로 보지 않으면 밤새 이럴 것 같아서 결국 확인하기로 결심했다. 꽐라가 된 동아리 애들 사이를 비집고 복도로 나섰다. 옆 라인이 신문부 남자애들 방이었다. 다행히 문은 열려있었다. 휴대폰 라이트를 옅게 켜고 얼굴을 확인했다.
아. 주학년. 있었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흔들의자가 있길래 앉았다. 바닷바람이라 여름인데도 서늘했다. 정신차리라고 뺨이라도 때리는 것 같았다. 그래. 정신차려, 박지훈. 전화 다섯통 한 거 너무 오바하는 것 같잖아. 부담스러워하면 어떡해! 악! 머리를 헤집었다. 걔 그런거 딱 싫어하는데.
AM 1:29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자리에 누워서 민망함에 톡을 좀 더 보냈다.
아니네 미안.
근데 뭐해?
…
AM 2:08
미쳤네. 누가 형제랑 사귄대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자조섞인 웃음이 터진다. 그러게, 내가 미쳤지. 어쩌다 널 좋아해서는.
불쌍한 내 마음. 존재가 부정당하느라, 수락은 커녕 거절도 못 당하는. 내 입으로 내 마음조차 부정해야 하는 게 못내 속이 상했다.
" 햇님반 친구들! 오늘 그림그리기 시간에는~ 미래의 가족을 그려볼거예요. 다들 크레파스 가지고 왔죠?"
고사리손이 색색의 크레파스를 쥐고 저마다의 미래를 그렸다. 누군가는 자신과 개만 여덟마리를 그리고, 누구는 할머니 할아버지부터 증손자까지 모여사는 대가족을 그리고. 지훈은 오붓한 가족을 그렸다.
" 박지훈! 다 그린 사람 놀이터래."
" … 응!"
" 너 아직도 안 그렸어? 빨리 그려. 나가서 놀게."
" 응, 잠시만…."
지훈의 손이 급해졌다. 그 애가 좋아하는 노란 원피스를 위해 개나리색을 집었다. 손에는 그 애가 환장해 마지않는 불꽃놀이를 쥐어줬다. 바로 코앞에서 보고 있으니 좀 더 닮게 그릴 수 있었다. 곁눈질로 얼굴을 확인해가며 그림을 이어나갔다. 다행히 제 그림엔 별로 관심이 없다.
" 야, 빨리 해."
" 응. 이제 다 했어."
화살표를 달아 걔 이름을 또박또박 적었다. 양복을 입은 자신의 그림에도 박지훈 석자를 똑똑히 써넣었다. 혹시 번질까봐 후후 불기까지 했다.
" 나 사람 대따 많이 그리느라 손 아파. 우리 나중에 결혼하면,"
" 어?"
" 우리 나중에 각자 결혼하면 바로 옆집에 살기로 했잖아. 내가 니네 부인 완전 예쁘게 그려줬다."
태어나길 함께였다. 그건 누군가에겐 숨쉬는 듯 자연스럽게 스며든 애정이었고, 누군가에겐 가족같은 편안함이었다. 그 애의 가정에 항상 우리는 부재했다. 너와 나, 만 있을 뿐이었다.
지훈은 검은색 크레파스를 다시 손에 쥐었다. 노란 원피스를 입은 그 애의 이름을 까맣게 지웠다. 지훈의 방식은 19년간 그랬다. 자신에겐 당연한 가정이 대단한 착각인 걸 깨달을 때마다, 마음을 까맣게 태웠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봐도, 가리고 지우고 덧칠해봐도, 멍청한 자신을 비웃듯 감정은 선명히 되살아났다.
결국 원점이었다.
-
" 이게 다… 뭐야?"
박지훈이었다. 킁, 한참 울어서 팅팅 불은 눈으로 손짓을 했다. 야, 앉아 봐. 술병과 과자봉지가 널브러진 거실바닥을 보고 박지훈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무슨 수행평가때문에 친구집에 갔다가 돌아오는 걔를 부른 거였다. 부모님은 2박 3일 여행가셨고, 수능은 100일 안 되게 남았고, 안 그래도 심란할 상황에 난 곱절은 더했다. 박지훈이 오는 내내 전화를 걸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진 다 말했는데, 그러니까 같은 얘기를 한 네번쯤 듣고 있는 셈일테다.
" 진짜... 흡, 항녀니가 어떠케... 나한테 그러냐?"
" 맞아, 걔가 잘못했어."
" 미리 말해줘쓰면... 내가 이렇게 좋아하지도 않아짜나...."
죄인없는 한풀이는 계속됐다. 그러니까 잘못한 사람은 없는데, 불쌍한 사람은 있었다. 그건 학년이 어장의 황금잉어... 나... 좋아한단 소리도 한번도 못 해봤는데...
그러니까 어떻게 된 거냐면, 오늘은 개교기념일이라 친구들이랑 맛있는 거나 먹고 기분전환 하려고 나갔다가 목격했다. 학년이를. 아. 정정하겠다. 학년이와, 학년이의 여자친구를. 왜 안 말해줬어? 원망하는 건 좀 웃겼다. 물어본 적도 없었으니까. 그동안 없을거라 생각한 내가 병신이었다. 당연하지. 그렇게 잘 생기고 애교많고 살가운데 여자들이 안 달라붙는게 이상했지. 씨발... 원망도 못하게 존나게 예뻐버려서 멀찍이서 허허 인사만 하고 곧장 돌아왔다. 도른거 아니냐? 무슨 연생이 여친도 있고? 생각했다가, 어차피 나 따위 사겨주지도 않을거였는데 니가 왜 화나? 싶었다가 그래도 진짜 매정하네, 좋아하는 것 정돈 맘대로 하게 해줘도 되는거 아냐? 여친 있는데 알고도 짝사랑하는 거 완전 썅년같잖아, 싶구.
내 순애보를 절절히 알고 있던 친구가 안절부절 못하며 달래주려고 했는데, 뭐 위로받지도 못할 정도로 심란해져서, 괜찮다며 집에 왔다. 근데 뭐가. 하나도 안 괜찮았다. 그렇게 좋아한다고는 생각 안 했는데, 막상 여친 있다고 하니까 괜히 울컥하고. 내가 걔한테 신경썼던 모든 시간이 너무 한심하고 쪽팔리고... 그래도 일말의 관심 정도는 있는 줄 알았다. 그렇게 예쁘게 웃어줘놓곤... 그럼 그렇게 예쁘게 웃질 말든가. 아예 기대도 못하게. 처음엔 그저 허탈했다. 기껏 새로 산 원피스 다 구겨지게 쇼파에 모로 누웠다. 눈을 감으면 학년이 얼굴이 둥실 떠올랐다가, 두 사람의 인영이 담긴 악몽을 꾸며 깨어나길 몇 차례. 어느새 해도 다 지고, 어둑해지니까 괜히 또 서러웠다. 충동적으로 냉장고를 열었다. 아빠가 산악회 갔다가 쟁여놓은 소주병들이 보였다. 무작정 세 병이나 가져왔다. 어제 아침에 해놨던 오뎅국도 다시 끓여 구색이라도 맞췄다. 아껴놨던 콘칩도 뜯었다. 혼자 술마시는거 존나 진상이긴 한데 같이 마셔줄 사람도 없었다. 박지훈은 술마시고 담배피고 그런거 딱 질색이라고 선 그어놔서.
그렇게 마시기 시작한건데 처음의 결심은 어디, 한 모금 들이키자마자 존나게 맛 없어서 물로 입 헹궜다가 더 빨리 술기운이 돌아버렸다. 저녁 드라마 하는 거나 멍하니 보고 있는데 좀 열 오르는 것 같고. 나 한 잔 밖에 안 마셨는데?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느새 박지훈이랑 전화하고 있었다. 엉엉 울면서 개 추접스럽게.
큼, 지훈아. 그렇게 첫 운을 뗐는데 아무래도 잠긴 목소리라 놀라는 목소리였다. 너 울어? 너 지금 어디야? 뭔가 존나 요란스럽게 뭐라고 말하는 소리도 들리고 곧장 도어락 소리도 나더니 다급하게 되묻더라. 너 지금 어디냐고. 곧장 달려올 기세라 사실 좀 감동이었다. 짜식. 내가 친구는 잘 뒀군.
" 나 집."
" 지금 갈게. 기다려."
그러고 바람 소리 때문에 한동안 목소리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모르긴 몰라도 존나게 뛰어오는 모양. 낮에 카톡했을 땐 친구집이랬는데. 왜냐고 한마디 묻질 않았다. 괜히 내가 서러워져서, 학년이 얘기를 술술 불었다. 야, 주항녀니.... 킁. 그렇게 걔가 우리 집에 오는 20분 내내 같은 얘기를 리플레이. 끝나면 다시 재생.
그렇게 우리집에 오게 된 박지훈은 내 꼴을 보더니 걔 특유의 환멸난단 표정을 지었다. 소주잔을 하나 더 꺼내와서 박지훈한테 내밀었다. 앉아서 너도 들어봐아... 코를 킁 들이마시자 혀를 끌끌 차며 마주 앉아주긴 했다. 소주잔을 넘치도록 따라주자 걔가 원샷했다. 오, 박지훈~ 놀리는 투로 그러자 인상을 팍 찌푸린다. 맛없어... 중얼거리는 걔 앞에서 했던 얘기를 다시 했다. 역시 끝나면 다시 재생. 여덟번 정도 했을 때 머리가 핑 돌았다. 지후나.... 어지러워..... 눈꺼풀이 반쯤 감긴 채로 그러자 진짜 한숨을 푹푹 내쉬면서 방에서 이불을 가져다 줬다. 쇼파에 이불 덮고 히, 하면서 누웠다.
" 너 있어서 좀 낫다."
" ..."
" 나 이제 어쩔까."
" 뭐가."
" 이제 학년이 어쩔까. 계속 좋아하는 거 좀 아니지."
" ... 니 맘대로 해. 그걸 나한테 왜 물어. 아니라고 해도 맘대로 할거면서."
" 정없어."
그래두 우린 젤 친한 친군데. 입술을 삐죽이며 등을 돌렸다. 차가운 가죽쇼파의 감촉에 잠이 더 왔다. 걔는 계속 술을 마시는지 거실엔 낮게 깔린 티비소리와 유리병이 쨍깡거리는 소리로 가득 찼다. 그 소리가 못내 신경쓰여서 등 뒤에 있을 박지훈에게 물었다.
" 니... 술 안 마신다매."
" ..."
" 너 진짜 사람 존나 빡치게 한다."
눈이 번쩍 뜨였다. 저거 박지훈 아니지?
내가 알던 박지훈은 술 마시는 놈도 아니고, 내가 알던 박지훈은 욕 같은거 입에 담는 놈도 아니고, 내가 알던 박지훈은 나한테 매정하게 말 할 수 있는 놈도 아니고, 내가 알던 박지훈은 타박은 해도 날 진심으로 싫어할 수 있는 놈도 아니고, 내가 알던 박지훈은, 내가 알던…,
내가 박지훈을 얼마나 안다고?
19년 동안 동고동락하며 처음으로 든 의구심이었다. 내가 알던 박지훈, 그거. 진짜 알고 있는거 맞아?
-
" 너 진짜 사람 존나 빡치게 한다."
부러 동그란 뒷통수를 보며 읊조렸다.
원래가 잘 울지 않는 애라, 처음 전화를 받고는 심장이 쿵 내려 앉았다. 다 끝마치지도 못한 수행평가를 미뤄두고 삼십분도 넘는 거리를 십분만에 뛰어왔다. 그 와중에도 걱정뿐이었다.
근데 진짜 병신같잖아. 이 상황은 뭐지. 쟤도 한심한데, 저렇게나 한심한 쟤를 좋아하는 내가 오억배는 더 한심했다. 나는 십구년동안이나 마음을 죽이며 살았는데. 본지 몇 달 된 주학년이 뭐라고 저렇게나 좋아하냐. 내가 여친 만들면 투투때 이십이만원도 보내줄 수 있다고 큰소리 쳐놨으면서, 주학년 여친 있다는 건 왜 저렇게 서럽게 우는건데, 씨발.
평소엔 생각으로도 잘 하지 않던 욕지기가 울컥울컥 솟았다. 술 마셔서 괜찮아질거였으면, 알코올 중독도 기꺼이 했을거다. 이거 봐. 난 저 동그란 뒷통수만 봐도 쟤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그려낼 수 있었다.
지금 안 자는 것도 뻔히 알고 있었다. 원래 잘 땐 쌕쌕거리면서 잘 자는 애였다. 숨도 딱 멈추고. 지금 무슨 생각 하고 있니.
나는 머릿속에 니 생각만 되감기 중이다.
끝나면, 다시 재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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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이후로 박지훈은 미묘하게 변했다. 무슨 날이냐면 내가 술먹고 개진상떨던 그 날. 다음 날 아침에 속을 게워내고 찬찬히 생각하니까 진짜 이런 개진상이 따로 없었다. 아침에 미안하다고 편의점에서 초코바를 종류별로 사다 바칠때까지만 해도 쿨하게 오케이했는데,
" 박지훈은?"
" 우리 종례 아까 끝나서 다 갔어. 지훈이도 갔을걸?"
" 아... 그래? 고마워."
기껏 박지훈네 반까지 행차했는데 반기는건 썰렁한 교실이었다. 진짜 종례시간에 올때마다 치를 떨었었는데 없으니까 그것 나름대로 허전하다. 나 항마력 올라서 이제 개같은 대사도 적당히 받아줄 수 있는데. 왜 말도 않고 그냥 갔지. 같이 집 가던 애들도 먼저 다 보내버려서 혼자 집에 가게 생겼다. 오늘 이어폰도 놓고 왔는데. 한바탕 사람이 빠진 교문을 나서고, 둘이 걸을 땐 어깨가 부딪힐 정도로 좁았던 샛길을 혼자 걸었다. 문자창을 띄워 괜히 끼적거렸다.
[ 왜 먼저 갔냐. 배신자 새끼.]
아니, 뭘 배신자까지야. 맨날 절교하고 혼자 가자고 한 건 내 쪽이었는데.
[ 무슨 일 있어?]
이건 좀 웃기지. 무슨 일 있어야만 나랑 못 가는 것도 아니고.
[ 어디?]
어딘지 알면 뭐할건데.
쓰고 지우고를 반복하다 그냥 안 보내기로 마음을 먹었다. 근데 그냥 동성 친구끼리도 이런거 물어볼 수 있는 거 아닌가? 아, 진짜 갑자기 왜 이렇게 복잡하지. 고작 박지훈일 뿐인데.
빠앙-
왁. 진짜 개깜짝 놀랐네. 어느새 차로 가까이로 가있었는지 지나가던 차가 클랙슨을 울리는 바람에 우습게 놀라버렸다. 사람이 이렇게 정신을 빼놓고 걸으면 안 된다니깐.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는데 문득 생각이 들었다. 난 맨날 정신 빼놓고 걷는데 차에 치일 뻔 한적은 한번도 없었다. 차로쪽으로 섰던건 항상 박지훈이었으니까.
...
아 진짜 씨발 존나 짜증나. 별게 다 걔 생각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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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좀 덜 친해질 필요가 있어.
때로 눈을 마주칠때마다 내가 원하는 걸 딱딱 캐치해내는 박지훈을 보며 종종 했던 말이었다. 근데 그게 이런식으로 굴러 갈줄은 전혀 몰랐다. 지난 일주일은 19년간 가장 어색한 기간이었다. 각자 하교를 하고, 각자 독서실에 가고, 각자 집에서 지내는게 왜 이렇게 어색한지 모를 일이었다. 원랜 이게 지극히 당연한건데. 문득 영어 지문을 읽고 있자면 막연한 미래가 구상되는 거다. 내 모든 인생의 계획엔 박지훈이 어딘가에 있었는데, 예를 들면 결혼식장에선 신부측 하객의 두번째줄 센터라든가, 그런식으로. 근데 그런 박지훈이 서서히 지워져갔다. 이러다. 걔와 나의 미래에 서로가 사라져버리는 거 아닐까. 괜히 울적해졌다. 그 핑계로 독서실에서 가방을 쌌다. 컨디션 조절이다. ... 진짜임.
[ 야. 박지훈 깼어?]
박우진이었다. 박지훈 반 친구. 뜬금없이 웬 문자.
[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박지훈한테 물어야지.]
[ 전화 안 받음. 너 오늘 박지훈 꼴 못 봤냐?]
[ 뭐가.]
[ 걔 오늘 독감이라고 조퇴했는데. 지금 저녁 먹고 약 먹었어야 했는데 쳐자고 있는 것 같아서 문자 보낸 거임.]
안그래도 더럽던 기분이 더 바닥을 쳤다. 나는 그래도. 19년 친군데. 이런 일을 남의 입으로 들어야되는 거냐? 진짜 정없는 새끼. 잔병치레 잘 안하는 대신 한번 앓으면 크게 앓는 탓에 걔 감기 걸릴때마다 내가 항상 옆에 있었다. 걔네 부모님은 맞벌이로 바쁘니까. 그래서 걔가 감기 걸리면 나도 똑같이 감기 달고 돌아다녔다. 그걸 초등학생때부터 해왔는데. 그래서 나 죽도 존나 잘 끓이는데. 개새끼. 걱정 반 서러움 반으로 눈물까지 고였다. 걔네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좀 더 빨라졌다.
초인종 따윈 스킵했다. 곧장 방으로 가니까 웬 이불산이 쌓여있었다. 원래 열 식혀야되는건데 또 뻘짓하고 있구만. 한심하단 표정으로 이불을 한겹씩 다 벗겨냈다. 얇은 여름용 이불을 꺼내 덮어주고 주방으로 갔다. 뭐 있는 재료도 없어서 그냥 계란죽에 간도 약하게 해가서 끓였다. 약은 박우진이 닦달해서 사온 것 같았다. 몸은 불덩인데 병신이 춥다고 몸 웅크리고 있었다. 진짜 이렇게 아프면 진즉에 날 불러야되는 거 아냐? 쟁반을 책상에 내려두고 박지훈을 깨웠다. 열이 올라서 얼굴이 발그레해진 채 걔가 깼다.
" ... 뭐야?"
" 뭐긴 뭐야. 됐고 빨리 먹어."
입이 깔깔할까봐 따뜻한 보리차를 건넸다. 뭔가 어리둥절해보이는데 시키는 건 참 잘했다. 물도 마시고 내가 건넨 죽도 떠먹고 이게 n년간 시켜온 반복학습의 체득인가.
" 언제부터 아팠는데."
" 어제 저녁부터 좀 감기기운 있었는데, 독감인줄 몰랐어."
" 그니까. 나랑 집 그냥 얌전히 갔으면 이렇게 혼자 아플 일도 없잖아. 아플 때 혼자 있는게 얼마나 서러운데."
" ... 너 있어서 좀 낫다."
미세하게 웃음 띈 얼굴로 조곤조곤 그랬다. 왠지 민망해져서 걔가 죽 그릇을 싹싹 비울때까지 딴청을 부렸다. 역시 이어지는 대화는 없었지만 말이 없어서 생기는 어색함도 없었다. 누그러진 긴장감에 숨통이 좀 트였다. 박지훈은 내가 건넨 약까지 얌전하게 먹고 나서야 다시 침대에 누웠다.
" 갈 거야?"
" ... 응. 설거지 하고."
" 아픈데 혼자 있으면 서럽다며."
" ... 그럼 너 잠들때까지 수학 문제 풀다가 갈게. 빨리 자."
개수대에 좀 쌓여있던 설거지도 한번에 해치우니 20분이나 흘러있었다. 박지훈 방문을 살며시 열어보니 벌써 완전히 잠들어버린 후였다. 하여간 아플때면 어리광이 늘었다. 약에 취하는 건지 열에 취하는 건진 모르겠지만 하여간 걔는 늘 그랬다. 걔 침대맡의 무드등이 잠든 박지훈 얼굴을 은은하게 비췄다.
...
다 알았다. 모르면 병신이었다.
의식한건 언제더라, 중학교 언젠가부터였다. 주변에는 숱하게 깨졌다 합쳤다를 반복하는 친구들뿐이었다. 연애란 건 다 저렇게 가벼운거구나. 그래서 박지훈의 예의 사슴같은 눈망울을 매정하게 모른 척 할 수 있었다. 불확실한 감정에 모든 걸 내거는 건 두려웠다. 과거 현재 미래까지 뒤흔들 관계의 변화가 두려웠다. 박지훈이야 어쨌든, 난 걔를 친구 이상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담담하게 그 생각을 실천으로 옮길 수 있었다.
그토록 선명한 진심을 야트막한 모래에 묻었다. 그 애의 파도가 밀려오면 드러나고, 그럼 다시 묻었다. 그렇게 지내온 19년이었다.
그런데 이제와선,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