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남자친구를 회사에서, 그것도 팀장과 일개 사원으로 만나는 소설같은 이야기의 주인공이 내가 될 것이라고 어제까지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당장 어제만 해도 "내일 새로 부임하는 팀장"의 스펙을 논하던 사원들 사이에서 귀를 기울이며 부푼 마음으로 기다리던 나였는데.
잘생기고 젊은 팀장이라는 소리에 막 취업한 일개 사원 주제 꼴에 혼자 설렘을 느끼고 있었다는 말이다.
"아, 내일은 회사에 오고 싶은 날이네요."
"그러게. 그러고보니 00씨 영업팀 아니었어? 좋겠다."
"에이, 뭘요. 그냥 같은 부서 팀장님인데."
"그래도. 눈호강이라도 할 수 있잖아요. 부러워."
여직원들끼리의 담소에서 비롯된 "영업팀 새로운 팀장"에 대한 기대감은 다음날 출근까지 이어졌다.
평소보다 더 힘을 주느라 시간을 쏟아 부은 게 잘못인지 당장 타야할 버스 시간이 촉박해 급하게 머리 정리를 하며 집을 나섰다.
속으로 십원짜리 육두문자를 날리며.
남들 시선따위 개의치 않은 채 달려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설 즈음 들리는 목소리에 발걸음을 늦추고 심호흡을 한 후 조심스레 들어섰다.
"강다니엘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 저분이 팀장님이시구나. 강다니엘... 강다니엘?
직원들과 차례로 인사하는 팀장님이 내 전 남자친구라면.
이건 좀, 뭣같은 경우지.
"조금 늦으셨네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제 시계를 쳐다보는 강다니엘은 내게 장난스러운 미소를 보였다.
그나저나 저 시계 얼마짜리야. 강다니엘 성공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네.
"00씨, 계속 거기 서있을 거예요?"
"아, 아뇨. 죄송합니다. 제가 조금 늦게 일어나서."
"늦게 일어난 것치고는 너무 힘을 주셨는데."
웃음기 섞인 어투로 나를 놀리는 강다니엘의 발언에 주변 직원들도 유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이봐요들, 요즘 인생이 그렇게 재미가 없나요.
근데 나를 모른다는 듯한 저 태도가 이상하게 마음에 안 든다.
아니, 너 진짜 나 기억 못해?
"팀장님 있잖아, 유학파에다 해외 기업에서도 평판이 그렇게 좋았대."
"이번에 부임한 것도 기존에 다니던 회사에서 로열티까지 제시하면서 있어달라고 했는데도 굳이 한국으로 가고 싶다면서 왔다더라."
내가 아는 강다니엘은 사투리 하나 고치지 못해서 나한테 매번 놀림받던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굳이 사투리를 고치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붙는 수식어가 저거구나.
강다니엘이 잘 나가는거 나도 잘 안다. 아마 내가 제일 잘 알걸?
그는 예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너무 잘난 사람이다.
내가 올려다보지도 못할 만큼.
자신의 꿈을 좇아 하고 싶은 게 참 많았떤 사람이라 서로의 관계는 소원해졌고 내가 먼저 그를 놓았다.
이게 다니엘을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좋은 거라 생각하면서.
취업난에 대기업에 입사한 나도 참 대견하다 싶었는데 역시 다니엘은 나보다 한참은 더 앞서있었나보다.
"오늘은 새로운 팀장님도 오셨는데 환영식 어때요? 팀장님! 팀장님!"
혼자 과거 회상에 푹 빠져있을 때 내 회상을 박살낸 건 이과장님의 쨍한 목소리.
환영식이라니. 과장님, 어제까지는 과장님보다 젊은 사람이 당장 팀장으로 들어온다는 거 결사 반대하셨잖아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한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다니엘.
눈이 마주쳤다는 사실을 부정이라도 하듯 고개를 홱 돌린 그의 모습에 샐쭉하니 입술을 비죽였다.
내가 뭐 죄 지었어? 아주 개무시를 하시네.
"좋습니다. 제 환영식이니까 제가 쏠 기회는 주시는 거죠?"
"와, 미쳤다. 돈이 남아 도ㄴ..."
이런. 속으로 생각한다는 게 입 밖으로 나와버렸다. 하하... 어색하게 웃어보이고는 모니터에 얼굴을 박고 키보드를 두드렸다.
옆에서 팔꿈치를 툭툭 쳐대는 박사원을 흘겨보고는 빼꼼히 고개만 들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그럼 오늘 다들 시간 되는 거죠?"
시원스레 웃으며 분위기를 바꾸는 다니엘의 모습은 예전과 변함없었다.
참, 잘났다. 잘났어. 나만 나쁜 사람이지.
술자리는 여느 때와 다름 없었다. 예전에도 알았지만 다니엘의 주량은 약한 편이 아니었고 술잔이 채워지는 족족 마셔대는 걸 보니 주량이 더 는 것 같기도 했다.
저렇게 마시면 훅 갈 텐데.
나는 분명히 그를 의식하고 있었고 내가 그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기에 스스로가 답답해 술을 계속 마셨다.
다니엘과 순간 눈이 마주쳤다. 뭐. 왜. 어쩌라고. 술김에 할 수 있는 온갖 꼽은 다 줬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나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리는 모습에 열이 오른다.
쟤 저거, 저 웃는 거 봐. 저거 저거, 사람 홀리는 웃음이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리가 없는 다니엘은 이내 내게서 시선을 돌리고는 옆 사람과 담소를 나눴다.
"이과장님, 너무 많이 드셨어요."
술자리가 무르익었을 즈음, 주량이 약하지는 않지만 이과장님 옆에서 계속 술을 마셔서 그런지 내 정신도 마냥 온전하지는 않았다.
아, 나 다 죽었네.
주변을 두리번 거리면 나와 비슷한 상태인 박사원과 취해서 인사불성인 이과장님, 시끄럽게 떠들며 술을 주고 받는 김대리님과 황대리님, 그리고 내게로 다가오는 다니엘.
응...? 뭐야. 쟤 왜 여기로 와.
"00야."
"..."
"많이 마셨네."
"...뭐요."
"왜 이렇게 심통이 났을까."
"제가 뭘."
"내가 예전에도 말했잖아. 넌 웃을 때가 예쁘다고."
정신이 없어서, 존나 어지러워서 이런 거겠지. 내가 지금 쟤한테 또 반한 게 아니고, 존나 아니고. 그냥 시끄럽고 어지러워서.
내 잔이 제 것인 것 마냥 단숨에 술을 들이키는 다니엘은 여전히, 얄밉게도, 존나 잘생겼다.
+제목 뭐로 할지 고민하다가 사실 제목 미정 정도가 딱 맞는 글인데 그래도 너무 성의없어 보일까봐
대충 작명했는데 역시나 제 필력과 작명센스는 비례하네요
어쩜 저런 제목이 나와쓰까...
존나 매력적인 전남친 강다녤을 써보고싶었는데 미안하다.. 따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