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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을 고쳐풀어도 답이 나지 않는 4점짜리 수학문제를 저리로 밀어버렸다. 독서실 책상의 전등을 꺼버리고, 팔을 포개 그 위로 얼굴을 묻었다. 이러는 것도 벌써 한 달이 넘었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여름도 물러가고 어느덧 10월의 초입이다. 연습장 귀퉁이엔 어김없이 끄적거린 낙서가 있었다. 박지훈. 박지훈. 박지훈. 모의고사에서 마주한 30번 문제보다 더 어려웠다. 무어가 정답인지 알려줬으면 좋겠다. 단단히 꼬여버린 이 관계는 여기서 이렇게 접근해서 이렇게 풀어나가면 된다고. 해설강의가 500분이어도 들을텐데. 왜 인생사엔 모범답안도 풀이과정도 없는건지.
연습장을 팔락이며 깨끗한 면을 펼쳤다. 허리를 똑바로 세우곤 두꺼운 형광펜으로 제목을 적었다. 30번 문제 분석.
장점 1. 마음 고생 안해도 된다.
장점 2. 나를 제일 잘 아는 사람이 나랑 사귀는거니까 잘 맞을 수도 있다. ...안 맞을 수도 있지만.
장점 3. 박지훈을 더 당당하게 부려먹을 수 있다. ...지금도 잘 부려먹지만...
시발. 이게 뭐야. 형광분홍색으로 큼지막하게 가위표를 쳐놓곤 아래부분에 다시 숫자를 매겼다.
단점 1. 걔랑 남들이 하는 것처럼 연애 하는거 존나 어색할거다.
단점 2. 솔직히 걔랑 나랑 맞는게 뭐가 있냐. 존나 싸울거다.
단점 3. 싸우면 그거 풀고 할 때 진짜 힘들 것 같은데.
단점 4. 가족끼리도 다 알아서 헤어지면 존나 큰일이다.
단점 5. 집도 위아랜데 진짜 헤어지면 이사부터 준비해야 할지도 모른다.
단점 6. 헤어지면...
거기까지 쓰고 잠시 멈췄다. 헤어지면. 헤어지면 진짜 어쩌지. 사귀지도 않았는데 그런 걱정이 먼저 들었다. 함께 한 시간이 너무 길다. 모르긴 몰라도 걔와 함께 한 시간을 내 인생에서 도려내본다면 1/3 정도는 우습게 잘려나가지 않을까.
붙박이장 가장 안 쪽에 수납된 어릴 적 앨범은 걔랑 나의 공동 소유였다. 프레임마다 같이 담겨있었던 우리를 반 갈라서 넣어놓는 것도 우스웠다고, 엄마가 그랬다. 그래서 두꺼운 앨범을 하나 사다놓고, 어린 나와 박지훈이 낮잠을 자는 동안 지훈이네 어머니랑 우리 엄마랑 나란히 붙였다고. 뒤집기를 하고, 걸음마를 하고, 유치원에서 재롱잔치를 하고, 초등학교에서 운동회를 하고… 고등학교 입학식 사진을 끝으로 한동안 사진은 붙지 않았다. 붙일 사진이 없던 게 아니라 사진을 붙일 앨범 페이지가 없었다. 어느덧 앨범의 마지막 페이지였다. 500쪽이 넘는 두툼한 앨범을 공동 소유한 우리가, 얼굴조차 대면하기 어려운 사이가 되어버리면 어쩌지. 내 19년은 나만의 것이 아니었는데. 그 반쪽이 휑하니 떨어져나가면 어쩌지.
야트막한 도랑물을 앞에 두고 망설였다. 폴짝 넘으면 넘어갈 수 있는 너빈데, 넘어가자마자 강물이 불어나 다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도랑물 앞에 앉아 시덥잖게 작은 돌멩이를 퐁당퐁당 던져보는 중이었다. 건널까. 말까.
[ 가자.]
어느새 한 시였다. 박지훈의 문자에 답장도 않고 가방을 싸서 1층으로 내려갔다. 걔는 가방을 앞으로 매서 너른 등판이 다 보였다. 내가 선을 넘어버리면, 헤드락 대신 백허그를 하는 날이 오면, 그 끝은 어떻게 되는 걸까. 머리가 복잡했다.
경각심이라도 갖자 싶어서 사다두었던 디데이용 달력은 멈출 줄 모르고 팔락팔락 넘어갔다. 어느덧 보름 남았다. 수능이. 최저만 맞추면 붙을 것 같은 수시가 꽤 됐다. 평소처럼만 봐야지, 하면서도 그게 안될까봐 걱정이 됐다. 날이 지날수록 스트레스가 온 몸을 꽉 막아버려서 공연히 문제집이 눈물로 얼룩졌다. 십구년 살면서 이렇게 긴장되고 무서운 순간을 만나 본 적이 없었다. 마음이 너무 답답해서 속시원히 울고 싶은데 울 시간도 아까웠다. 새벽녘이 되어서도 잠 못드는 나를 어떻게 알았는지 박지훈이 문자를 보냈다.
[ 창문 열어봐.]
평소같았으면 공부해야 한다고 철벽 쳤겠지만 3시간에 6문제 풀고 있던 중이라 군말없이 창문께로 갔다. 길게 하얀 실이 내려와있었다. 그 끝엔 종이컵. 피식 웃음이 터졌다. 창문을 열자 찬바람이 훅 끼쳐서 후리스를 껴입고 실전화를 잡았다. 초등학교때나 했었지, 깜빡 잊고 있었다. 우리 이렇게나 많은 걸 공유했던 사이였지, 참.
- 아아, 들려?
" 응. 들려. 왜 불렀어?"
- ... 그냥. 싱숭생숭해서.
" 니가 웬일로 안 자고?"
- 나 요새 잠 줄었어.
" 수능이긴 한갑다. 천하의 박지훈이 새벽 두시에 멀쩡하고."
- ... 방금까지 졸다가 깼어.
큭큭 거리며 웃자 녀석도 말없이 웃었다. 찬바람 맞는게 기분 좋아서 방충망도 열고 난간에 기댔다. 새벽 공기가 시원했다. 윗층을 슬쩍 올려다보니 박지훈은 엎드려 있는 모양이었다.
" 이거 옛날에 만든거지. 니가 그린 하트 있다. 하여간 옛날부터 글씨는 드릅게 못 써가지구."
- 공부 안 돼서 방정리 하다가 찾았어. 오랜만에 생각나서.
" 응..."
- 너 또 이러고 기죽어있을까봐.
" 뭐가."
- 너 원래 뭐 중요한 일 앞두고 있으면 스트레스만 엄청 받고 뭐 혼자 풀지도 못하잖아.
... 실전화를 귀에서 살짝 뗐다. 얜 역시 날 너무 잘 알아.
" 너는 좀 괜찮아?"
- 나는 뭐. 니 몸 걱정이나 해. 맨날 새벽까지 안 자잖아.
" 알겠어."
- 오늘은 그냥 일찍 자. 집중도 안 돼지?
" 너 무슨 씨씨티비 달았냐? 뭘 이렇게 잘 알아. 소름 돋아."
- 19년 같이 지내다보면 텔레파시 정도는 껌이지.
이상한 일이었다. 박지훈이랑은 아주 시덥잖은 이야기만 했을 뿐인데 마법처럼 안정이 됐다. 별 일을 목전에 두고 별 일 없단 듯 얘기했다.
수능 끝나면 뭐 할까? 바다 보러 갈까? 당일치기로 기차여행 갔다오자. 하루는 만화책방에서 살면서 만화책만 실컷 보자. 그 다음날엔 피씨방엘 가자. 난 게임 싫은데. 그럼 크레이지 아케이드나 하든가. 그리고 일주일 내내 치킨을 시켜먹자. 브랜드 다 다른걸로. 품평회 하는거지. 너랑 치킨 어디꺼 시킬지 싸우는 것도 이제 질렸어. 너야말로. 네네치킨 작작 먹어. 질리지도 않냐.
그 날밤엔 깊은 잠을 잤다. 꿈도 없는 깊은 잠이었다.
-
어느 덧 디데이였다. 평소보다 조금 이르게 집에서 나왔다. 엄마가 꼭 안아주는 바람에 눈물이 날 뻔 했는데 꾹 참고 내려왔다. 울면 머리 아프니까. 1층 현관엔 어김없이 박지훈이 기다리고 있었다. 수능 한파다 뭐다 티비에서만 들었는데 올해도 어김없이 추웠다. 박지훈은 중무장을 했다. 추위를 많이 탄다나 뭐라나 혼자 한겨울이었다. 목도리에 장갑에... 하여간 오바는 혼자 다 떤다. 아파트 단지를 나와서 같이 택시를 타기로 했다. 박지훈이 배정 받은 학교가 내 고사장 바로 근처 남고였다. 수능날은 같이 못 가겠다, 싶었는데 운이 좋았다.
" 오늘 끝나고 뭐해?"
" 엄마아빠랑 밥 먹고 집에서 잘거야."
" 그럼 나랑 불꽃놀이 축제 보러 가자. 오늘 밤이래."
" 헐, 갈래!"
엘레베이터에 나붙었던 안내문이 이거였나보다. 눈을 반짝이며 오케이를 하자, 박지훈이 나를 슬쩍 내려다보면서 웃었다. 그래. 가자.
배시시 웃는 걔의 얼굴은 평소와 같은데 내 두근거리는 마음은 평소와 달랐다. 요 며칠내내 이랬다. 아니, 이런지도 꽤 됐다. 언제부턴가 어느 순간의 박지훈을 보면 심장이 쿵쿵 거렸다. 그 표정은 하나같이 일관성이 없어서. 뾰로퉁하기도 했고, 무표정하기도 했고, 바보같이 멍때릴때도 있고, 이렇게 웃을때도, 인상을 찌푸릴때도 있어서 무어라 단정짓진 못하겠지만. 언제부터였더라. 고개를 숙이고 그 시기를 골몰하는데 박지훈이 내 손을 꽉 움켜쥐었다. 스킨십은 많았지만, 이런 식의 접촉은 처음이라 눈에 띄게 놀랐는데 박지훈은 태연했다.
" 차도야. 앞 좀 보고 걸어."
그리고 팔을 휘저어가며 택시를 잡았다. 대목이라 그런지 빨리 잡혔다. 택시 타는 내내 아까 잡았던 손이 불에 데인 듯 화끈거렸다. 맨손 잡은 것도 아니고 그냥 장갑낀 손인데. 장갑이랑 손 잡았다고 생각하면 되잖아, 정신 차려... 내 심정과는 관계없이 차는 빈 차로를 씽씽 달려 내 고사장에 먼저 도착했다.
" 야.. 나 간다."
" 어. 시험 잘 보고. 마음 편히 먹고. 모르는 건 4번. 언제 만날지 문자 남길게."
" 응. 너도 잘 봐라. 틀릴거면 아는 거 틀리지 말고 모르는 거 틀리구."
먼저 뒤를 돌고 학교로 걸어가다 힐끔 뒤를 돌아봤다. 택시는 벌써 콩알만해졌는데 창문 밖으로 흔드는 손만 또렷했다. 그래서 택시가 사라질 때 까지 봤다. 사라지고 나서도 그 자리에 못 박힌듯 섰다가 이내 빙글 돌아 고사장으로 들어섰다. 아침에 집을 나설때보단 훨씬 가벼워진 마음이었다. 고사장으로 향하는 언덕으로 느릿느릿 발걸음을 옮겼다.
-
십년이면 강산이 바뀐다던데, 십년하고도 이년을 더 학교에 다녔다. 고작 이 하루. 이 수능을 위해서. 집에 무슨 정신으로 왔는지 모르겠다. 걸어가면 꼬박 40분이 걸리는 거리인데 생각도 정리할 겸, 바람도 쐴 겸 해서 집까지 걸어갔다. 가방은 가벼웠다. 몇 십시간을 공들여 필기하고 닳을때까지 쳐다본 노트만 있어서 그랬다. 채점할때가 되면 또 떨리겠지만 지금은 그냥 후련했다. 아무 생각도 안 들고, 그냥 이제 다 끝났구나. 하는 해방감만이 느껴졌다. 집에 도착해서는 가족톡방에 메세지를 남겼다. 저녁 내일 먹을까? 오늘 피곤해서 그냥 쉬고 싶어. 몇 분 되지 않아 그러마 하는 답이 도착했고, 교복도 벗지 않고 침대에 쓰러져 몇 시간을 내리잤다. 잠에서 깨어난 건 그로부터 몇 시간이 지나서였다.
" 딸. 깨워서 미안. 근데 지훈이한테 전화가 자꾸 오네."
잠투정을 부리다가 박지훈 이름에 눈이 번쩍 뜨였다. 미친. 불꽃놀이. 시계를 보니 벌써 열시 반이었다. 나도 이렇게 오래 잠들지 몰라서 누구한테 언질도 안 한게 문제였다. 원래 잠귀 밝은데 부재중 전화가 열 세통이나 올 때까지 몰랐다. 걔만 보면 자꾸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좀 예쁘게 차려입고 나가려고 했는데 꾸밀 시간도 없었다. 볼캡을 눌러쓰고 부랴부랴 휴대폰이랑 지갑만 챙겨서 나갔다.
[ 아홉시부터 시작이래. 그 때 축제장에서 만나자.]
[ 전화 받아아아ㅏ아ㅏ아ㅏ아ㅏ]
[ 확인했어?]
[ 지금 식사 중?]
[ 설마 자는 거 아니지?]
택시비가 약간 부담되는 거리긴 했는데 급한 마음에 택시를 무작정 붙잡았다. 택시를 타고 나서야 한숨 돌리며 쌓여있는 문자에 답장을 할 여유가 생겼다.
[ 진짜 미안. 나도 이렇게 오래 잘 줄 몰랐어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 지금 가는중이야. 택시 탔어. 아 진짜 미안해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아저씨 빨리요. 재촉하면서 문자를 연달아 보냈다. 이내 답장이 왔다.
[ 천천히 와. 근데 불꽃놀이는 다 끝났다. 어쩌지.]
[ 아 진짜 미안해... 나 병신 새끼 진짜 왜 잤냐.... ]
[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러게. 긴장 다 풀려서 그런가보다.]
진짜 진짜로 미안해서 사과를 열두번쯤 하고 나니 어느덧 축제장에 도착했다. 택시비를 내고 올라가는 길 내내 가로등만이 켜져 있었다. 노점상들이 있었던 건지 주변에 일회용품들이 굴러다녔다. 어디 쯤에 있는지도 몰라서 지나가며 전화를 걸었다. 수화음이 몇 번 가기도 전에 알아챘다. 저기 멀리 보이는 가로등 아래 선 남자애가 박지훈이었다. 전화를 끊고 곧장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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걔가 보이지 않을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택시 기사 아저씨가 찬바람 들어온다고 타박했지만 고삼이라 응원해줘야 한다고 샐샐 웃으며 둘러댔다. 차창 밖으로 빼두었던 손을 도로 무릎에 나란히 올려뒀는데 왼쪽 손이 파르르 떨렸다. 화끈거리는 귀를 털모자가 가려줘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떨려. 혹시 어색해보였으면 어쩌지? 너무 뜬금없다고 생각했을까? 아 그냥 손 말고 팔 정도만 가볍게 잡을걸. 너무 오바했지?
오늘이 디데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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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드트럭 같은거 있길래 너 먹을만한 거 사놨는데. 다 식어버렸다. 집에서 데워먹어."
봉지를 건네는 걸 얼결에 받고 진짜 미안하다며 다시 사과했다. 아, 진짜 내가 생각해도 나 너무 쓰레기... 알람이라도 맞췄어야지.
" 아, 괜찮아. 근데 너 좋아하는 불꽃놀이 못 봐서 어떡하냐. 너 그냥 집에서 잤지? 집에서도 못 봤겠네?"
" 응... 요새 계속 피로 쌓여있던거 한번에 몰려왔나봐."
" 수고했어."
" 너도."
나란히 가로등 아래를 좀 걸었다. 딱히 볼 일도 없고 무슨 할 말도 없는데 누가 짠 듯이 그냥 걸었다. 그냥 이거 지금 먹을까? 나 저녁 안 먹었어. 얘기하면서 봉지를 뒤적거리자 근처의 벤치를 가리켰다. 나란히 앉아서 봉지를 풀었다.
" 요새 푸드트럭에 이런거 파냐? 웬 스테이크?"
" 따뜻할때 먹으면 더 맛있었을 텐데."
" 괜찮아. 나 찬 거 잘 먹어."
말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면서 고기를 야무지게 찍어 먹었다. 박지훈은 그런 나를 조금 보다가 주변을 둘러보다가 밤하늘에 시선이 멈췄다.
" 별 진짜 많다."
먹던 나도 하늘을 올려다봤다. 주변에 뭐가 없어서 그런지 진짜 별이 많았다. 서울에 별이 이렇게 많은 것도 처음 보지, 싶었다.
" 그러게. 별 진짜 많네."
그렇게 잠시 말이 없었다. 서로 할 말이 차고넘치게 많았다. 너무 많으니까 오히려 한 마디도 꺼낼 수가 없었다. 그럼 끝도 없이 터져나올 것 같았다. 열 일곱 여름엔, 열 넷 겨울엔, 열 여섯 졸업식엔 너 대체 왜 그랬던 거냐고. 답은 모두 하나로 귀결될게 뻔한 그런 질문들만 잔뜩 터져나올 것 같았다.
" 주학년 데뷔조 들었대."
" ... 아 진짜?"
" 내년 여름에 데뷔한다던데."
" 아..."
" 걔 옆반에 그 여자애 있잖아."
" 너한테 고백했던?"
" 어 걔. 걔 옆학교 남자애랑 사귀던데. 니가 그렇게 받아주라고 타박했는데."
" 그러게. 다들 그렇게 쉽나봐. 그땐 너 아니면 죽을 것처럼 굴더니."
" 너 옷 오늘은 좀 괜찮네."
" 형섭이가 골라줬어."
" 잘 했어. 안형섭 나중에 밥 한끼 사줘야겠네."
" 내 돈으로 내가 산건데 왜 안형섭이 너한테 밥을 얻어먹냐."
" 아니, 니가 사야지."
시간은 흘렀다. 정작 중요한 말은 속에 가두고, 상관없는 얘기만을 했다. 수능도 끝난 열아홉 우리에겐 남는 게 시간이고 없는 게 할 일 이었지만, 보랏빛을 넘어 짙은 남색이 되어가는 하늘을 언제까지 바라보기만 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결단이 필요했다.
" 야 박지훈."
" ... 어?"
" 나 왜 불렀어."
" ..."
" 할 말 있잖아, 너."
결단이 필요했다. 박지훈은 잠깐 얼을 뺐다가 벤치에서 일어나서 몇 발짝 멀어졌다. 입술을 혀로 적셨다. 긴장하면 나오는 버릇이었다. 맨날 입술 튼다고 하지 말라고 했는데 또 저러지.
" 아 진짜 이게 뭐야... 오늘이 디데이였는데."
원인 제공자인 나는 할 말이 없었다.
" 너는 어떻게 들을지 모르겠어. 근데 난 가볍게 하는 말 아냐."
" ..."
사람도 없고 고요하기만 한 공원은 비장감마저 돌았다. 때마침 밤바람이 불어서 나뭇잎들이 찰랑거리는 소리가 났다.
' 나 너 좋아해.'
순간이었다.
불꽃놀이 행렬에서 이탈했던 마지막 불꽃이 하늘로 쏘아올려진건.
하늘로 발사된 빨갛고 노란 빛은 굉음과 함께 하늘에서 부서져 내렸다. 박지훈이 흐릿하게 웃었다. 그 모습이 꿈꾸는 것처럼 예뻤다. 몇 백 갈래로 쪼개져 하늘을 밝힌 마지막 불꽃놀이와, 열 아홉 짝사랑이 함께 막을 내린 순간이었다. 폭죽음에 그 애의 목소리는 정확히 들리지 않았지만 입모양은 또렷했다. 나 너 좋아해. 내가 아는 박지훈은 이 한 마디를 하려고 거울 앞에서 오백번은 연습했을 애라. 연습하기 전엔 오천번 정도 꿈에서 이 장면을 시뮬레이션하고, 꿈에서 보기 전엔 나를 보는 매 순간에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삼켜냈을 애라.
나는 겁이 많았다. 두려운 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불확실한 감정에 모든 걸 내거는 건 두렵다. 과거 현재 미래까지 뒤흔들 관계의 변화도, 여전히 두렵다.
그런데 이제 와선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다.
나도 널 좋아하는데.
" 나도."
나도 좋아해, 박지훈.
박지훈은 놀란 표정이었다. 내가 담담한 것도 놀랐을테고, 나 역시 좋아한다고 하는 것도 놀랐을테다. 잘 숨겼다고 생각했냐. 그렇게 마음을 흘리고 다녔으면서.
" 미안해."
알면서도 모른 척해서. 내가 감당할 상처가 무서워서 네 마음을 모른 척 했다. 네 속이 곪아가는 걸 가장 가까이서 빤히 바라보면서. 차라리 이렇게 속만 태우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했다. 두번 다시 못보는 것 보다야 애끓는 게 나으니까.
" 이제 집에 가자."
손을 잡아챘다. 아침엔 박지훈이 잡았던 손이었다. 박지훈은 여전히 얼떨떨해보였다. 너 진짜 나 좋아하는 거 맞아? 나 농담 아니야. 진지한 눈으로 그러기도 했다. 너 때문에 수능 앞두고 몇달씩 고민했으니까 닥쳐라. 내 대꾸엔 귀만 발갛게 물들이고 아무 말도 못했다.
" 이거 꿈 아니지."
" 뺨 때려줘?"
" ... 아니네."
십구년동안 기를 쓰고 외면하려 애를 써왔던 감정의 실체였다. 그렇게 갖은 맘고생을 하고 나서야, 비로소 직면할 수 있었다. 한참을 돌아갔지만 그럼에도, 결국 이렇게라도 돌아갈 종착점이었다. 나는 벌써 강을 건너버렸고, 이제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순 없다. 그래도 여전히 옆에 박지훈이 있으니까. 믿어보기로 했다. 박지훈을, 그리고 내 선택을.
그 해 열아홉의 여름은 무더웠다. 걸을때마다 땀이 흘렀고, 초코바가 녹았으며, 그 애의 눈빛도 따가웠다. 그동안 꽁꽁 감춰오던 마음을 내비쳤다. 무심하게, 아니 어쩌면 전력으로. 같은 마음을 가지고도 끝이란 게 무서워서 말도 못했다. 그래서 서로를 못 본 척, 못 들은 척. 속이 까맣게 타들어가고, 더 이상 태울 마음도 남아있지 않을때까지 끈질기게 괴롭혔다. 그랬던 우리가 이제 새로 다가올 스물을 바라본다.
열아홉, 아름다운 나이를 뒤로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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