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런 소리를 하면 열에 아홉은 비웃었다. 그리고 열명 중 남은 한 명은 정세운이였다.
내가 그런 말을 할 때마다 정세운은덤덤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홉명의 사람들은 더 심하게 갤갤대며 나를 비웃었다.
정세운이 그럴리가 없잖아, 정세운이 너를 왜? 다들 그런 반응이였고, 나는 장난인 척 납득하는 척 술을 들이켰지만 사실 알고 있다.
정세운이 나를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
2. 나를 좋아하는 너에게
우리는 사실 초면이 아니다.
몰랐는데 정세운과 나는 초등학교 때 동창이였다. 초등학교 때 분명 정세운은 나를 몰랐던게 확실했다. 그도 그럴게 정세운은 다른 지역에 살다가 5학년 때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로 전학을 왔고, 짧게 다녔던 2년의 시절 마저도 정세운과 내가 같은 반이였던 적이 없었다. 그 시절의 나는 학교가 끝나면 집까지 빠른 걸음으로 달려가거나, 반에 친했던 남자애들과 그 시절 한 참 유행하던 온라인 게임을 하러 피시방을 다녔고, 정세운은 본인 피셜 운동장에서 축구를 했다고 했다. 정세운 본인은 게임과는 그렇게 인연이 깊지 않다고 한다.
사실의 사실을 거듭하면 거의 초면과 다름 없는 사이가 맞다.
하지만 나는 지금 정세운과 꽤 절친한 사이가 됐다. 공유한 추억이라고는 지금 폐교되기 일보 직전인 촌구석 초등학교 밖에 없는 사이가? 어떻게? 라고 묻느냐면 임영민을 이유로 들 수 있겠다.
임영민, 나이 23세, 드립커피를 내려 마시는 걸 좋아하는 남자이고.
좋아하는 건 '나'다.
이건 확실하다, 아까도 확실했지만.
왜냐하면 임영민은 내 남자친구 이기 때문이다.
-8년의 짝사랑은 사람을 18년으로 만든다.-
정세운 /임영민
모든 일은 12살 그 시절로 돌아간다.
나는 그 시절 정세운을 알고 있었다. 부스러기 같이 생긴 애가 전학을 왔다고 온 학교가 들썩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른 반이였지만 학년마다 반이 3개 밖에 없었던 콩알만한 학교 였기 때문에 누가 전학이라도 왔다고 하면 학교가 떠내려가라 그 아이를 보러 다니고 그랬다. 당연히 나는 친구들과 팔짱끼고 정세운을 보러갔고 나는 너무나 당연한 것 처럼 정세운에게 반했다.
부스러기는 무슨? 잘생겼는데? 나만 잘생겼냐?
떠들고 다니기는 나만 그렇게 떠들고 다녔지만 아마 그 시절 정세운을 좋아한 여자애가 반에 8명 정도는 됐었을게 확실하다. 그래서 나는 정세운에게 더 침바르고 다녔다. 정세운 내꺼니까 넌 옆반 준영이나 좋아해. 라고 직접 말한 적도 있었다. 그래서 내가 그 여자애 펑펑 울렸었는데 왜 그랬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온 학교에 소문이 퍼졌다. 내가 정세운 좋아한다는 거. 그럴만도 했다. 그렇게 떠들고 다녔는데 모르는게 눈새였다. 그치만 난 정세운에게 고백하지 못했다.
내가 정세운에게 고백하는 꿈과 정세운이 나에게 고백하는 꿈은 수도 없이 꿨지만 정세운만 보면 입이 얼어서 정세운 얼굴조차 제대로 쳐다본 적이 없었다.
그 시절 정세운은 생긴 것과 걸맞게 소문과는 멀어 보였고 진짜 축구를 열심히 했다, 그래서 내가 자기를 좋아한다는 소문을 아는건지 마는건지 공만 열심히 차대는 뒷통수를 야속하게 바라보다가 맨날 반 남자애들과 피시방 가서 오다리를 잘근잘근 뜯었다.
물론 게임 닉네임을 'spdnsdlS2'로 하는 건 잊지 않았다.
spdnsdl의 뜻은 '세운이'를 그대로 영어키로 치면 저렇게 된다.
그렇게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했고, 정세운은 다시 전학을 갔다. 정말 펑펑 울었다. 2년동안 쌓아온 마음은 꽤 컸다. 중학교 내내 정세운 생각만 하면서 살았다. 나도 내 짝사랑이 이렇게 오래 갈 줄은 몰랐는데 그냥 길 걷다가도 문득 문득 정세운의 생각이 났다. 중학교 1학년 때 까지는 정세운이 보고 싶어서 많이도 울었었다. 그렇게 중학교가 끝나갈 무렵 안물안궁 근황 및 허세 늘어놓기 대잔치를 하는 것만 같은 일명 SNS라는 것이 돌풍처럼 흥행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당시 SNS는 인생의 낭비라며 발을 들이지 않았지만 고등학교에 들어와 어쩌다보니 시작하게 됐다. 그때까진 솔직히 거의 정세운을 잊고 살았다.
추천 친구에 '정세운' 그 이름이 뜨기 전까진 말이다.
그 이후로 내 하루 일과는 정세운의 타임라인을 염탐하는 것으로 끝났다.
정세운은 페이스북을 열심히 하지는 않았다. 그 점 조차 마음에 들었다. 근데 좀 활동 해줬으면 싶었다. 가입하고 사진 덜렁한 장 올려놓고 아무것도 안하는 건 너무하잖아. 가뭄같은 떡밥에 말라가고 있을 때 쯔음 정세운의 생일이 다가왔고, 쏟아지는 축하글들에 나는 우울했다. 나도 생일 축하한다고 말하고 싶은데, 말하는 대신 찌질하게 정세운을 축하해주는 사람들의 프사를 눌러 보기 시작했다. 겁나 이쁘네, 누구야 잘생겼다, 그렇게 염탐술을 차차 발전시켜 가는 도 중 깨달은게 있었다.
정세운은 핵 인싸라는 거.
분명 초등학교 시절에는 바람불면 날라가기 2초전의 부스러기 같았는데 언제 이렇게 인기가 많아진걸까, 절망스러웠다. 그때도 인기가 많긴 했는데 이정돈 아니였단 말이다. 그렇게 눈물을 흘려대는데 새로 뜬 글이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정세운 ㅇㅇ대 꼭 가라ㅋㅋ~ 생축ㅋㅋ~~!'
ㅇㅇ대? 이름은 들어본 대학이였다. 여기가 세운이가 가고 싶어하는 대학인 걸까, 나도 여기 가야지! 하고 마음 먹은건 내 고등학교 3년 생활을 아주 좆같이 만들어줬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이름 들어본 대학 가는게 이렇게 좃나 힘든 일 일줄은 꿈에도 상상 못했다. 그렇지만 난 해냈다. 머리가 영특한 편은 아니라 밤 잠 존나 줄여가며 공부했더니 가능한 일이였다. 공부하면서 제일 많이 든 생각인데 '분명 난 이정도로 정세운을 사랑하지 않는데?' 였다. 물론 난 그렇게 정세운을 사랑한 적 없다. 로맨스 영화에 나오는 진득한 사랑, 지독한 사랑 그런 거 아니고 그냥 초등학교 시절 여학생의 마음에 그냥 좋아했던 것 뿐인데 그럼에도 난 공부를 멈출 수 없었다. 딱히 그 대학이 아니면 가고 싶은 대학이 생각나지 않아서 그랬다. 그렇게 입학한 학교에 정세운은 없었다.
혹시나 해서 과팅도 존나 나가보고 없는 친화력 끌어모아 교양시간에 친해진 친구들에게 같은 과에 혹시 정세운 있냐고 물어보지만 그런 애 없다고 한다.
철판 깔고 학교앱에 익명으로 게시글까지 올렸다. '편의점 앞에서 정세운 군의 민증을 주웠는데 우리 학교에 정세운 군있으시면 연락 주세요!' 연락은 당연히 없었다.
정세운은 페북 계정을 삭제했다.
정세운, 쳐도 나오지 않는 이름에 나는 절망했다. 페북친구추가 할 걸, 페메걸어서 번호 물어볼 걸.
나는 정말 그 날 밥맛이 없어 저녁을 걸렀다.
그리고 아침을 2공기로 시작하며 칼을 갈았다.
진짜 나 내 이상형 있으면 바로 고백한다고.
고백이 뭐야 프로포즈 한다고.
그랬던 내 스무살에 등장한 새로운 남자는 같은 과 선배 임영민이였다. 다소 설레게 생긴 이름에 얼굴은 더 설레게 잘생겼다. 얼굴이 작거나 어깨만 넓어도 좋은데 둘 다 하는 임영민 때문에 여러 여학우들은 정신 못차렸다. 하지만 유독 임영민이 더 인기가 많았던 이유는 성격 조차 좋았기 때문이였다. 사람을 가리지 않는 고른 성품과 다정함, 우직함에 남녀 상관없이 임영민은 인기가 많았다.
나도 임영민을 좋아했었다.
잘생겼고, 사람 대 사람으로 괜찮은 사람이였으니까.
그래서 임영민에게 고백했다.
술먹고, 전화로.
그것도 남에 전화를 빌려서.
다소 최악의 고백이였다.
그때를 돌이키자면 정말 정신없이 이뤄진 일 이였다. 동기 여자애들하고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당연스럽게 임영민 얘기가 나왔다. 호불호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호감인 임영민 이야기가 나오자 애들을 앓으며 영민오빠, 영민선배, 심지어는 영민아…, 까지 나왔었다. 나는 소주잔을 입에 털어 넣으며 깔깔댔다.
"그냥 고백해~."
미쳤냐? 부끄럽잖아, 그런 동기들의 말에 "뭐가 부끄럽냐? 영민선배 같은 사람은 진짜 지금 놓치면 평생 후회한다." 그런 말을 하면서 뇌리엔 정세운이 스쳐지나갔다. 괜히 소주잔만 꾸욱 쥐었다.
"그럼 니가 해보던가."
낄낄대며 제 핸드폰을 건네는 동기에 이를 갈았다. 이미 머릿속은 오랜 시절 묵혀뒀던 정세운이 점령하고 있었다. 나는 동기의 핸드폰을 받아들어 영민선배를 연락처에서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눈에 보이자 바로 눌렀다. 술김이라고 어물쩍 대기에는 아직 소주 3잔 밖에 마시지 않았다. 술기운 전혀 아니고 맹정신으로 감행했던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애들은 다들 흥미진진한 눈으로 지켜봤다. 아마 임영민이 내 고백을 받아줄 리 없을 거라고 확신했나보다.
-어,ㅇㅇ아 웬일이야 이시간에..?
자다 깬 듯 늘어지는 목소리에 내가 대답했다.
"영민선배, 저 ㅇㅇ 아니고 이름인데요."
-어? 아, 이름이? 왜?
"선배 저랑 사귀어요."
-뭐?
"사겨요 저랑.. 사겨요."
내 고백에 동기 애들 입은 쩌억 쩌억 벌어졌다. 야 미친년아, 이리내놔, 하고 전화기를 도로 가져가려는데 내가 손에 힘주어 그랬다.
"사귀자구요, 싫어요? 나 진짜 선배 놓치기 싫은데."
-어, 어어….
"싫어요? 진짜?"
-그래,
-사귀자.
그 이후로는 기분 넘 좋아서 소주 2병 마시고 필름 끊겼다.
-
그리고 다음 날 눈떠보니 왠 생판 처음보는 집 천장이였다.
처음엔 어디 친구집 인 줄 알고 쩌억쩌억 갈라지는 입술을 침으로 축이며 눈도 못뜬 채 휴대폰을 찾았다.
[잘 들어갔냐 미친년아?]
2시간 전에 온걸로 보이는 문자에 답장을 톡톡 쳤다.
[ㅋㅋ나 지금 일어남..여기 누구집이지.]
내가 보낸 문자에 답장은 개빠르게 왔다.
[어디긴 시발 영민선배네 집이겠지.]
[?]
[?????뭐 시발? 왜?]
[아니 씹 잠시만.]
[ㅋㅋ기억안남? 너 어제 존나 만취해서 내 남친 영민이 부르자고 존나 난리쳐서 영민선배 불렀더니 영민선배네 집 가자고 니가 존나 난리쳐가지고 영민선배 존나 난감하게 너 데려감ㅋㅋ]
[아 미친년아 왜 안말렸음......왜...]
[설마 영민선배가 너한테 뭔 짓 할까 싶어서ㅋㅋ 왜? 설마 너 지금 ㅎㅌ이야..?]
[닥쳐 일단은 가정집이고 어제 고대로 옷 다 입고있음.]
그렇게 답장하고서 배개에 얼굴 팡팡 쳐박았다. 미쳤다 나새끼. 왜 사냐 진짜...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으나 정말 어제 기억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는다. 가만히 코쳐박고 있으니 훅 끼쳐오는 임영민 선배의 샴푸 냄새에 벌떡 일어났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제서야 영민선배가 문에 붙혀놓은 포스트잇이 보였다.
[이름아, 나 9시 수업이라 갔다가 11시에 온다! 여긴 내가 지내는 하숙집이고 우리 진짜 어제 아무일도 없었으니까 걱정하지말고,
나랑 해장하러 가자, 도망치지말고 가만히 방 안에 있어!]
미쳤다.
아 시발.
아..
시발..
포스트잇을 몇 번이나 읽다가 머리를 뻑뻑 쳐댔다. 시간은 벌써 11시였고 하숙집과 학교의 거리는 대략 10분 정도 였으니 도망칠 시간은 충분했다. 나는 대충 가방을 들고 하숙집을 살금살금 나왔다. 도망치지 말라고 했지만 도무지 도망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하숙집 대문을 딱 나오는데 걸렸다.
"도망치지 말라니까."
임영민에게.
-
그렇게 그대로 붙잡혀 해장국집에 이끌려 왔다. 여기 진짜 맛있어, 사람좋게 웃어보이는 영민선배를 따라 애써 ㅎㅎ, 하고 웃었다. 나는 끌러가는 내내 어법법, 어, 아, 음,,으으음, 이런 멍청한 소리를 냈다. 그리고 자리에 앉고 나서야 고개를 푹 숙이고 입을 열었다.
"저, 선배…."
"왜 선배야?"
"으응? 네?"
"어제는 영민아, 임영민, 그랬잖아."
롸?
아 씹,씹,씨발.
나는 빠르게 사과했다.
"아 진짜, 정말 죄송해요 제가 진짜 어제 일은 하나도 기억이 안나서..제가 그런게 아니라 저의 제2의 자아가 그런거였어요..진짜.."
"아니, 난 영민아, 라고 불러주는게 좋은데."
임영민은 또다시 눈을 접어 웃으며 스텐리스 컵에 물을 줄줄 따랐다. 플라스틱 물통에 붙은 소주광고 속 해맑은 여자 연예인이 나를 비웃는 것 같았다.
"그 , 제가, 어..음.."
"그럼 어제 나한테 고백한 것도 제 2의 자아가 그런거야?"
"네? 아뇨 그때까지는 제가 진짜 멀쩡했는데,"
저도 어디서 그렇게 가버린 건 지...생각이 잘...
근데 그게 궁금해요? 왜?
변명하다 말고 말을 멈추고 영민 선배를 바라봤다. 영민 선배는 먼저 채운 물컵을 나에게 스윗하게 내밀어 줬다. 나는 일단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럼 우리 사귀는 거 맞는거지?"
"네? 네?? 선배 그래도 돼요?"
"응, 난 좋은데."
좋아요? 왜?? 어제 내가 어땠는지는 잘 기억 안나지만 보나마나 포획당한 멧돼지 꼴로 굴었을 게 분명한데?
혹시 반어법일까 싶어서 기웃기웃 영민선배 얼굴을 살피니 영민선배가 베시시 웃었다. 진짜 끝장나게 잘생겼네, 쿵 떨어지는 심장을 매만지며 영민 선배에게서 시선을 내렸다. 영민 선배가 좋다는데 나따위가 뭔 태클이야, 그래 우린 사귀는 거야. 존나 시발 오늘부터 1일 그런거라고. 이 순간이 꿈이라면 제발 깨지 말아주세요. 나는 속으로 염불을 외우며 손으로는 핸드폰을 만지작 거렸다.
"그리고 우리 말도 놓자."
"…네?"
"니가 영민아, 라고 불러주는거 진짜 듣기 좋아서."
영민의 그런 모먼트는 나를 정신 못차리게 했다. 나는 한 참을 어버버 , 거리다가 네에-.아니 으응..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영, 영, 염미나, 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부르자 영민 선배가 푸스스 웃었다. 진짜 이쁜 사람이다. 왜 인기 많은지 알 것 같아. 해장하러 와서 심장 털리는 게 벌써 몇 번째인지 아득했다. 주문했던 해장국이 나오고 나는 코쳐박고 먹기만 했다. 영민선배, 아니 영민이 얼굴보면 심장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았다.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을만큼 만신창이였던 오장육부에 일단 뜨거운 국물을 우겨넣으니 내장이 활동을 시작했다. 이제야 좀 몸구석 구석이 돌아가는 느낌이다.
입이 좀 풀려 이런 저런 얘기를 했다. 처음엔 어색했는데 이제는 반말이 더 편했다.
"영민아 근데,"
"응."
"나 어제 뭐 실수 한 거 없었지요..?"
"음, 응 뭐 크게 없었어."
"아…."
임영민은 되게 사람을 편하게 만들었다. 만난지 최소 4개월은 된 사람처럼 굴었다. 근데 뭐랄까, 표정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아 보였는데.
마침 진동이 울리고 나는 발신자를 확인했다. 어제의 술친구이자 오늘 아침에 문자를 나눴던 그 친구였다.
[야 뭐함?]
[야 나 지금 영민선배랑 해장하는 중이당.]
[미친. 미쳤네..진짜 사귀기로 했냐?]
[그럼 가짜 사귀기로 하냐~!]
[아 시발 재수없는 년ㅠ 아 시발 내가 고백할 걸ㅠ]
진심으로 질투하는 친구의 문자에 킥킥 웃었다. 하긴 진짜 이 친구가 고백 했다면 지금 이 자리에 이 친구가 있을 지도 몰랐다. 확실히 나라서 받아준 느낌은 아니지. 괜히 뒤숭숭한 마음에 눈만 힐끗 들어 영민이를 쳐다봤다. 근데 왠지 다른 기분으로 뒤숭숭하다. 이 자리가 내가 아니라 내 친구로 채워졌을 가능성도 충분 했을 것에대해 이상한 것이 아니라, 그런 상황이 펼쳐진 것에 대해 크게 기분 나쁘지도, 상심하거나, 질투하지도 않는 내 자신의 처연한 태도에 뒤숭숭 했다. 아직 1일이라 그런 걸까, 내가 임영민이랑 사귄지 1일 밖에 안됐으니까 당연한 걸까?
바라본 영민이는 묵묵하게 해장국의 콩나물을 씹고 있었다. 문득, 아 존나 귀여워 사진 찍어 내 배경화면으로 박제하고 십네;; 속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실행으로 옮겼다. 더 이상 생각만 하기엔 존나 지쳤기 때문이다.
착칵-
하자 영민이 고개를 휙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헤헹, 하고 바보처럼 액정을 보고 웃자 영민이가 그제서야 상황파악을 했는지 뭐야아.. 했다. 늘어지는 목소리도 존나 귀여워 호호, 사진을 확인하니 눈을 내려 콩나물을 우물우물 씹고있는 영민이가 보였다. 눈을 내리깔고 채소를 씹는게 왠지,
"약간 알파카 닮았,"
그 말을 하자 임녕민이 씹던 콩나물을 꿀떡 삼키더니 득달같이 말을 붙여온다.
"너도 내가 앞파카 닮았다고 생각해?"
"어? 어 좀 닮은 것 같ㅋ,ㅎ,ㅋㅋ"
똘망똘망한 눈을 하고 물어오는 영민에 웃음이 터졌다. 알파카 발음이 안돼서 앞파카 라고 하는 것도 웃겼다. 그래 나랑 임영민이 즐거우면 됐지 괜히 이상한 의문으로 기분 잡치지 말자 싶어 뒤숭숭한 맘을 접으려는데 한번 더 울리는 핸드폰 진동에 핸드폰을 내려다 보았다.
[근데 정세운이 누구냐?]
그렇게 나는 들고있던 숟가락을 떨어뜨렸다.
-
[정숭ㄴ?]
[정세운?]
[애?]
[왜?]
[내가 뭐 햇냐/]
[내가 뭐했냐? 내가 뭐랬어?]
결국 답장 없는 친구에게 참다 못해 전화를 걸었다. 친구는 금방 전화를 받았다.
-아 답장 치고 있었는데 성질하고는..
"야! 정ㅅ..!"
문득 정세운을 내뱉으려다가 마주편에 앉은 영민이 걸렸다. 흘끔 눈을 돌려 영민을 보자 역시 나를 열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영민이에게 '잠시만 통화 좀..!' 하고 외친 후 해장국집을 뛰쳐나왔다. 정세운 이름 세글자 내뱉으면서 이렇게 눈치봤던 적이 없었는데. 물론 대부분 혼자있을 때 부르짖던 이름이였지만.
"정세운이 왜????"
-오호~ 예! 뭐 있긴 있구나? 정세운이 누군데?
"내가 뭐라고 했는데?"
-너 어제? 너 어제 그냥 존나 정세운, 정세운 보고ㅍ다 정세운, 정세운 불러줘 정세운~ 이 난리 쳤잖아.
"아...아ㅏ...하..시발.."
-누구야? 전남친? 너 모솔이라며.
"아 시발 그런거 아냐.....정세운은.."
정세운은 내, 첫사랑이야.
그렇게 마음 속으로 먼저 인정하는 순간 해장국으로 쌓아올린 든든한 속내가 또 우중충 무너져 내렸다. 그만 전화 끊고 들어가서 임영민이나 보고싶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헉 맞다, 나 어제 그럼 영민이 앞에서도 그랬어? 정세운 타령 했어?"
-영민이? 미쳤냐? 벌써 말텄냐?
'웅, 아니 임녕민 앞에서도 그 난리 쳤냐고."
-내가 어케 알아 영민선배한테 물어봐.
"……."
-개년, 존나 부럽네 진짜..
"…ㅎ."
그렇게 난 전화를 끊고 다시 해장국 집 안으로 들어왔다. 영민선배의 시선이 나를 따라 이동했다. 존나 귀여운 알파카 자식아.. 그런 눈으로 보지말아줘 죄책감 드니까. 나는 자리에 털썩 앉았다. 이상하지, 전화 빨리 끊고 들어와 영민의 잘생긴 얼굴이나 좃나 들여다보고 싶었는데 막상 그러질 못하겠다. 그냥 빨리 집가서 자고싶다. 아니 자기전에 좀 쳐울다 자고싶다. 오랜만에 꺼낸 정세운의 기억에 너무 곰팡이가 피어 있어서. 그런데도 그걸 버리지 못하는 다 자신이 등신에 3류 같아서.
"있잖아요, 나 어제…."
"……."
"…아니다, 다 먹었어? 그만 가자."
내 말에 영민은 남은 밥을 긁어먹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전화하는 사이 계산한 건지 영민이는 해장국집 이모에게 인사하고 먼저 가게를 나섰다. 나는 그를 따라 나서며 그랬다.
"…미안, 내가 오늘은 속이 진짜 안좋아서 일단 집에 가봐야 할 거 같구, 음, 내일 연락 할게요."
"음, 그래."
그렇게 우리는 음, 음, 거리다가 헤어졌다. 그리고 그 날 저녁 영민에게 전화가 왔다. 조금 긴 통화를 하다가 잠 들었다. 대화 내용은 딱히 중요한 내용은 아녔다. 그런데도 재미있어서 서로 깔깔대다가 평소에 자던 시간을 훨씬 넘겨 잠들었다.
급한 감이 있지만, 그렇게 1년이 지났다.
내 스무살은 빨랐다. 안그래도 빠른데 임영민 때문에 더욱 더 빠르게 지났다.
우리는 학교에서 유명한 커플이였다. 임영민 자체가 원래 유명한 사람이였어서 우리가 유명한 커플이 되는 건 당연한 일 일지도 몰랐다.
1년 동안 정말 행복했다. 사랑을 한다는 것 자체로도 행복한데 그 사람이 영민이란 사실은 자꾸만 나를 미쳐 날뛰게 했다. 그리고 어른답게 진도도 수월하게 다 나갔다. 키스도 했고, 잠도 잤고, 사실 내가 스킨쉽을 좋아해서 매달렸지만, 어쨌든 그렇게 우리는 남부럽지 않은 사랑을 했다.
그리고 이제 나는 정세운의 기억을 아무렇지 않게 열람할 수 있다.
그냥 그 시절 오래 좋아했던 소년, 으로 그렇게.
이제 더이상 페북에 정세운을 쳐보지도 않았고, 그의 이름을 꺼냈다고 심장이 쿵 내려앉지도 않았다.
누가 더 좋냐고 물어보면 당당하게 임영민이 좋다고 외칠 수 있었다.
외칠 수 있었다.
그런 줄 알았다.
-
그 날은 총회가 있는 날 이였다. 얼굴을 처음 마주하는 신입생 들이였다. 우리 과는 대략 100명을 웃도는 과 였고 그래서 그런지 총회를 위해 빌린 대형강의실은 가득 찼었다. 한 명씩은 시간이 너무 걸리니 열명씩 무대앞에 나가서 자기소개 간단하게 하라는 명령에 신입생들은 우루루 열을 맞춰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와 영민선배는 총회장소에 조금 늦게 갔었다. 그 날은 비가 왔었고 멍청하게 주변 카페에서 이 비가 그치지 않을까, 기다리다가 늦었다. 사실은 그냥 영민이 품에 안기다시피 기대어 흠뿍 젖어 네온사인들을 더욱 번들번들하게 반사하고 천둥으로 혼잡해진 세상을 바라보는게 재미있었다. 어쨌든 영민이가 뛰어갔다와 사온 편의점의 싸구려우산을 사서 걸음을 급히 해 총회 장소에 왔다.
나는 2학년들이 모여있는 자리로 가고, 영민이는 3학년이 모여있는 자리로 갔다. 무대와 바로 가까운 맨 앞줄만 비워놓고 뒤는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나는 대충 맨 앞줄 끝자리에 앉으며 우산을 대충 옆에 눕혔다.
"아, 차가,"
작게 터지는 소리에 나는 우산 옆을 확인했다. 주루룩 줄을 선 신입생들의 발의 주인의 발목에 물방울 두어개가 얹혀 있었다.
"어, 죄송합니다."
고개를 드는 순간 , 나는 천둥이 치고, 내 세계가 혼잡해지는 걸 느꼈다.
그러니까 즉 재대로 망했다, 라고.
그 곳에 다른 누구도 아닌 정세운이 있었기 때문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