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때 축구부 소속이었던 영민은 현재는 H대학의 경영학과의 잘 나가는 인재였다.
물론 그건 H대학에서나 통하는 거였지만. 제 머리를 무지막지하게 쓰다듬으며 편의점 들렸다 가. 하는
동진의 말에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편의점을 들어가다 유리에 비치는 제 머리를 본 영민이 앞서 문을 열고 들어간 동진을 보다
한숨을 쉬었다. 동진은 제 고등학교 시절 축구부 선배였다. 부산에서 서울로 인서울하고 보니 익숙한 이름으로 연락이 왔다.
차일피일 미루던 약속이 오늘에서야 성사된 셈이었다. 형, 형이 사는거죠.
영민은 편의점 주류 코너로 가 맥주를 고르고 서 있는 동진을 보며 혀를 끌끌 찼다. 오지랖은 넘쳐도 이렇게 술에 사족을 못 쓰는 인간이 될 줄이야.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마른 안주쪽으로 눈을 돌리던 영민이 손에 잡히는대로 대충 안주를 쓸어담자 동진이 뒤에서 또 영민의 머리통을 때렸다.
"아, 형!"
"왜, 인마. 네가 사는 거 아니라고 그러냐. 나 가난한 복학생이야, 짜식아."
영민이 억울한 듯 목소리를 높이다 그새 발걸음을 돌려 카운터로 향하는 동진에 혀를 쯧 찼다.
영민은 저 역시 손에 쥐고 있던 마른 안주를 들고 동진의 뒤를 따랐다.
"어...선배?"
"뭐야...성이름이네. 너 여기서 알바했냐?"
"네..보시다시피. 뭐 그렇게 됐어요."
"너 이번 방학 때도 안 내려가나보네."
"네, 어차피 방세도 그대로 줘야 되고 해서 안 가기로 했어요. 돈이나 벌죠, 뭐."
이윽고 들리는 동진의 목소리에 영민이 그저 아는 사람인가 보다, 하고 진득히 기다리면 오지라퍼 김동진, 어디 안 간다고
그새 처음 보는 사람한테 제 이름까지 알려주며 대리통성명을 하고 난리도 아니었다.
'아, 여긴 고등학교때 내 후배. 임영민.'
영민아, 인사해라. 아, 너네 동갑인가. 친하게 지내던가.
아, 이 형. 진짜.
대뜸 만나자마자 동갑이니 친하게 지낼 것을 종용하는 무심한 제 고등학교 선배의 말에 영민이 여직까지 동진에게 가려 보이지 않던
여자에게 머쓱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임영민입니다."
"어, 안녕하세요."
여자는 편의점 로고가 크게 새겨진 조끼를 입고서 저를 향해 인사를 했다.
그건 지금 생각해보면 여자와의 첫만남이었다.
-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의도치 않게 통성명을 하며 영민이 여자를 향해 눈을 돌렸을 때 이윽고 마주친 눈은 곧 접혀들어갔다.
영민은 저도 모르게 여자에게 물어볼 뻔 했다. 어디 가서, 예쁘단 소리 안 들어요? 하고.
그 뒤로도 일회성 만남으로 끝이 날 줄 알았던 동진과의 만남이 이어지고. 동진과의 만남이 이어지자
여자와의 만남도 이어졌다. 그건 영민이 가장한 우연이었다.
'형, 칙칙하게 남자끼리 이게 뭡니까.'
'뭐, 인마. 그래서. 여자라도 부르라고?'
'아니, 뭐. 말이 그렇다는거죠.'
동진과 호프집에 나란히 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던 영민이 입을 뗐다. 형은, 왕따도 아니고. 무슨.
그 말에 동진이 영민의 등을 아프게 치곤, 어쭈. 임영민. 많이 컸다. 했다.
저 원래 컸는데요.
그 말에 혀를 차던 동진에게 전화가 온 것이 영민이 잡은 우연의 시작이었다.
동진이 뜨끔한 표정으로 핸드폰 액정 너머에 뜬 이름을 살피다 아, 큰일났네. 하며 신속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뭐하는거에요, 형.
제 말에 동진은 제게 냉큼 핸드폰을 던졌다. 얼떨결에 전화를 받아들자 동진이 전화 좀 받아라, 나 화장실. 했다.
잡을 새도 없이 쌩하니 도망가는 동진의 뒷꽁무니를 눈으로 쫓던 영민이 이미 터치가 된건지 통화가 이어지고 있는 전화를 넘겨받았다.
"선배?"
"어,안녕하세요."
"아? 누구. 이거 김동진 휴대폰 아닌가요?"
들려오는 목소리는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목소리여서 영민은 휴대폰을 고쳐잡았다.
"아, 형. 화장실 갔는데."
"...진짜 맞아야 정신을...아, 조별과제 피피티 선배만 저한테 안 주셨거든요."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다부진 목소리에 영민은 귀를 기울였다.
생각났다.
그때, 그 목소리였다.
"아, 그런가. 미안, 미안."
"...왜 그쪽이 사과를 해요?"
영민이 저도 모르게 터진 말에 제가 내뱉고도 황당해하고 있을 그 시간 여자는 터진 웃음소리를 내뱉으며
시원하게 말했다. 선배한테 오늘 열두시까지 피피티자료 안 주면 무임승차로 이름 뺄거라고 전해주세요.
"..아, 어. 네."
"그때 그 분 맞죠? 음, 임. 임 뭐더라."
"임영민."
"아, 그거다! 아무튼 선배한테 말 좀 잘 전해줘요."
여자는 보기보다 더 발랄했나보다. 제 할말을 다 하자 미련없이 끊긴 휴대폰을 멍하게 내린 영민이
제 볼을 머쓱하게 긁어댔다. 간지러워.
목소리도 시원시원하네.
고작 두번. 심지어 이번엔 얼굴을 본 것도 아니었는데.
영민은 어쩐지 제게 말하던 여자의 행동이 상상되어 버렸다.
여자의 통통 튀는 말투도.
이건, 그러니까.
관심의 시작이었다.
이쪽을 보며 눈치를 보고 있던 동진이 테이블로 돌아오자
영민은 형, 무임승차. 이름 뺀답니다. 하고 여자의 말을 고대로 전달했다.
아, 나 그거 이번에도 F뜨면 진짜 답 없는데.
형, 내가 도와주면 내 부탁 하나 들어줘요.
진짜냐? 뭔데. 뭔데.
"번호요."
"누구 번호 말하는거야."
테이블 위로 엎어지는 동진의 철부지같은 소리에 영민은 혀를 쯧 차곤 제 손목시계를 보며 일어섰다.
"아까 전화 온 걔, 전화번호 좀 줘요."
"...뭔 뚱딴지 같은 소리냐."
"같은 경영학과니까 비슷하겠죠. 과제 도와준다니까. 걔 번호 달라고요."
"성이름 번호?"
"네, 걔 번호요."
"뭐냐, 관심있냐? 오~ 우리 영민이, 드디어!"
동진이 제게 어깨동무하며 저를 꾹꾹 찌르자, 영민은 미련없이 그를 털어내곤 다시 말했다.
"아, 진짜 입방정 그만 떨고 좀."
"과제 도와주는거다?"
"알겠으니까, 번호."
"어디가 마음에 들었냐, 대체."
동진의 장난스러운 목소리에 영민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부터 알아보려고요. 번호 이거 맞죠."
영민이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써봤어요(총총총)
자급자족이라...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