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날씨가 좋았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더위가 잠시 도망이라도 간 듯 적당히 따뜻한 날씨에,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한. 게다가 올 초부터 우릴 끈질기게 괴롭혀오던 미세먼지 수치도 좋은, 그런 완벽한 날씨.
날씨만 좋은 게 아니라 나에게 특히 좋은 날이기도 했다. 누구에게나 가끔 찾아오는, 일어날 때부터 일이 잘 풀리는 그런 날이었기 때문에. 적당히 이르게 눈이 떠졌고, 씻는 동안 콧노래가 나올 만큼 기분이 상쾌했으며, 화장도 잘 먹었고 고른 옷도 마음에 들었다. 버스도 정류장에 도착하자마자 탔고, 가는 내내 길이 막히지 않아 금방 내리기까지 했다.
땅에 다시금 발을 내딛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햇살이 쏟아졌다. 기분 좋은 바람이 뺨을 스친다. 어쩐지 좋은 예감이 들어 가볍게 걸음을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보이는 갈색 머리통에 괜히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확실히, 좋은 날이었다. 미끄러지는 일 없이 술술 풀리는 날.
그리고 그런 완벽한 날에 나는, 내 오랜 친구를 만난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왔나.”
오랫동안 짝사랑 중인, 친구를.
SIGNAL
“빨리도 온다. 둘이 데이트라도 하고 오냐?”
“데이트는 무슨. 들어오기 직전에 만난 거야.”
카페로 들어서면서부터 잔뜩 투덜거리는 김재환을 밀고 안쪽 소파자리로 들어가 앉았다. 맨날 지각이야, 이건. 야, 오늘은 약속시간 맞춰 왔거든? 아닌데, 2분 늦었거든? 어린애들이나 할 법한 말들로 유치하게 투닥거리고 있자니 앞자리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슬쩍 곁눈질해 내 앞으로 온 이가 누군지 살폈다. 어차피 앞자릴 차지할 사람이 누구일지 알고 있으면서도, 그냥.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으니까.
“밍기적대지 말고 빨리 좀 앉지, 좀.”
“아, 거 참을성 드릅게 없네. 앉을 기다.”
“꼴 봐라. 어제 잠 못 잤냐?”
“좀. 어제 늦게까지 연습 하고 동선 맞추고 해갖고.”
늘 그랬듯 앞자릴 꿰찬 다니엘이 습관처럼 영양제를 입에 물었다.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 신경이 쓰여 대화를 나누면서도 녀석을 계속 흘끔거렸다. 잠을 못 잤다는 말이 사실인지 멍한 얼굴을 하곤 메신저 답장이라도 하는지 휴대폰을 만지작댄다. 저럴 시간에 그냥 쉬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시 쳐다보자 녀석이 시선을 느꼈는지 잠시 고갤 들었다가, 눈이 마주치자 장난스럽게 눈을 키웠다.
“주말이라고 힘 준 거 봐라. 뒤에 약속 있나.”
“웬 약속. 그런 거 없거든요.”
“근데 이렇게 입고 왔어? 난 또 소개팅 나가는 줄 알았네.”
민현의 말에 괜히 시선을 피했다. 그냥, 뭐. 오늘 날씨 좋길래. 간단히 얼버무리며 웃어보이자 재환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깐족댄다. 만날 사람도 없으면서 뭘 저렇게 꾸미고 왔대. 누구한테 잘 보이려고.
누군지 다 알고 있으면서 저런 말이 나올까. 오늘도 사람 놀리기에 도가 튼 재환을 잠시 째려보곤 슬쩍 흘리듯 입을 열었다. 그냥, 누가 잘 봐주면 좋잖아.
와, 누가 니 번호 따갔음 좋겠나. 금세 다 먹은 모양인지 팩을 구겨 쓰레기통에 버리며 다니엘이 말했다. 지 들으라고 한 말인 줄도 모르고 속 편하게 저런다. 말을 말아야지, 싶어 일어났다. 뭐 마실래, 하고 묻는데 금세 커다란 손이 팔목을 붙든다. 동시에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갔다 올게.
“다니엘이 간대, 그냥 앉아 있어.”
괜히 잡힌 손을 내려다보았다. 옆에 앉아 있으니 당연한 소리지만 민현이다. 뜬금 없이 왜 위하는 척이람.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앞에서 재환도 거들었다. 그래, 제일 바깥에 앉은 놈이 갔다 와야지.
왜 이런대, 얘네? 자연스레 날 앉히는 힘에 얼결에 자리에 앉으며 앞을 쳐다보니 이미 저만치 가 주문을 하고 있는 너른 등이 보인다. 별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버릇처럼 입술을 꾹 물었다. 일어난 김에 같이 좀 가지. 눈치 1도 없어, 다들.
금세 울린 진동벨 소리에 곧장 일어난 녀석이 트레이를 가져왔다. 니는 딸기제? 그렇게 물으며 내 앞으로 놓아준 스무디를 입에 물었다. 분명 나는 메뉴를 읊어 준 기억이 없다. 다른 애들 건 그냥 아무거나 시켰으면서.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의식적으로 내리려 애썼다. 아직 마시지도 않았는데 입 안이 달다. 기분 좋게 한 모금 마시며 고개를 들었는데, 눈이 마주친 재환이 뿌듯한 얼굴을 했다. 다니엘이 내 음료를 말하지 않아도 주문해온 게 꼭 제가 못 가게 말린 공이 크다는 것처럼. 누가 보면 강다니엘 기억력 테스트, 라도 하는 줄 알겠네. 황당한 가설에 헛웃음이 나왔으나 굳이 입 밖으로 꺼내고 싶지 않아 고개를 끄덕였다. 일어날 때부터 몇 번이고 생각했던 말을 입 안으로 굴려본다. 확실히, 오늘 좋은 날이야.
잠깐 정신을 판 사이에 이야기 주제가 넘어간 건지, 잘 놀고 있는 둘 사이에 어느새 녀석도 쏙 끼어들어 왁자하게 떠드는 모습이 보였다. 알아듣지도 못할 게임 용어가 난무하는 게,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어 한참 남은 스무디만 휘휘 저으며 가끔 흥미로운 척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저들끼리 하는 이야기의 반은 동아리 얘기거나, 게임 이야기라 별로 흥미는 없었지만 예의상 반응은 해야 했다. 안 그럼 김재환 삐치니까. 한참 떠드는 녀석들을 슥 훑어보다 언제나처럼 그랬듯 앞에 앉은 다니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하얀 손이 살랑이는 걸 멍하니 보고 있자니 빨갛게 상처가 올라온 손끝이 보였다.
"또 다쳤어?"
내 물음에 잠시 고갤 돌린 녀석이 어깨를 으쓱인다. 그런갑네. 대수롭지 않단 듯 뱉는 말에 혀를 찼다.
날카로운 거 만질 일도 없으면서 어디서 다쳐 왔대. 매번 상처를 달고 오니 근원지가 어딘지 좀 궁금해졌지만, 어차피 물어 봤자 녀석도 모를 게 뻔하다. 고갤 절레절레 저으며 익숙하게 밴드를 꺼내어 녀석의 손가락에 감아주었다. 따지고 보면 이렇게 밴드 가지고 다니는 것도 7할 정도는 다 얘 때문이려나. 의미 없이 밴드 끝을 꾹꾹 누르며 손가락만 매만지고 있자니 웃으며 애들과 잘만 떠들다가도 흘끔 손을 바라보던 녀석이 다시금 시선을 옮기며 제 손 위로 얹어진 내 손을 꾹 쥔다.
익숙한 스킨십에 심장이 떨리는 건 내 쪽이다. 먼저 손댔으면서, 지는 건 꼭 나지. 그래도 손을 놓고 싶지 않아 잡힌 상태 그대로 녀석의 상처를 어루만졌다. 하얗고 기다란 손가락이 보기 좋았다. 마디마디가 약간 분홍빛을 띠는, 핏줄이 선 남자다운 손이 내 손을 덮었다. 간지럽다, 가시나야. 어느새 턱을 괸 채 투덜거리는 녀석의 말투가 느른하다. 그 목소리에 더 간질거리는 마음은 모르고.
곰 같은 게 매번 이렇게 훅 들어오니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녀석의 앞에서 할 수 있는 거라곤 아닌 척 시선을 돌리는 것뿐. 어쩌다 이렇게 됐지, 나.
기계적으로 컵에 맺힌 물방울을 훑어내던 손길이 잠시 멈췄다. 갑작스레 찾아온 의문점이 뺨을 두드린다. 그러고 보니, 언제부터였지?
내가 얠 어쩌다 좋아하게 되었더라. 사실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애초에 취향을 따질 것도 없이 그저 편하고 웃기고 멍청할 만큼 둔한 친구였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완벽한 을이 되어 있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답 없이 빠진 걸까. 천천히 그 순간을 찾아 머릿속을 잠시 뒤졌다. 금세 눈앞을 꽉 채울 만큼 떠오르는 순간이 많아져 정신이 혼미해진다.눈을 꾹 감았다 뜨고 고갤 휘휘 저었다. 그러니까...
‘뭐고, 그기.’
‘보면 모르냐.'
‘설마 몰라서 물어봤겠나. 그거 와 하는 긴데.’
‘몰라, 나도. 친구들이 하자고 부추겨서 하긴 하는데... 별론가?’
‘아니. 함 더 해 봐라.’
잘 추네. 귀엽다.
어설프게 안무를 따고 있는 날 보며 의외로 정말 귀여워하는 얼굴을 한 채 칭찬해줬던, 고등학교 축제 연습 때부터였나. 아니면,
‘준비 다 됐제?’
‘걍 우리끼리만 재밌음 된다. 잘 하고 오자.’
다 같은 신입생인 주제에, 평소랑 다른 차림을 하고선 무대 아래서 넉살 좋게 웃으며 제 팀원들을 다독이는 모습을 봤을 때부터? 음, 그것도 아닌가. 그럼...
나도 모르게 이 끝으로 꾹꾹 누르던 스트로우를 문 채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 녀석이랑.
거짓말처럼 둘만 남겨진 기분이 들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분명 테이블을 감싼 분위기는 떠들썩한데, 다른 것들은 전부 차단하기라도 한 것처럼 꼭 그랬다. 피하지 않고 바라보는 녀석의 시선이 어쩐지, 약간 아래로 내려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언제부턴지 모를 시선을 내게 던지던 녀석이 손을 뻗어왔다. 나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니는 얼굴로 스무디 먹나.”
아.
이거였다.
뭘 이리 묻히고 먹는데. 얼라도 아이고. 입술께를 훑으며 녀석이 말을 뱉는다. 따뜻한 손가락이 지나간 자리가 데인 것처럼 뜨거웠다. 불씨가 옮겨 붙은 것처럼, 귀 끝이 확 뜨거워진다. 보지 않아도 벌겋게 달아올랐을 테다. 아무렇지 않게 제 손 끝을 혀로 훑은 녀석이 다시금 시선을 돌려 휴대폰을 만지작거린다. 그럴 수도 있지, 애써 덤덤한 척 눈을 내리깔며 모난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는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사력을 다해 멀쩡한 척 굴었지만, 더는 녀석을 쳐다볼 수가 없어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뭐라도 하는 척 손을 몇 번 놀리니 금세 닿았던 시선이 떨어진다. 그제야 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거였다. 녀석이 좋은 이유. 익숙한 일들이 익숙하지 않게 하는 것.
사실 출발점을 찾는 건 의미가 없었다. 순간순간을 떠올리기도 힘들 만큼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왔으니까. 그 긴 시간 동안 녀석이 꾸준히 스며들어 크기를 키운 거였다. 고작 스치는 한 마디에도 어쩔 줄 모르고 기대할 만큼.
그저 얼굴에 손이 좀 닿았을 뿐인데, 밖에서 한참을 달린 것마냥 심장이 요동친다. 스무디라도 속에 들이부어야 진정될 것 같아 다시금 스트로우를 입에 물었다. 그래도 웃음을 숨길 수 없는 게, 확실히.
유난히 좋은 날이었다.
누군가에게 한 번 더 빠지기 좋은, 그런 날.
.
네 다니엘한테 하루하루 치여서 현생을 망치는 게 억울해서 망상을 좀 해 봤읍니다... 쓰고 보니 뭔 내용인지 모르겠네요 하하
필명인 피치 핑크는 다니엘 하면 떠오르는 색이라서 좀 갖다 붙여 봤습니당. 굳이 저를 부르신다면 피치라고 불러 주심 좋을 것 같아요!
나흘 뒤면 다니엘을 볼 수 있네요... 기쁜데 무섭고... 보고 싶어서 눈물이 퐁퐁 나는데 저만 그런 건 아니겠죠 8ㅅ8
보잘것 없는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글을 읽고 계시는 모든 분들 피치 나잇, 피치 드림! 그리고 녜리처럼 좋은 하루 보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