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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혜곡초등학교 2학년 6반의 담임이다. 그리고 학교가 끝나고 나면 학교 뒷골목에 있는 꽃집 문을 연다. 고등학생 때 알바가 지금까지 이어진 것이다. 누군가가 고등학교 때부터 알바로 해 왔던 일을 왜 지금까지 하고 있느냐 묻는다면 어렸을 때부터 해 왔던 일이기도 하고, 또 여기 꽃집에 아직도 잎사귀들과 함께 숨쉬고 있는 것만 같은 그 애와의 아름다운 봄 내음 추억들이 내 마음 속 가득히 차있기 때문이라고 말해둘 수 있다.
그리고 그 누군가가 그 애는 누군데? 하고 다시금 되묻는다면, 하고 싶은 말은 많겠지만 난 그냥 그에게 '복숭아를 닮은 빛나는 아이였어요.' 라고만 하고 싶다. 복숭아를 닮은 하얗고 말랑한 얼굴도 있었지만, 음악밖에 몰랐던 미성년 시절 쑥맥 하성운에게 독서와 공부 말고 새로운 감각을 주었던 아이였기 때문이다. 아무튼, 나 혼자만 간직하고 싶으니까 그렇게만 말하고 다니겠다. 게다가 그 애는, 그냥 남자애도 아니고....
돌아온 봄날 마주친
남선생
.男先生
RESC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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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화초들에 각각 물을 주느라 오래 구부려 있던 탓에 아려오는 허리를 두드리고 있으면, 어느샌가 꽃밭에서 놀고 있던 동네 아이들은 옆에서 나름 응원을 한다. 너도나도 내 어깨하며 다리, 허리에 고사리 손을 올리고선 그 고운 목소리로 힘내라는 식의 말들을 건네는데, 이럴 때마다 귀여워 죽는다. 선생님 하길 잘했다 생각하면서.
"제비선샌님 힘내여!"
"맞아! 이거 우리가 해드릴까여?"
"그래! 제비쌤, 이거 관린이가 다 한대여!"
"아 내가 언제! 나 혼자 한다고 안했거든 유선호?"
"에이, 자자 그만! 선호랑 관린이랑 화해하고. 선생님 들어가서 일해야 되니까 너희들 오늘은 집에 가도 돼."
"네에, 선샌님!"
어린 난 공부만이 그 애를 되찾아 오는 길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렇게 몇 년이 지나 내가 나왔던 초등학교의 음악 선생님으로 다시 이 동네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렇게 지내면서 쉬는 날이나 수업이 일찍 끝나는 날이면 나의 어린시절이 배어 있는 꽃집으로 괜히 발걸음을 옮기곤 한다.
첫사랑에 빠져 허우적대던 순수한 열아홉부터, 아홉 살배기 산골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는 스물다섯의 젊은 남선생님이 될 때까지. 아주머니와 아이들과 꽃집은 마치 내 기억 속 교복을 입고 있는 이름인 마냥 나를 정답게 반겨주고 있었다. 그리고 슬슬 교복을 벗은 선생 티가 제법 나기 시작할 무렵에, 나의 기다림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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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반장 인사!"
"차려엇, 선생님께 경례!"
"제비 선생님! 오늘은 진짜 제비 누나 올까여?"
"쌤! 근데 그 누나 예뻐여?"
음, 그럼 나는 장난스레 턱에 검지를 대고는 괜히 궁리하는 척을 한다.
"아, 안 돼! 쌤 빨리 기억해 봐요!"
아, 내가 오늘은 진짜 대답 들을 줄 알았는데!
개구쟁이 선호가 아쉬운 듯 짧은 머리를 쥐어뜯는 시늉을 했다. 그게 퍽 귀여워 하하 웃고 있으면 형섭이가 옆에서 옷깃을 잡아끌며 새침하게 말한다.
"선생니임, 그럴 게 아니라 지금 꽃집에 가요."
"그래,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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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아주머니 오셨네요?"
"성운이 왔구나."
"손님 왔었지. ...오랜만이더라. 마냥 귀엽더니, 처녀가 다 됐어."
"아시는 분 오셨어요?"
그 애는 몇 년 동안을 내게서 사라져 있었으면서, 거짓말처럼 한순간에 다시 내게 숨막히게 밀려온다. 있을까, 없을까. 그 애와 다녔던 길을 되짚으며 숨이 차도록 달렸다. 항상 가던 꽃밭에도, 꽃집 뒤편의 학생 때 비밀 아지트라 부르던 오래된 평상에도 없었다. 불안해지기 시작한 내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어디가 어딘지 제대로 분간하지 못할 즈음에 이르렀을 때. 생각지도 못한 곳과 마주했다. 기억 속 그 곳.
"...어."
그 곳에는, 그 애와 나의 학창시절 추억이 가득한 학교가 있다.
내 몸은 이미 정문을 지나고 있었다. 항상 완장을 차고 장부를 든 채 등교하는 아이들을 죽 훑어보던, 선도부장이었던 열아홉의 하성운을 회상해 본다. 이름이가 오지 않았던 날마다 1교시 종이 칠 때까지 정문도 닫지 않고 무작정 기다렸었지. 지금 상황과 비슷한 듯하다. 언제 올까. 난 아직도 너와의 추억이 바로 어제 일인 듯 생생한데, 넌 날 기억하고 있을까. 나는 2년 동안, 정문을 열고 기다리고 있는 셈이었다.
번뜩 아이들 생각이 난다. 설마 여기 있을까, 싶어 항상 가던 운동장으로 향했다.
남선생
"그래서여, 누나?"
"제비 선샌님이 뽀뽀했어여?"
"..제비 선생님?"
제비 선생님.
아이들이 이십오 살 노총각이라며 첫 부임 날 내게 붙여준 별명이었다. 설마 했는데, 여기 있을 줄이야. 안도의 한숨을 쉬며 얘들아! 하고 뛰어갔다.
"음... 그래서 성운이가 어떻게 했냐면."
"...어? 제비 선샌님!"
"........."
"잘 있었어, 성운아?"
수많은 군중들, 그리고 그 속엔 내가 그토록 보고 싶었던, 그 애가 거짓말처럼 거기 서 있었다.
"사실 한국 온 지는 좀 됐어...바로 못 와서 미안해. 아까 꽃집 가서 아주머니 만나고 옛날 생각나서 이리로 왔는데, 아이들이 있는 거야. 애들 얘기하다가 들었는데, 담임 선생님이 하성운 선생님이라고.."
".........."
"보고 싶었어."
"..........."
"...왜 말이 없어, 구름아? 고개 좀 들어 봐-"
"얘, 고개 좀 들어 봐."
"넌 항상 내가 먼저 하게 만들어."
고백도 먼저, 속마음 얘기도 먼저, 애정표현도 먼저.
"그리고, 찾는 것도 먼저."
"............"
이제, 다시 갈 거야?
그건 왜?
그냥...가지 마. 나 힘들었어.
내가 물으니까 그 애가 장난스런 웃음을 지으며 대답한다. 해사했던 그 웃음만은 내 기억 속 그 모습과 전혀 달라진 것이 없다.
" 성이름, 이틀 연속 지각이야. 넌 내가 어떻게 해 줘야 지각을 안 할래, 응?"
"네가 키스해 주면!"
낙서가 새겨진 너의 책상에 복숭아빛 벚꽃이 피면,
나는 너와 같은 말을 할 거야.
"옆에, 앉아도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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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서 반가워."
가까이 다가간 내가 살며시 속삭이자 귓바람이 불었는지, 볼을 발갛게 물들이며 움츠리는 모습이 예쁘다.
"....복숭아다. 진짜 복숭아야."
"응. 나야, 복숭아."
늦봄을 가득 머금은 두 잎이, 다시 맞물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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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학생이 생각보다 댓글이 많이 달려서 놀랐어요...ㅎㅎㅎ 컴퓨터 문제로 글 간격이 넓어서 가독성이 조금 떨어질 수 있는 점 죄송합니다. ㅠㅠ
이번 편은 성운이를 주인공으로 한 남학생의 후속 '남선생' 입니다. 어린아이들과, 꽃과, 찬란한 첫사랑과 성운이의 조합이 너무 예쁠 것 같아서 즐겁게 쓴 글이에요. 사실 두 글의 연관성을 강조하기 위해 이어지는 디테일을 많이 넣어봤는데 제목 위 소제목에서 남학생은 여름날에 마주쳤다면, 성운이는 봄날에 '다시' 마주친 것도 있고요. 글에서 시간의 흐름이 열아홉과 스물 다섯인데 남학생에서의 아줌마와 남학생 우진이의 나이입니다! 이런 조그마한 디테일 너무 좋은 것 같아요. 읽으면서 봄 느낌이 많이 났으면 좋겠습니다!
다음 편은 상,중,하로 나뉘어진 중편을 써볼 예정입니다. 남학생, 남선생과는 분위기가 조금 다를 것 같아요. 기대해주세요!
아 그리고 전 편에서 암호닉 신청해 주신 99님 감사합니다!! 저 완전 놀랐어요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