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부산에서 올라온 프듀대학교 의예과 18학번 신입생 이여주입니다!" 꿈만 같았다. 고등학교 2학년 초반까지 내 인생에 '의사'라는 단어가 들어올 줄 모르고 칠렐레팔렐레 놀던 내가, 무슨 바람이 들어 갑자기 의대에 가고싶어졌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목표를 너무 늦게 잡은 탓인지 내 성적과 내 목표사이의 갭은 너무도 컸고 나는 자주 슬럼프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피터지게 공부해야할 고3 때, 나는 덕질에 미쳤었고 결국 그 중요하다던 6월 모의고사를 시원하게 말아먹었다. 이 때까지만 해도 난 내가 정말 의대를 갈 수 있을지 상상도 못했다. 수시 원서를 쓸 때, 모두가 말렸지만 난 상향으로 모두 의예과로 지원을 했고 정말 미친듯이 공부했다. 결국 하늘이 도와, 운좋게 수능대박이 나서 최저를 맞추고 서울권 대학 의예과에 문닫고 들어왔다. 지금 그래서 무슨 상황이냐고? 나는 지금 신입생 환영회에 와있다. 지방에서 올라와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이 공간에서 선배들 앞에 서서 자기소개 중이다. "오오-" "너 부산에서 왔어? 야 임영민! 얘 부산에서 왔대!"
"반갑다,야- 나도 고향 부산인데!" "아, 진짜요? 하하-"
"자자, 친목은 이따 하시구요. 다음 신입생 자기소개 부탁해요-" 어색하다, 어색해. 여중여고 루트를 밟아온 나로써는 남자와 함께하는 모든 자리가 어색했고 불편했다. 앞으로 계속 같이 생활하면 나아지겠지.. 그나저나 부산사람이라던 선배랑 자기소개시키는 선배 진짜 잘생겼다. 엄마, 나 왜 의대가 그렇게 간절했는지 조금은 알 것같아. 그렇게 내 차례 이후로도 몇 명이 자기소개를 하던 중이였다.
"안녕하세요, 부산에서 올라온 프듀대학교 의예과 신입생 18학번 김재환입니다." 어, 쟤도 부산인가보......응? 이름이 익숙했다. 김재환? 내가 아는 그 김재환? 설마하고 얼굴을 확인했더니 정말 내가 아는 김재환이였다. 날 좋아했었다던 그 김재환. * -암넷여고 대신 전해드려요- [ 1학년 학생회 이여주 학원에서 몇번 마주쳤는데 이뻐요:) 익명이요!] 배진영 @이여주 얘 남자친구 있어요. 눈독 들이지마요. "야 이거 누가 장난쳤냐, 니 맞제?" "아, 뭔소리고. 아니라고-" "맞잖아, 말투도 딱보니까 여자구만" "아니라고, 못믿겠으면 내 페메목록 확인해봐라." 우리학교 대신 전해드립니다 페북 페이지에 나에 대한 제보가 올라왔다. 내가 다니는 학원이라곤 2개밖에 없는데, 하나는 남자친구인 진영이와 같이 다니는 학원이였고 나머지 하나는 나한테 관심을 보이는 남자애는 단 한명도 없었기에 난 당연히 친구가 장난친 줄 알았다. 그래서 친구를 추궁해봤지만 친구는 너무 당당히 확인해보라면서 폰을 건넸고, 내 눈으로 확인한 결과 정말 아니였다. 뭐지....누구지...그나저나 배진영 질투 엄청 하겠네. 진영이는 나와 1년정도 만난 남자친구다. 위에서 말했듯이 학원을 같이 다닌다. 뭐, 더 자세히 말하자면 내가 반해서 학원에서 진영이 번호를 땄다. 학원이 큰 학원이 아니라 내가 진영이 번호를 땄다는 소문은 금새 퍼졌고, 진영이와 내가 썸을 타고 사귀기까지의 모든 이야기를 학원사람들이 알고 있었다. 뭐, 진영이 얘기는 차차 하는걸로 하고 진짜 누가 올렸지... 에이, 딴 애가 장난친거겠지. 설마. 그렇게 이 일은 여주의 기억에서 사라져갔다. * "여주야, 니 김재환이라고 아나?" "김재환? 김재환..? 누구지.. 아, 학원 같이 다녔을걸? 이름 들어봤어" "아, 진짜? 걔가 니 좋아한대" "어? 뭐라고? 에? 나를? 걔가?"
"인기많아, 여주.." 진영이와 전화하면서 들은 내용은 가히 충격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김재환, 학원에서 정말 말 그대로 몇 번 마주쳤다. 기껏해봐야 시험기간에 보강한다고 한두번 수업 같이 들은거 빼면? 근데 걔가 나를 좋아한다고? 이게 무슨 신종 개소리인지. 심지어 몇 달 전에 올라왔던 대신 전해드립니다 제보도 걔가 올린거랜다. 학교에서 자는데 친구들이 휴대폰 가져가서 구경하다가 페메기록을 봤다나 뭐라나. 근데 하필이면 그 글에 진영이가 남자친구 있다고 댓글을 달았고, 김재환 걔는 그 댓글을 보고 조용히 페이스북 비활성화를 했다더라. 아, 그러고보니 제보가 올라오기 전에 나한테 페북친추가 와서 받아줬던 기억이 있다. 근데 정말 그게 끝이였다. 학원에서 마주칠 때도 '오, 훈훈하게 생겼네.' 이 이상도, 이 이하도 아닌 딱 그 정도였다, 너에 대한 인상은. 그러니 내가 이 이야기를 듣고 놀라지 않을 수가 있을까. 중요한건 그 다음부터였다. 원래 사람이란게 나한테 호감이 있다고하는 사람한테는 없던 관심도 생긴다더니, 자꾸만 너에게 시선이 갔다. 물론 나에겐 남자친구가 있었기에 너에게 가는 그 시선들을 부정해야했다. 그래, 그저 잠깐의 호기심일 뿐이였다. 나를 좋아해준다기에 생기는 잠깐의 호기심. 그러다 나는 그 학원을 그만두었고, 그렇게 너에 대한 나의 관심과 기억 모두 차츰 사라졌다. *
저기 앉아있는 너는, 그 때의 김재환이 맞았다. 고등학교 때 학원에서 얼핏 듣기에 너는 공부를 잘한다고 했었다, 그랬다. 참 웃기고 철없는 생각이지만 문득 너는 아직 날 좋아할까, 궁금해졌다. 너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아는 척을 할까말까 고민하는데 너도 나를 슬쩍 쳐다본다. 너도 나를 알아본 것같다. 일단 주위에 얘기를 나눌 사람이 없었기에 유일하게 아는 사람인 너에게, 나는 다가갔다. 때마침 너의 옆자리가 비었길래 무작정 앉아버렸다.
"....." 너의 옆자리에 앉은 나를 너는 놀란 눈으로 그저 빤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어.. 저기.. 너 김재환 맞지? 석훈과학 다니던."
"ㅇ,어? 어... 어, 맞아.." "안녕, 우리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앞으로 잘지내보자!"
"..그래!" 너와 내가 나눈 첫 대화였다. 넌 여전히 숫기가 없었지만 잘지내보자는 나의 말에 순한 웃음을 지었다. 학원에서 몇 번 마주쳤을 때 가끔 보던 그 순한 웃음 그대로였다. 그렇게 너와 나의 두번째 인연이 시작되었다.
재환이의 시점 |
"안녕하십니까, 부산에서 올라온 프듀대학교 의예과 신입생 18학번 이여주입니다!" 너였다, 이여주 니가 여기 있다. * "아, 쌤- 좀만 쉬었다해요-" "그럴래? 그래, 그럼. 10분만 쉬고 다시 수업하자-" "아싸! 야, 김유정.. 배 안고프나. 나랑 같이 편의점 갈래?" "콜" 너와의 첫 만남이였다. 시험기간이라 보강을 오라는 선생님의 말씀에 원래 가던 요일이 아닌 주말에 학원에 갔고 거기서 널 처음 보았다. 한없이 밝은 너로 인해 너의 주위는 너무나도 환했다. 17살이 사랑에 대해 뭘 알겠나, 싶겠지만 널 보는 그 순간부터 난 너에게 매 순간 진심이였다. 살면서 누군가를 이렇게 좋아할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니가 좋았다. 너무 좋아해서 못다가갔다. 혹시나 니가 부담스러워할까봐. 딱 한번, 용기내서 너에게 페북친구를 걸었었다. 니가 날 모를까봐, 거절할까봐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모른다. 그랬는데 너는 내 친구요청을 받아줬다. 그 날 너무 신나서 세운이한테 편의점에서 먹고싶다고 하는 것들을 다 사줘버렸다. 널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내 세상은 행복했다. 이렇게 너를 한참 짝사랑하던 나의 모습을 본 세운이 답답했던지 대신 전해드립니다에 올리라고 말해줬다. "....야, 이렇게 올릴까?" [이여주 너무 예쁜거같아요] "......진짜..이렇게 올리게...? 하, 휴대폰 줘봐라." [1학년 학생회 이여주 학원에서 몇번 마주쳤는데 예뻐요:) 익명이요!] "어떠냐." "니 여주 학생회인거 어떻게 알았냐." "니가 이여주 학생회인거 마저 너무 귀엽다고 그렇게 얘기를 해대는데 모르면 병신이지." "오....그렇구나. 이제 폰 줘. 내가 보낼거야." 그렇게 난 너를 향한 마음을 간접적으로 표현했다, 너의 학교 대신 전해드립니다 페이지에. 하지만 돌아온건 너의 남자친구의 댓글이였다. 배진영 @이여주 얘 남자친구 있어요. 눈독 들이지 마요.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였다. 실연당하면 이런 기분이구나, 싶었다. 그 댓글을 보자마자 난 페이스북 계정을 비활성화 했다. 너의 소식을 보면 너무 힘들 것같아서. 하지만 그 후로도 학원에서 널 종종 마주쳤고, 그 때마다 나는 힘들었지만 넌 여전히 밝고 예뻤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니가 보이지않았고, 니가 너무 그리웠다. 그렇게 고등학교 3학년, 졸업할 때까지 나는 단 한번도 널 잊은 적이 없었다. 3학년에 올라오고 얼마 안가서 니가 남자친구랑 헤어졌다는 얘기를 들었다. 한편으로는 좋으면서도 바보같이 니가 걱정이 됐다. 혹여나 힘들어하지않을까. 하지만 숫기가 없는 성격 탓에 너에게 연락 한 번 못해보고 그렇게 대학교에 왔다. 근데, 너무 보고싶던 니가, 내 세상을 밝혀주던 니가 나와 같은 공간에 있다. 꿈을 꾸는 것 같았다. 너의 목소리는 여전히 밝았고, 너는 여전히 예뻤다. 여전히 주위를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니가 날 알아볼까, 아니 나를 알기는 할까. 너를 힐끔힐끔 쳐다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게 없었다. 그런데 너도 날 쳐다본다. 우연인가? 설마 날 알아본건가? 니가 일어서서 나를 향해 걸어온다. 심장이 빠르게 뛴다. 그렇게 넌 나의 옆에 앉아 나에게 말을 걸었다. "어..저기..너 김재환 맞지? 석훈과학 다니던." 꿈만 같다, 이 모든 순간들이. "ㅇ,어? 어...어, 맞아." 바보같이 말을 더듬었다, 멍청해보일려나. "안녕,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앞으로 잘지내보자!" 지금 내 눈앞에 니가 있다는게, 너와 대화를 하고 있다는게 제발 꿈이 아니길. "..그래!" 너와의 첫 대화는 꿈같았고, 너와 시작할 두번째 인연은 너처럼 환하기를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