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이놈이?!
아부지….
너 같은 아들 필요없다!
엘리베이터 밖으로 들려오는 고함소리에 도경수의 옆집에 살고 있던 오모군은 벌써부터 혀를 차며 여유로이 거울 속 제 얼굴을 확인했다. CCTV가 있건 말건 꽤 멋있는 표정과 포즈를 취하며 넘쳐나는 자존감에 취해 만족스럽게 웃음짓던 그는 엘리베이터 문이 열림과 동시에 현관문 밖으로 마치 공처럼 던져져 바닥을 구르는 도경수를 발견한다.
" 형? "
" 세, 세훈아. 오랜만이다! "
허리 부근에 손을 짚고 머쓱하게 웃으며 세훈에게 인사를 건네는 경수의 표정은 말할 것도 없었다. 자신은 전혀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는 태연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은데, 어디 그게 쉽냔 말이다. 결국 괴이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하하, 웃던 경수는 바닥에 흝어진 짐을 주섬주섬 들고는 세훈이 나온 엘리베이터 속으로 후닥닥 몸을 숨겼다. 세훈은 보았다. 두 문이 닫히기 직전, 사정없이 거울에 머리를 박고 있던 경수를 말이다.
그리고 예상대로 경수는 뒤늦게서야 밀려오는 창피함에 거울 속으로 머리통을 내다꽂다가 결국엔 정수리를 감싸쥐고 아픔을 호소했다. 허나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는데, 아버지의 완강한 반대에 못이겨 제 나이 25살에 집 밖으로 쫓겨난 경수는 이제 어디에서 먹고 살아야 되냐는 거다. 대학교도 나왔고, 군대도 갔다왔다. 하지만 그는 백수라는 가장 큰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경수는 친구들에게 붙어먹어야겠다는 결론에 이른다.
*****
도경수의 계획은 이러했다.
Plan A. 변백현.
그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지금까지 가장 오랫동안 우정을 나누고 있는 가까운 친구였고, 백현은 혼자 살기 때문에 저가 함께 살게 되더라도 문제될 것은 없었다. 그러나! 백현은 제 부모님과도 자주 연락을 나눴고 괜히 이 사실을 밝혔다가는 금세 부모님께 위치가 들통이 날 것이 뻔했다. 경수는 미련없이 타겟을 변경했다.
Plan B. 박찬열.
…모든 조건이 적합하다해도 함께 산다는 건 끔찍할 것만 같았다. 미련도 없다. 패스!
마지막 Plan C. 김종인.
종인은 앞의 두 사람의 대학교 동기로 자연스레 백현, 찬열과 가까운 경수와도 친분을 쌓아왔었다. 생각해보니 종인은 혼자 살고 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고, 저의 가족들과도 전혀 연관이 없고, 좋은 기업에 취직한 앞날도 창창한 청년이였다. 그러나 자신이 막무가내로 너 집에서 살래! 하면 받아 줄 가능성이 없긴 했으나 아주 없다고 단정지을 순 없지 않은가?
" 오-케이. "
경수는 더 생각할 것도 없이 택시를 잡아 탑승했다. 그리곤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 아저씨, -로 가주세요!
*****
8층입니다-
이름 모를 아가씨의 목소리의 배웅을 끝으로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경수가 주위를 휙휙 둘러보더니 길게 늘여진 복도로 걸음을 옮기다 한 자리에서 우뚝 멈춰선다. 804호. 종인의 집 호수였다. 하지만 막상 집 앞까지 오니 미안함이 물밀듯이 밀려와 차마 초인종을 누르지 못하고 손을 움찔대던 경수는 순간 확 제껴진 현관문에 뻣뻣히 굳어버린다.
" 도경수? "
" 어… "
" 여긴 왠일이냐? "
" 아? 아하하! "
억지 웃음을 짓는 경수가 수상스러워 종인이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탐색하자 어쩐지 경수의 몸에 주렁주렁 달려있는 것들이 불안하다 싶었다.
" 너 그 짐들은 뭐야? "
" 이거?! "
정곡이 찔렸는지 깜짝 놀라 비명 지르듯이 종인의 물음에 대답한 경수가 서서히 진실을 실토하자 종인의 표정은 더욱 당혹감으로 물들어갔다.
" 그러니까 여기서 살겠다고? "
" 아니, 아니. 살겠다는게 아니라 당분간.. "
" 그거나 그거나 똑같잖아. "
" 근데 너도 알다시피 내가 백수고, 우리 집 아니면 난 갈 때가 없잖냐… "
" 난 모르니까 네가 알아서 해. "
종인은 단호히 거절의 뜻을 밝히고 손잡이를 잡아 문을 당겼다. 순식간에 끝난 상황에 경수는 '804' 라는 숫자만 허망히 쳐다보았다. 저렇게 나오는 걸 보니 아무래도 더이상의 설득은 불가피하다 싶어 경수는 다시 트렁크와 가방을 쥐고 어깨를 축 늘여뜨렸다. 그리고 밖에서 문 구멍으로 모든 행동을 지켜보던 종인은 갈등에 빠진다. 이대로 제 집에 들이면 언제까지 눌러앉아있을지 모르는 일이였고, 그렇다고 보내기에는 저 작은 녀석이 참 불쌍했던 것이다. 머리를 감싸고 있던 종인은 끝내 입술을 깨물고 도어락을 풀었다.
" 종인아…? "
무슨 드라마 속의 가련한 여주인공도 아니고 눈물을 글썽거리며 뒤를 돌아보는 경수의 모양새에 종인은 한없이 마음이 약해졌다.
" 내가 졌다. 알겠으니까, 그냥 같이 살자. "
" 진짜?! "
종인의 말에 신난 경수가 속으로 아싸를 외치며 빠르게 종인의 집 안으로 발을 쑥 들였다. 종인은 손바닥 뒤집듯이 바뀐 경수의 태도에 뒤늦게야 괜한 짓을 했다고 후회했지만 눈을 돌렸을 때 경수는 이미 짐을 푸르고 있었다.
*****
" 야, 너 경수한테 연락 안 왔냐? "
" 안 옴. "
" 아, 어딜 간 거야. "
백현은 초조한 듯 손가락으로 책상 위를 두들기다가 머릿 속으로 그려지는 경수의 모습에 번뜩 정신을 차리고는 찬열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 찾으러 가자. "
" 누굴? 도경수? "
" 어. "
" 어디서 잘 지내겠지. 그 자식 애도 아니고, 뭘 그렇게 걱정이냐. "
" 아, 안 돼. 걔 혼자 뭘 할 줄 아는 애가 아냐. "
찬열이 열불나게 게임을 즐기고 있던 것도 무색하게 백현은 망설임없이 본체 전원버튼을 꾹 누르고 등 뒤로 들리는 시끌벅적한 목소리에도 아랑곳않고 쇼파에 아무렇게나 던져져있는 찬열의 차키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나머지 한 손으론 핸드폰을 켜 연락처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변백현이 이렇게 구는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상황을 30분 전으로 돌리면, 경수의 집에서 걸려온 한 통의 전화때문이였다. 무심하게 말하지만, 걱정이 깃들어진 경수네 부모님의 SOS에 백현은 그 때부터 슬슬 걱정이 되었던 것이였다.
그리고 가장 큰 이유는, 6년 전 수능을 다 친 경수가 절망감에 빠져 가출을 했었던 적이 있었는데 당시에 백현도 경수를 찾아 나섰었지만 결국 찾지 못했고, 며칠만에 발견된 경수를 만난 곳은 병원 응급실이였었다. 사건의 전말을 살펴보니 찜질방에서 지내던 경수는 주머니에 돈이 다 떨어진 것을 깨닫고는 유난히 찬 바람이 쌩쌩 불던 날, 근처 아파트 놀이터 벤치에 누워 잠을 청하다 장염이 도져 끙끙 앓다 경비의 눈에 띄어 응급실로 실려왔었던 것이였다. 그 때의 악몽같은 기억이 다시 되살아나는 기분에 백현은 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 빨리 나와. "
백현의 부름에 어쩔 수 없이 끌려나온 찬열은 투덜대면서도 백현의 뒤를 따라 걸어나왔다.
어휴...이게 뭐당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