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대체로 부드러운 편이나 어디 한번 꽂히면 눈에 보이는게 없는 타입이므로 각별히 주의하셔야 하는 제품군입니다.
그건 여주가 속해있는 동아리도 별반 다를 바 없었다. 그리고 다시 동아리는 미친자와 미치지않은 자의 모임으로 정의내릴 수 있다.
그 가운데 앉아있는 여주는 눈에 띄게 얼굴이 예쁜 편은 아니지만, 나름 오목조목하게 생겼고.
단발머리를 좋아하는 누구씨덕분에 살아생전 해보지 못할거라고 생각하던 긴머리를 고집스레 하고 있는 여자다.
키는 임영민과 비교하면 20cm는 족히 차이가 나고. 반대로 임영민은 그 흔한 남사친, 조금 오래된. 아니, 좀 많이 오래된.
그런 임영민을 여주는 오늘도 짝사랑중이다.
'동아리 모임 좀 가지마.'
'그건 무슨 개소리야, 또.'
'자꾸 술 마시니까 이러지.'
아니, 그러니까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냐고. 내가 꽐라가 되든 말든.
임영민은 다른 애들일에는 느슨하게 굴면서도 내 일에는 칼같다. 한때는 그게 임영민도 나를 좋아해서일꺼라고 착각한 적이 있는데
임영민이 내게 대하는 태도는 특정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딱히 친구들을 대할때와 큰 차이가 없다. 나는, 그게 헷갈려서 싫다.
그래서 임영민이 싫은데. 좋다. 이건 모순적이지만, 내 마음이 그런 걸 어쩌나.
임영민이 여자친구가 있대도 나는 임영민이 좋다.
'아무튼, 가지마라면 가지마.'
특정한 경우 중 하나는 같은 학과임에도 다른 동아리에 가입한 내가 모임을 가장한 동아리 술자리에 참여할 때이다.
'아, 진짜. 내가 애냐! 우리 엄마도 안 하는 잔소리를 왜 네가 해, 임영민?'
'잔말말고 말 좀 듣지.'
임영민이 이렇게 내 이마를 툭 치며 별일 아닌것처럼 말해오는 사소한 일에도 내 심장은 혼자 지랄발광을 했다.
진짜 불공평하고, 불공평하다. 이건.
내 일에 특별히 신경쓰고 있는 것처럼 굴어버리면 진짜 내가 뭐라도 된 거 같은 기분이 들어서. 내가 임영민 여자친구인 줄 아는 동기들도 여럿이다.
그건 우리가 그만큼 각별해보인다는 소리도 되지만, 나는 그런 소문들이 마음 아프다.
아, 얘도 혹시. 어쩌면 혹시. 하는 쓸데없는 망상은 옛적에 버렸지만.
내 머리는 어떻게 해결해도 마음은, 해결할 방법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아침에도 혼자 헷갈렸다. 임영민은 이유도 말해주지 않고 술자리에 가지마라고 이야기했다.
지가 놀아줄 것도 아니면서. 지는 여자친구 만나러 가버릴 거면서.
임영민은 여자친구가 있다.
임영민이 단발머리를 좋아하는 걸 알고 있었다. 우리가 조금 더 어릴때 서로의 이상형에 대해 이야기해본 적이 있으니까.
그땐 임영민을 안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내가 말했던 이상형은. 딱 임영민 그 자체였다.
아, 화나. 그때 생각하니까 화나네. 억울해 죽겠다. 나만 좋아하는 게. 나만 이러는게.
여주는 아무렇지 않은 척 동아리 동기들과 웃고 떠들었다. 그러니까, 영민의 경고가 다분한 그 말을 어겼다.
자주 이랬다. 임영민은 모른다. 그러니까 괜찮다. 사실은 임영민을 혼자 좋아하는 내가 억울해서 임영민 말은 전부 반대로 하는
청개구리가 되기로 했다. 그리고 사실, 그렇잖아. 우리가 무슨 사이도 아닌데. 지가 내가 어쩌든 무슨 상관이야.
...진짜 그만 좋아해야지. 앞에 놓인 치킨 다리를 질겅거리며 씹던 여주가 테이블 위에 올려뒀던 핸드폰이 반짝거리는 걸 보곤 잠깐 망설였다.
여주는 곧 결심한 듯 제 앞에 놓인 생맥주를 벌컥거리며 마시다 핸드폰을 들었다.
...망할 페이스북.
이런건 다 문제다. 임영민이 지 여친이랑 알콩달콩 콩을 쌓는거면 차라리 포기하기가 쉬울텐데.
헤어졌다. 임영민이.
헤어진건 임영민인데, 왜 내가 술을 마시냐면.
이건 전부 망할 페이스북 때문이다.
아니, 이건 전부 망할 임영민때문에.
포기도 마음대로 못하게 하는 임영민때문에.
화딱지가 나서 주량을 훌쩍 뛰어넘어설만큼 잔뜩 술을 들이켰다. 오늘만 살고 죽을것처럼. 그래, 그 김루살이. 뭐 그런거.
술을 많이 안 마시려고 노력하는 내가 술을 너무 많이 마시자 어쩐지 동기들은 벙찐 표정이다. 그만 마시라며 술잔을 빼앗으려 해서
헤죽거리며 웃은 여주가 도로 맥주병을 들었다. 크으하...슨배님, 술이 너무 다라여...
헤롱헤롱거리는 제 시선에 잡히는 동기중 한명이 테이블위에 뒤집어둔 여주의 핸드폰을 들며 전화번호부를 뒤졌다.
너 뭐해?
말짱한 동기 중 한명이 다시 세운에게 물으면 세운은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얘 남자친구 있잖아. 아, 찾았다.
...내가 남자친구가 어디 있어! 나 그런거 없능데...!
결국 몸도 못 가누는 나를 보던 정훈선배가 집 방향이 같다며 자처하고 일어섰다.
....정훈선배랑 나랑 집 방향이 같았나..아니었던 거 같은데...
결국 정훈선배의 부축을 받아 겨우 올라선 도로위로 땅이 넘실거린다.
"여주야, 괜찮아?"
"어으...네에...슨배님, 저 괜찮져! 당연히!"
후드티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넣어둔 핸드폰이 웅웅거렸다. 정훈 선배는 뒷머리를 긁적이다 곤란한 척 여주에게 물었다.
여주 집이 어느 방향이더라?
"슨배님, 제가아 알아서 가겠슴니다.."
"집 들어가는 거 보고 갈게."
"....아니, 괜찮은데...."
"걱정되서 그러지."
"...어...그으럼..."
여주가 살고 있는 원룸이 보이기 시작하자 여주는 조금쯤은 술이 깼다. 제 한쪽 어깨를 지탱해주고 있는 정훈을 흘끗 올려다본 여주가
..선배, 저 이제 좀 괜찮은거 같은데.. 말이 질질 늘어지긴 했지만 이제 땅이 벌떡 일어나 제게 하이파이브할 정도는 아니라
여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정훈을 멈춰세웠다. 어쩐지 아까보다 정훈과 더 가깝게 붙어있다는 생각도 들고.
제 어깨위에 올려둔 정훈의 손이 자꾸 슬금슬금 움직이는 것도 신경쓰였다.
"....슨배님, 저...이제 됐어여.."
"어딘데, 집이?"
아니, 왜 이렇게 무섭게 자꾸 다가오고 난리야. 밀어내도 밀리지 않는 정훈이 계속 저와 틈을 좁혀와 여주는 눈을 덜컥 감았다.
엄마아..무서워, 무서워. 임영민....영민아.....
"시발."
눈을 감았다 뜨면 어느새 제 앞에는 영민의 넓은 등이 보였다. 영민에게 얻어맞은 정훈이 영민을 쳐보겠다고 주먹을 들었지만
키가 조금더 큰 영민의 손에 주먹을 잡히자마자 꽁지가 빠지게 도망갔다.
"..가지마라 안 했나."
"........"
"니는 내 말이 말 같지도 않나, 내가 니 이럴까봐!"
...그건. 그거는.
영민은 제 머리를 거칠게 헤집고는 뒤를 돌아 여주와 마주 섰다. 삐딱하게 저를 내려다보는 영민의 표정에 고개를 돌려버렸다.
"김여주. 니 취할때까지 술 마시지마라."
"....그건."
"취해서 이런 모습 아무 남자한테 보여주지도 마라, 좀."
"....너. 그거 진짜 설득력 없는거 알아?"
자꾸 헷갈리게 하지마, 임영민. 나쁜 놈아.
영민이 그 말에 너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임예리랑 헤어졌다, 눈에 밟혀가지고."
".......?"
"이제 설득력 좀 있나, 됐나."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나는 임영민이 무슨 이야기하는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이건 내가 완전히 헷갈릴 수 있는 소지가 충분한 말이잖아.
"내도 니 눈에 밟혀서, 임예리랑 헤어졌으니까."
이제 모르는 척 못하겠으니까.
"....."
"니, 내 책임져라."
+ 말씀 안 드리려고 했는데, 의외로 다혈질인 경우도 있습니다.
아, 제품 특성상 반품은 불가합니다. 갑자기 훅 치고 들어와도 뒷감당은 저희 몫이 아닙니다. 그럼, 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