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를 지나쳐 두 블럭을 더 가면 나오는 골목에는 자판기가 있다.
언제 세워졌는지 다 낡고, 종류도 몇 없는 이 자판기는 나와 그 애 말고는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다.
.
"아무개."
"네."
고등학생이다. 모든게 낯설다. 중학교 때와 똑같이 교복을 입고 교실에 앉아있는데 왜 낯설까.
주위에 온통 모르는 사람들이라 그런걸까. 내 머리 속 생각은 계속 돌아가고 있지만, 겉으로는 그저 무표정일것이다.
그저 시간에 맞춰 학교에 와서, 애매한 복도쪽 창문 자리에 앉아, 출석을 부르는 담임선생님의 목소리에 대답했다.
이상하다. 왜 이렇게 평온한 느낌이지. 낯설면 불편해야하는거 아닌가.
"배진영."
"네."
생각하던 내 머리 속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방금 대답한 아이를 쳐다봤다.
고작 출석에 대답하는건데, 눈을 어디다 둘지 몰라하고 있었다.
뭐지, 엄청 불편해하네. 쟤도 친구없이 올라온 그런 애들인가보네. 그저 그런 생각.
그게 배진영의 첫인상이다. 고작 그거.
아, 아니다.
그저 그런 생각으로 다시 고개를 돌리려할때, 눈이 마주쳤다.
어딜 봐야할지 몰라하던 그 눈동자가 멈춘 곳은 나였다.
_5월 10일의 여름 : 이른 봄 (1)
개학을 한 3월은 아직 쌀쌀했다. 그 애를 보고 든 두번째 생각은 마이가 잘 어울린다는 것이다.
아직 패딩을 벗기에는 추운 날씨였고, 그 애도 패딩을 입고있었다.
패딩안의 마이는 정갈하게 단추가 다 채워져있었고, 작은 얼굴과 굉장히 잘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복도 쪽 창문 밑에 앉아있는 나는 바깥을 보려면 자연스레 시야에 그 아이가 걸렸다.
오늘만 앉는 자리겠지만, 난 이 자리가 꽤 맘에 든다.
.
어딜가던 첫 날 수업은 다 똑같다고 생각했다. 선생님들의 자기소개, 그리고 뒤따라오는 학생들의 자기소개 시간.
다들 어느 중학교에서 왔는지, 잘하는 것은 뭐고, 좋아하는 것은 뭐고. 한마디씩 하고 자리에 앉았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첫 날이 너무 싫은데, 문득 궁금해지는 사람의 차례가 돌아왔다.
"저는 배진영 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이름을 이야기 한 후 찾아오는 정적에 또 다시 눈동자가 갈 곳을 잃고 헤맸다.
그리고 또다. 두번째 눈이 마주쳤다. 불안함의 끝에 흔들림 없는 눈을 마주하는건, 날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히게 만들었다.
눈을 피하고 말고 할 새 없이 수업의 끝을 알리는 종이 울렸고, 그렇게 자기소개를 끝내지 못하고 자리에 앉는 모습을 지켜보고 나서야 고개를 돌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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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날에 친구 사귀는 것은 바라지도 않았지만, 이렇게 신경쓰이는 사람이 생길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눈이 또 마주친 이후, 이제는 창가 쪽을 쳐다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다를 것 없는 수업시간들이 지나가고 점심시간이 찾아왔다.
화장실에 다녀와 교실에 들어왔을 땐, 아무도 없었다. 다 급식실로 내려간것이다.
어쨌든 밥은 먹어야하니까 급식실로 내려가기 위해 뒷문을 열었는ㄷ,
"어."
배진영이다. 날 보고 짧은 감탄사를 내뱉고는 내 머리 위로 교실 안을 보기 시작했다.
"어, 애들 다 밥먹으러 간건가."
혼잣말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말에 대답을 해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민했다.
"너는 왜 남아있어?"
"어? 아니, 이제 먹으러 가려고."
아까 눈도 가만히 못두고 자기소개도 못하던 애 맞나? 완전 딴사람 이네.
뒷문을 빠져나와서 급식실로 향하는데 뒤에서 뒷문을 닫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곧, 어깨를 건드리는 느낌이 들었다.
누가 건드리는 느낌에 바로 고개를 돌리니, 배진영이 아까와 같은 흔들림 없는 눈으로 날 바라보고있다.
그것도, 내 눈높이에 맞춰 허리를 굽히고는 그저 날 바라보고있다.
아무말도 없이 텅 빈 복도에서 서로 쳐다만 보고 있다니, 이게 뭐하는 거지.
"같이 점심먹을래?"
당황스러웠다. 사실 지금 배진영이 나에게 하는 모든 말은 날 당황스럽게 만든다.
"왜? 너 점심 같이 먹을 사람 없어?"
잘 넘겨받았다. 잘했다. 그렇게 생각할 틈도 없이 배진영은 치고들어온다.
"아니, 근데 너랑 같이 먹고싶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