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를 내게 주세요!
w.냥냥주먹
"내가 먼저 같이 먹자고 한 건데 그런 게 어디있어요."
"안 그래도 대리님께 그동안 도움 받은 게 너무 많아서 점심이라도 꼭 사드려야 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어, 정말요?"
"그럼요!"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내 옆으로 다가와 먹고 싶은 점심 메뉴를 묻는 대리님께 "음..." 하며 고민하다가 문득 아차 싶어 박수를 짝 쳤다. "제가 사드릴게요." 단호한 내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짓는 대리님을 향해 드시고 싶은 메뉴를 되물었다. 말만 해요, 대리님. 해맑게 웃으며 가방에서 지갑을 꺼내들어 대리님 앞에 흔들어 보이자 대리님이 또 호탕하게 웃고는 알겠으니 나가자며 움직이셨다. 뭘 사드려야 제대로 대접했다고 소문이 날까? 온갖 메뉴들을 떠올리며 홍보팀실에서 나오는데 저기 엘리베이터 앞에 저 사람... 어째 뒷모습부터...
"팀장님!"
"......"
"식사하러 가세요?"
빙고! 내 부름에 남자가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팀장님의 뒷모습임을 확신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팀장님은 전방 100m 지점에 세워놔도 팀장님 같단 말이지. 팀장님은 한 손을 주머니에 꽂으며 식사하러 가냐는 내 물음은 들은 체도 안 하고 나와 대리님을 한동안 번갈아 보기만 하셨다. 이따금씩 팀장님이 이렇게 말도 없이 내 눈을 뚫어져라 쳐다볼 때면 나는 늘 하실 말씀이 무엇이느냐고, 눈을 크게 여러번 깜빡이며 팀장님을 재촉하곤 했다.
"두분이서 식사합니까."
"네."
마침 열린 엘리베이터에 셋이 같이 올라타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먼저 1층을 누르고 좀 더 밑에 있는 지하주차장 버튼 쪽에 손을 올려놨다. 보통 차를 끌고 다니시는 팀장님께서는 보나마나 지하로 가시겠지. 몇층을 누르냐는 듯이 뒤돌아 팀장님을 쳐다보면 팀장님은 나를 한번 흘깃 쳐다보시고는 이내 버튼에 손을 갖다대셨다. 근데 잠깐만요, 팀장님. 지하 2층 버튼을 누르자마자 내가 눌렀던 1층 버튼을 다시 눌러 빨간빛을 꺼버리는 팀장님의 행동에 눈을 꿈뻑였다. 1층은 우리가 내리려고 누른 건데...
"저 팀장님..."
"같이 먹죠, 밥."
"네?"
"배고픈데 같이 먹을 사람이 없네."
뜻밖의 합류에 나와 대리님 둘 다 눈만 굴렸다. 그럼 설마 팀장님 차를 타고 동행하자는 말인가? 아니 그전에 또 예상밖의 추가 지출이... 순식간에 1층을 지나쳐 지하로 내려온 엘리베이터를 다시 타고 혼자 도망쳐버리고 싶었다. 벌써부터 감도는 듯한 묘한 어색한 공기로 숨을 간신히 뱉으며 대리님과 팀장님 두 사람 눈치를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 정말 당황스럽네. 아직 그렇게 하자는 대답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팀장님은 벌써 저만치 앞서 걸어가고 있었다.
팀장님이 차 키를 꺼내 삑- 소리를 내자마자 번쩍하며 헤드라이트에 빛을 낸 검은 세단이 눈에 들어왔다. "타요." 한 마디 후에 운전석에 먼저 올라타는 팀장님을 멍하게 쳐다보다 대리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대리님, 이게 무슨 상황이죠?
"안 탑니까."
"그... 가시려던 곳 있던 거 아니셨어요?"
"차에서 잠이나 자려고 했어요, 왜요."
"아..."
또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어깨를 으쓱하는 대리님을 쳐다보다 조수석 창 쪽으로 얼굴을 빼서 안 타냐고 묻는 팀장님 얼굴에 흠칫했다. 일단은 타야겠지? 딱봐도 비싸보이는 차에 조심조심 문을 열어 몸을 구겨 넣었다.
"생각해놓은 메뉴 있습니까."
"아뇨, 아직..."
자리에 앉자마자 "벨트." 턱으로 안전벨트를 가리키시길래 얼른 벨트를 당겨 맸다. 뒤에 계신 대리님까지 안전벨트를 매니 그제서야 팀장님은 차를 부드럽게 출발 시켰다.
"이 근처 파스타집 하나 있던데 거기로 가요."
"파스타?"
"이 사거리 지나서 오른쪽으로 들어가면 바로 나와요. 팀장님이랑도 예전에 한 번 갔었던 것 같은데."
"김사원은."
"좋아요."
그녀를 내게 주세요
"그래서."
"그래서 그냥 팔아버렸지-."
"......"
언제부터였는지도 모르겠다. 두분이 열심히 대화를 나누시기에 내가 낄 대화는 아니다 싶어 조용히 파스타만 흡입하고 있다가 '야 맞다 근데' 갑자기 귀에 때려박힌 대리님의 음성에 돌돌 돌리고있던 포크를 멈춘게 대략 30초 전의 일이다. 아마 대리님과 팀장님, 이 둘도 서로 반말로 대화를 하고있다는 걸 아직까지 인지하고 못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도 자연스럽게 '아 미친 맞다 야 내가 어제~' 하면서 대화에 껴도 될 것 같은 이 상황은 대체 무엇인가.
"김사원이 봐도 내가 나쁜 거예요?"
"별로."
"......"
"......"
"...아,"
"......"
"......"
"아,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그만... 죄송합니다."
박대리님의 질문이 너무 갑작스러운 타이밍이었다. 생각없이 나도 모르게 뱉은 대답에 찾아온 정적, 두 분의 표정이 꼭 좀 전의 내 표정 같았다. 그리고 이내 박대리님의 "풉-," 하는 신호탄을 시작으로 두사람이 갑자기 배꼽잡고 웃기 시작했다. 미친. 나도 따라 웃어야하나.
"아하하..." 멋쩍게 따라웃느라 정신없는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조금 고인 눈물을 닦아내기까지 하는 박대리님은 내 어깨를 두어번 두드리셨다.
"놀랐겠어요, 그쵸"
"......"
"어렸을 때부터 친구예요. 뭐, 별로 친하진 않은데-, 어쩌다보니 거의 20년째 같이 다니고 있네."
"그렇다고 우리따라 김사원도 반말을 합니까?"
"아아, 생각이 많아져서 저도 모르게... 정말 죄송합니다."
"에이, 무슨... 알잖아요, 얜 농담도 진담처럼 하는 거."
소리없이 안도의 한숨을 뱉고 다시금 파스타를 한입 크게 집어넣었다. 두분이서 친구셨구나. 상상도 해보지 않은 조합인데 이렇게보니 또 묘하게 케미가 맞네.
아직도 웃음기가 가시지 않은 얼굴로 파스타를 드시고 계신 팀장님을 흘깃 쳐다보다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녀를 내게 주세요
"계산은 제가 하기로 했는데 먼저 해버리는 게 어디있어요, 팀장님!"
"하려고 했는지 내가 어떻게 알고."
"...대리님이라도 옆에서 말려주시지..."
"내가 얘한테 밥 얻어먹은게 하도 오래 전 일이라, 말리고 싶지가 않았어요. 미안-."
제일 늦게 일어나서 주섬주섬 옷을 챙기고 나와 계산대 앞에서 카드를 꺼냈다가 "제일 먼저 나가신 분이 계산 다 하셨어요." 상냥하게 웃어주는 알바생 말에 헐레벌떡 뛰쳐나와 얼른 팀장님 차에 올라탔다. 이러는 게 어디있어! 내가 사기로 했는데! 팀장님과 대리님을 번갈아 쳐다보며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둘이 편이라도 먹은 거야, 뭐야. 내 칭얼거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차를 출발 시키는 팀장님이 나를 흘깃 쳐다보고 또 고갯짓을 하시기에 결국 입 다물고 조용히 벨트나 맸다. 흥, 나중에 사달라고 했을 때 사주나 봐라. 애원을 해도 안 사줘.
#
"요즘 날씨가 쨍쨍하니 참 좋아요."
"......"
언제 입으로 바람 빠지는 '칫' 소리를 냈냐는 듯, 박대리가 창문에 기대어 자는 모습을 보며 실실 웃다가 곧 차창에 얼굴을 바싹 붙여서 반 쯤 열어놓은 창 틈새로 들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헤벌쭉 웃고있는 모습에 실소가 터졌다. 이 아인 날씨가 좋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나. 여름엔 해가 쨍쨍하니 좋다, 겨울에는 겨울 바람 냄새가 좋다, 봄은 봄대로 좋다, 가을도 가을대로 좋다.
최근 언젠가, 몸이 녹아내리도록 더웠던 날엔 대뜸 '냉면먹기 딱 좋지 않아요?' 라고 했었다. 아마 작년 겨울 손발이 깨지도록 추웠던 날에는 '붕어빵 먹기 정말 좋은 날이에요!' 라고 했었지.
"비오는 날엔 파전이 딱인데."
"......"
"...왜 웃으세요?"
"귀여워서..."
"네?"
속으로만 생각하고 있던 말이 입 밖으로 작게 흘러나오는 바람에 순간 심장이 내려 앉았다. 한 손으로 잡고있던 핸들을 조용히 더 꽉 쥐었다.
"뭐라고 하셨어요?"
"...아무말도 안 했는데."
다행히 제대로 듣지 못 했는지 김사원은 내 시치미에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날마다 딱인 음식이 있다니까 웃기잖아. 혹시나 자고 있던 박진우가 듣진 않았을까, 몰래 백미러로 살펴보고 긴 한숨을 작게 뱉었다. 오늘은 또 파전이야? 혼자 다시 곱씹어봐도 입가에 웃음이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
팀장님의 '귀여워서' 발언 이후로 괜히 머쓱해져서 회사에 도착해 차에서 내린 후에야 겨우 편하게 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내가 잘못들은 게 맞겠지.
"뭐 마실래요?"
"아 대리님, 커피는 제가...!"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 라떼 한 잔."
"...아이, 팀장님!"
"맨날 라떼만 사먹던데, 아닙니까? 바꿔줘요?"
회사 밑 카페, 계산대 앞에서 나와 대리님이 서로 지갑을 든 채 서로 계산하겠다며 아웅다웅하는 사이 또 팀장님이 먼저 선수쳤다. 아니, 잠깐, 제발 잠깐만요... 알바생이 입을 열기도 전에 "영수증, 포인트 다 됐습니다." 순식간에 카드 모서리로 싸인까지 해치운 팀장님의 행동력에 벙쪘다. 잔말 말라는 듯, 팀장님이 내 손과 대리님 손에 각각 라떼와 아메리카노를 쥐어주는 바람에 더이상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 했다.
로비로 들어서서는 한 쪽 직원 휴게 시설에 몰려있던 재무팀 동기들에게 "박대리!" 대리님이 불려가셨다. 오랜만에 얼굴 본다며 "먼저 올라가세요!" 신나게 달려가는 대리님을 뒤로하고 팀장님과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근데 대리님이 재무팀 사람들하고는 어떻게 친해요?"
"인사 이동 전에 있던 팀이라 동기들끼리 친합니다."
"아..."
어쩐지 어떻게 저리 단체로 친할 수 있나 했네... 팀장님의 짧지만 알찬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금방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문이 열려 발을 들이면 코를 찌르는 향수냄새에 인상을 찌푸렸다. 아으, 냄새야. 누가 향수를 몸에 들이붓고 다니는 거야? 본능적으로 코에 손을 가져다댄 후 고개를 드는데 대뜸 웬 회사사람이 "어, 팀장님?" 팀장님께 아는척을 하며 우리쪽으로 바짝 붙었다. 누구지? 처음보는 얼굴에 고개를 갸웃하며 여자의 사원증을 빤히 쳐다봤다. 홍보팀 사원 안소라?
"식사하고 오는 길이세요?"
"네."
"단둘이?"
"네."
"...?"
"와,"
다른팀 사원이 우리 팀장님이랑 무슨 친분이 있는지 가만히 생각해보다 번뜩 팀장님을 쳐다봤다. 우리가 언제 단둘이 밥을 먹었죠?! 그리고 그 대답에 돌아온 "와," 소라씨의 짧고도 영혼없는 감탄과 나를 내려다보는 눈빛에 잔뜩 쫄아 시선을 얼른 돌렸다. 뭐야, 저 눈빛?
"맨날 팀장실 들락날락한다더니, 결국 친해졌나 보네요?"
"네?"
"안 내려요? 5층인데."
또 나를 내려다보며 '결국 친해졌나 보네요?' 날카로운 듯한 질문에 눈썹이 꿈틀했다. 무슨 꼭 내가 그동안 팀장님이랑 친해지고 싶어서 일부러 팀장실에 들락날락한 것처럼 이야기하는 게 영 심기가 불편했다. 팀장님이 안 내리느냐고 묻자마자 가벼운 목례 후 힐소리를 크게 내며 내리는 소라씨의 뒷모습을 빤히 쳐다보다 고개를 돌렸다.
그녀를 내게 주세요
"잠깐 들러서 파일 좀 챙겨가요."
"저요?"
"네. 김사원이요."
점심시간이 한창인데도 불구하고 꽤 많은 인원이 자리에 남아있는 부서에 조용히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가 팀장님의 부름에 다시 일어났다. 따라오라며 손을 까딱이시는 팀장님을 뒤따랐다. 파일 찾는 동안 잠깐 앉아 있으라는 말에 소파에 잠자코 앉아있으니 "밥도 사줬으니 똑바로." 곧 내 앞으로 서류철이 놓여졌다. 근데 잠깐, 밥을 사줬으니 똑바로 하라니. 내가 언제 사달라고 했냐고.
"그러니까 커피는 제가 사게 해주시지."
"됐습니다."
"너무 얻어먹기만..."
"아, 싫으면 그 커피 이리 내놔요."
또 입을 쭉 빼고 오늘 잔뜩 얻어먹기만 아쉬움을 잔뜩 드러내자 팀장님이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커피를 도로 내놓으라며 손을 쭉 뻗으셨다. 줬다 뺏는 게 있다는 말은 안 했습니다만? 내 코 앞까지 나와있는 팀장님의 손을 살짝 밀어내고 내 앞의 서류철을 들어 곧장 일어났다. 예, 제가 또 분수를 모르고 시끄럽게 굴었네요.
"오늘 점심 정말 감사합니다, 팀장님- :D"
팀장님 표정이 정말 금방이라도 커피를 빼앗아 가버릴 것만 같은 표정이라 얼른 팀장실에서 빠져나왔다. 문을 닫기 직전에 들린 팀장님의 바람 빠진 웃음소리에 나도 따라 웃음이 났다. 밥 한 번 같이 먹었다고 이러헤 가까워질 수도 있구나. 기분 좋게 자리에 앉아 서류철을 열어놓고 늘 풀어 헤치고 다니는 머리를 바짝 올려 질끈 묶었다.
뭐, 얼마나 집중했다고. 본격적으로 머리를 굴리기도 전에 작게 소리를 내며 컴퓨터 우측 하단에 뜨는 메시지 창으로 시선이 향했다.
[ 정 아쉬우면 조만간 밥 한 번 사든가요. ]
[ 빈말이었다면 내가 사지, 뭐. ]
***
회사에 저런 팀장님이 계시다면 저는 주말 출근도 불사하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