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부 박우진 X 미술학도 김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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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미술에 소질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꽤 시간을 들여 작업한 작품이 과분한 호평을 받았었고, 그게 대회 수상으로 이어졌을 뿐이었다. 그저 그런 수도권의 학교에서 나온 전국 대회 1등이란 타이틀은 학교에 큰 파장을 불러왔다. 현수막이 걸리고, 내 얼굴이 티비에 나오게 되면서 다시 한번 체감했다. 인터넷에 사진이 올라오고 인터뷰를 원하는 기자들이 학교 앞으로 찾아오면서 학교는 날 급격히 관리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연예인 났다며 부러움의 눈길을 보내왔지만, 정작 나는 이 상황들을 너무 부담스러워했다. 복도를 지나가면 수군거리는 아이들, 쏟아지는 시선들.
그렇게 도피한 곳은 항상 미술실이었다. 어차피 학교에 미술부원이라곤 나를 포함해 딱 두 명뿐이었으니, 커다란 미술실은 항상 내 차지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나는 탁한 흑연 냄새가 그렇게 포근할 수가 없었다. 항상 학교가 끝나고 방과 후에 매일 찾아오다 보니 이제는 미술실이 집처럼 익숙했다. 그렇게 늦은 시간까지 그림을 그려대다 야자가 끝날 시간 즈음에 집에 가곤 했는데, 그때면 항상 축구부나 농구부가 항상 운동장에 진을 치고 운동을 하고 있었다. 미술실에서 나와 교문까지 가려면 운동장을 빙 돌아야 하는 학교 구조 덕분에 항상 하굣길엔 축구나 농구 경기를 구경하며 갈 수 있었다.
유독 시간이 빨리 지나가는 날이었다. 분명히 들어왔을 땐 해가 밝게 떠 있었는데, 벌써 어둑어둑해진 밖에 서둘러 가방을 챙겨 나왔다. 평소와 같이 천천히 운동장 외곽을 돌며 교문으로 향하고 있었다. 오늘은 축구부인지 시끄럽게 공을 차고 호루라기를 불어대는 모습에 고개를 돌려 구경을 하려던 찰나였다. 퍽-. 커다란 소리와 함께 고개가 돌아가고, 이마에 느껴지는 얼얼한 통증에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날아온 공에 맞은 건가 싶어 주위를 보니 축구공이 통통 내 주변을 굴러가고 있었다. 머리가 띵했다. 이마를 감싸 쥐고는 주저앉은 내게 곧 한 남자애가 달려왔다. 주장인 건지 오른쪽 팔뚝에 달랑거리는 완장이 형광색이었다.
"저, 괜찮으세요?"
"..네에.."
"..진짜로, 괜찮으세요?"
내 상태가 심각해 보이긴 했나 보다. 무릎을 털고 일어나 이마를 꾹 눌러보니 따끔거리고 아픈 게, 아마 멍이 든 듯싶었다. 사투리처럼 약간 올라간 음으로 재차 괜찮냐 물어보는 남자애에게 나는 정말 괜찮다며 손사래를 쳤고, 심각한 표정을 짓던 남자애는 이내 내 볼을 붙잡아 올렸다. 갑자기 붙잡힌 볼에 나는 멍하니 남자애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고,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입으로 뜯어낸 남자애는 곧 내 이마에 그 뭔가를 착 붙였다. 이마에서 느껴지는 화한 느낌과 코를 찌르는 냄새에 그것이 파스인 걸 알아챘다. 아.. 감사합니다. 그제서야 얼굴을 핀 남자애는 큼큼거리며 내 볼을 놓았고, 잘 가라며 손짓을 한 뒤 축구공을 주워 뛰어갔다.
멍하니 서서 그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묘하게 올라오는 파스 냄새가 신경이 쓰였다. 박우진. 어둑한 하늘 아래 더 어두운 색깔로 유니폼에 새겨진 세 글자가 또렷하게 보였다. 박우진.. 둥근 이름을 입에서 굴리다 멈추었다. 선선하게 바람이 불자 따끔거리는 이마에 이내 발걸음을 옮겨 자리를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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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일어났을 땐 이마가 붉게 부어올라 있었다. 대충 얼음으로 찜질을 해 두고 학교에 갔는데, 생각 보다 가라앉지 않은 붓기에 당황했다. 앞머리로 가려진 이마를 꾹꾹 눌러대며 필통과 교과서를 챙겼다. 이동 수업이라 적혀진 칠판과 텅 비어있는 교실엔 나뿐이었다.
점심을 거르고 미술실로 가려던 참이었다. 출품할 작품이 생각보다 진전이 나가질 않아 손을 좀 봐야 할 상태였다. 평소처럼 운동장 외곽을 돌아가려는데, 시끌시끌한 운동장과 스탠드가 발길을 잡았다. 반 대항 축구라도 하는지 색색의 유니폼을 갖춰 입은 아이들에 경기가 진행되고 있었다. 생각보다 다들 폼이 전문적이라 감탄하며 경기를 지켜보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튀어나온 동그란 뒤통수가 빠르게 상대방의 공을 채가고, 그 공이 골대로 굴러 들어가기까지의 순간은 찰나였다. 환호성이 운동장을 메우고, 동그란 뒤통수가 뒤를 돌았다.
낮익은 얼굴에 살짝 놀랐다. 쏟아지는 함성에 머쓱한 듯 혀로 입 밖을 훑으며 머리를 긁적이는 모습에 주변 여학생들은 귀엽다며 난리를 쳐댔다. 저렇게 축구를 잘 하는 사람이었네. 내심 놀라며 발걸음을 옮겼다.
점심시간 내내 미술실에서 지내고도 작품이 완성되지 않아 결국 방과 후까지 목을 매야 했다. 원체 맘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그 날 바로 끝장을 보는 성격이라 시간이 꽤 오래도 걸렸다. 손에 가득 묻은 물감과 교복에 밴 물감 냄새에 코를 찡그리며 비누로 손을 씻어냈다. 오늘따라 캔버스에 대고 멍을 때리는 게 자주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평소보다 더 늦은 시간에 서둘러 가방을 들춰 메곤 밖으로 나왔다. 연습은 다 끝났는지 조용한 운동장이었다. 어두컴컴한 복도를 슬쩍 쳐다보며 계단을 내려갔다. 괜시리 걸음을 빨리하였다. 계단을 다 내려갔을 무렵 공이 통통 바닥에 튕기는 소리가 나 잠시 멈칫했다. 나 말고 누군가가 이 시간에 있다는 생각에 의아해하며 그쪽을 쳐다봤다. 인기척이 느껴진 건지 멈추는 손동작과 고요해진 복도엔,
"..안녕."
형광색 완장, 박우진이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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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아아아아 우진이 넘 조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