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색 달이 떠있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창문에는 하얀 김이 서려 창밖이 잘 보이지 않았다. 태형은 뿌연 창문을 바라보다가 낮에 구름을 보러 나간 길에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요즘 동네 분위기가 좀 이상해요. 자기도 그렇게 생각해? 난 또 나만 그러는 줄 알았잖아. 아니, 근데 요즘 정말 이상해. 글쎄 저번에 연희 엄마가 나를 기억 못 하더라니까? 그러면서 여기가 어디냐는 거야. 자기는 천호동 산다고, 여기는 처음 와 본다고. 옆에 연희를 두고 그러더라니까? 막 모르는 애라고 하면서. 연희 울고 난리 났잖아. 그래서 잘 달래서 일단 집에 보내기는 했는데, 생각해보니까 연희 엄마 학생 때 천호동 살았다고 했잖아. 어머, 저번에 윤호 삼촌도 그런 소리하던데. 기억이 안 난담서요. 근데 걔 있잖아요. 그, 누구지. 108동에 그 작고 똘망똘망하게 생긴 남자애요. 누구, 정국이? 아, 맞아요. 정국이. 걔가 어떤 남자가 연희네 집이랑 윤호네에 들어가는 걸 봤다잖아요? 그래서 난 또 강도가 아닌가 했지. 너무 충격 받아서 기억을 잃었나, 했더니. 강도 아니래요. 그냥 기억만 날라간 거야. 정국이네 엄마가 말한 남자가 그 남자예요? 정국이 잠도 못 잔대, 무섭다고. 내가 들었는데, 그 남자 엄청 하얗고 말랐대요. 그리고 으시시하대, 분위기가. 그래서 뭐 유령이나 귀신 같은 거 아니냐고. 그런데 묘하게 수긍되는 거 있죠? 근데 너무 말이 안 되잖아요. 아니, 근데 정말 귀신이면 어떡하, 하아아, 태형이 뱉은 숨 사이로 창문이 더 짙게 흐려졌다. 태형은 서리로 인해 축축해진 티셔츠의 소매를 끌어당겨 다시금 창문을 문질렀다. 창밖이 조금 뚜렷해진다. 이상하리만큼 커다란 달은 곧 떨어질 것 같이 위태롭게 하늘에 매달려 있다. 태형은 손끝으로 달을 쓰다듬듯 창을 매만졌다. 이런 걸 사람들은 슈퍼 문이라고 하던데. 보름달이 뜨는 때랑 달이 지구랑 가까워지는 때랑 겹쳐서 달이 커 보이는 거. 유령이나 귀신의 짓이 아니고, 그냥 과학적 매커니즘에 따른 현상. 한참을 달을 매만지던 태형은 도어락 소리 없이 딸깍, 문이 열리는 소리에 몸을 돌려 현관을 바라보았다. 윤기였다. 태형은 놀란 눈을 하고는 허둥거릴 틈도 없이 현관으로달려갔다. 아직 달의 맥이 짚이지 않았는데, 무슨 일이지. 태형의 심장이 빠르게 요동쳤다. 한 걸을을 내딛을 때마다 지독하게 달콤한 탄내가 태형을 집어삼킬 것 같이 진하게 풍겨왔다. 태형은 휘청이는 시야 사이로 윤기를 잡아 안았다. 윤기의 축 처진 몸이 태형의 어깨로 쓰러졌다. 태형은 숨이 막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바지 주머니에 든 작은 유리구슬을 꺼내들었다. 그리곤 그것을 들어 입으로 넣은 뒤 구슬을 삼켰다. 태형의 몸이 크게 요동친다. 시야가 빨갛다. 아니, 노랗다. 아니? 이건 파란색이야. 아니야, 아니야. 이건 보라색이야, 멍청아. 보라색? 근데 보라색이 뭐였지? 빨간색은? 노란색은? 아니야, 뭐야. 이게, 이게 뭐야.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색이 거대한 블랙홀을 만나 그 안으로 잔뜩 빨려들어가고 있다. 모든 게 중력을 잃어 제멋대로 춤을 추듯 부유하고 있다. 태형을 숨을 컥컥거리며 윤기를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동시에 블랙홀이 폭발했다. 태형의 몸이 크게 일렁였다. 작은 파편들이 태형을 침식하려는 듯이 위협적으로 태형에게 향했다. 태형은 몸을 들어 윤기를 뒤덮고는 숨을 크게 내쉬었다. 동시에 모든 사물들이 태형이 있는 방바닥으로 흩뿌려지며 진동했다. 헉, 허억. 태형은 거친 숨을 내쉬며 잔뜩 흐릿한 시야 사이에서 덜덜 떨리는 손으로 바닥에 흩뿌려져 있는 색의 파편을 들어 윤기의 입속에 집어넣었다. 탄내가 점점 사라지고, 윤기의 체향이 천천히 돌아온다. 여전히 태형의 숨소리가 가득한 공간에는 탄 향과 윤기의 체향, 그리고 색들이 폭발한 냄새가 섞여 우울하면서 행복하고 슬프면서 평온한 향이 태형을 감쌌다. 태형은 윤기의 소맷자락을 꾹 쥐며 눈물을 머금었다. 숨이 막혀왔다. 눈앞이 캄캄해졌다가 환해졌다가 또 잔뜩 일그러졌다가를 반복한다. 죽고 싶다, 아니야. 살고 싶어. 내 손목 안에 있는 동맥을 뜯어내고 싶다. 안 돼. 난 그냥 초콜렛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어. 잠을 자고 싶다. 아, 감겨오는 눈꺼풀을 뜯어내고 그 속에 든 눈알을 짓이기고 싶다. 아, 섹스하고 싶다. 아냐, 아냐. 아니야. 그냥 칸트와 이상사회에 대해 논하고 싶다. 갑자기 공간이 환하게 터진다. 놀라우리만큼 빠른 치타와 거대한 운석이 달리기를 한다. 치타가 운석을 따돌렸다. 내 대장을 꺼내 코끼리가 줄넘기를 한다. 커다란 고래를 플랑크톤이 빠르게 갉아먹는다. 바다, 바다. 아, 바닷물에 발을 담그고 싶다. 시원하게. 아니야, 그냥 바다에 잠식해버리고 싶다. 숨이 잔뜩 막혀 머리가 터졌으면 좋겠다. 아, 아, 아, 숨을 쉬고 싶은데 숨을 쉬기도 싫어. 그런데 숨을 쉴 수도 없고, 숨을 멈추지도 못하겠어. 숨, 숨. 윤기의 소맷자락을 잡은 태형의 손톱이 윤기의 소매를 뚫고 태형 자신의 손바닥을 파고들어 바닥에 피가 고일 때 쯤, 윤기가 눈을 떴다. 그리곤 숨을 뱉었다. 하아. 모든 것들이 느리게 떠올랐다가 다시 본래의 제자리를 되찾았다. 바닥에 잔뜩 흩뿌려져있던 색의 파편들도 사라진다. 모든 파편들이 사라질 때 쯤 태형도 긴 숨을 뱉었다. 방안이 윤기와 태형의 체향으로 오롯했다. 태형은 차오르는 눈물 사이로 윤기의 얼굴을 주시했다. 윤기는 그런 태형을 바라보다가 몸을 일어켜 태형의 등을 쓸어내렸다. 미안, 미안. 너무 멀리가서 돌아오는데 오래 걸렸어. 태형이 윤기의 팔을 끌어안았다. 형, 형. 오늘은 내 뇌를 갉아먹을 뻔 했어. 너무, 너무 무서웠어. 윤기는 아무말 없이 땀으로 젖은 태형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태형의 안정적으로 숨을 내뱉자 윤기는 태형을 안고 있던 몸을 살짝 떼어 자신의 커다란 손으로 태형의 머리를 정리했다. "오늘은 조금밖에 못 가져왔어. 갈 데가 없어서 어린애의 기억 속으로 갔었는데, 그 애 기억 안에 작은 문이 있길래 열었더니 그게 전생하고 이어지는 문이더라. 그래서 도착 시간 계산도 못 하고 아무 문이나 열어버렸어. 많이 놀랐지. 형이 미안해. " 태형은 윤기의 목소리를 듣다가 가만히 다시 윤기의 품에 자신의 머리를 기대었다. 한참을 윤기의 체향을 들이마셨다. 그리고는 다 쉰 목소리로 윤기에게 말을 걸었다. 형. 우리, "... 들켰어. 동네에, 소문이, 났어. 누가, 누가 귀신 같은 게, 나타났,다고. 기억이, 기억이... 없어진다고. 그렇게 소문이 났,어. " 태형의 잔뜩 쉬어버린 목소리와 진이 빠진 눈동자가 안쓰러웠다. 윤기가 고개를 숙여 태형의 머리칼에 입을 맞추며 입을 열었다. 이사 가자. 이번에는 하늘이 깨끗하고 땅이 조용하고 바람도 착한 데로 가자. 네가 달을 잘 읽고 내가 널 빨리 찾아올 수 있게. 그리고 너무 자주 나가지 말자. 내가 긴 기억을 가져올게. 태형이 고개를 끄덕이며 마치 엄마의 품을 찾는 어린아이같이 윤기의 몸을 파고들었다. 그리곤 윤기의 목소리에 자신을 맡기며 현실과 멀어졌다. 마음이 편안해진다. 세상이 따뜻하다. 태형은 몽롱한 눈을 깜빡이다 낯선 인영에 엇나간 시아의 초점을 맞추기 위해 인상을 찌푸렸다. 교복을 입은 여자아이가 굳은 채 서있었다. 정적이 잔뜩 밀려온다. 태형의 평화가 순간 여자아이의 덜덜 떨리는 차가운 시선에 부딪혀 깨져버렸다. 정말, 들켜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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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무운입니다. 글을 처음 써 봐서 아직 많이 서툴어요. ㅠㅠ 그래도 재미있게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그취 아니구요, 빙의글 맞습니다! 오늘 글의 끝에 등장한 여고생이 독자님들이 될 거예요. 태형이랑 윤기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유령?????? 귀신???????? 윤기랑 태형이의 이야기는 앞으로 차근차근 풀어나가겠습니다. 글 쓸 때 Joep Beving의 앨범 Solipsism 듣고 썼어요. 혹시 들으실 수 있으면 들어주세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