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아빠 박지훈
나보다 박지훈이 먼저 강의가 있어 박지훈이 학교 가는 길에 정훈이를 데려다주고, 자기는 먼저 학교에 간다고 그랬다. 나도 같이 가고 싶었지만, 가서 혼자 마땅히 시간 떼울 곳도 없고, 그렇다고 도서관에 가기엔 책을 읽을 기분이 아니라서─사실 또 박우진을 만나면 어떤 일이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조금 있다 집을 나서기로 했다. 오랜만에 아무도 없는 집에 혼자 있으려니 편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되게 텅 빈 느낌이었다. 두 명이 빠졌다고 이렇게 공허할 수가 있구나. 하긴 그 두 명이 같이 있으면 서로에게 말을 걸기 바빠서 조용할 날이 없었다. 바삐 나가 박지훈이 다 하지 못했던 설거지를 마저 하고, 이제 학교 갈 준비를 할까 싶어 옷장 문을 연 순간, 핸드폰에서 진동소리가 울렸다.
전화를 받자마자 소리를 지르며 빨리 학교로 오라는 수정이의 말에 왜그러냐고 물었지만, 계속 재촉만 하고 무슨 일이 있는지 알려주지 않았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건가 싶어 손에 잡히는대로 옷을 입고, 빨래줄에 걸려있는 양말을 걷어 정신없이 신고, 부리나케 집에서 나왔다. 오늘따라 버스도 늦게 오는 것 같아─사실 늦게 오지는 않았다 체감상 그렇게 느껴졌다─ 발을 동동구르며 버스가 오자마자 타서 가는 내내 마음을 졸였다. 몰래카메라가 아닌 이상, 수정이가 그렇게 생난리를 칠 일은 없었으니 박지훈에게 무슨 일이 있는게 분명했다.
학교를 도착하자마자 수정이한테 전화를 걸었는데, 신호음만 무한으로 갈 뿐 전화를 받지 않았다. 급한 마음에 넓은 교정을 이리저리 둘러보다, 사람이 많은 몰려있는 곳이 눈에 보였다. 무슨 일이 있나 싶어 그쪽으로 뛰어갔는데, 역시 내 초조함은 예상을 적중했다. 박지훈과 박우진이 치고 박고 싸우고 있었다. 고등학생도 아니고, 대학생이. 더 웃긴건, 말리는 사람도 하나 없었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입이 떡 벌어져 나도 무엇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지금 이 상황을 말리려 저 곳으로 뛰어 들기엔, 너무 이목이 집중될 것 같았다. 지금 저 둘 눈에는 옆에 둘러싼 사람들은 보이지 않은 것인지, 자기들끼리 할 말을 계속 했다.
대충 내용을 들어보면, 절반은 욕이었다. 네가 먼저 시작했네, 어쨌네, 저쨌네. 내가 봐도 가관이었다. 이대로 말리지 않다가는 해가 질때까지 이러고 있을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두 눈을 꼭 감고 달려가 찌질하게 뒤에서 박지훈의 옷자락을 잡고 잡아 당겼다. 나는 박지훈이 뒤를 돌아 나를 보고 그만 둘 줄 알았는데, 뒤를 돌아보기는 개뿔 잡고있던 내 손을 뿌리치자, 나는 그 힘으로 뒤로 밀려나 넘어지고 말았다. 이게 무슨 봉변인가 생각이 들기도 전에, 아예 생각 자체가 없어졌다. 도대체 박지훈은 박우진이 얼마나 싫으면 사람이 저렇게 돌변을 하는 걸까. 박지훈이 평소에 욱하는 성격이 있기는 했지만, 이정도 일 줄은 몰랐다.
나는 그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이미 박지훈과 내 사이가 소문이 날 대로 났는데, 박지훈에게 내가 이런 꼴을 당했다고 소문이라도 나면? 아, 지금 여기서 많은 사람이 봤으니 소문이 날 것도 없었다. 박지훈은 나를 보지 못했지만, 박우진은 박지훈의 건녀펀에 있어 나를 본 것인지 박지훈에게 욕을 했다. 돌았냐? 너는 네 애인도 못 알아봐? 그 말을 듣고 박지훈도 방금 제가 친 게 나인 것을 깨달았는지 뒤를 돌아 아직까지 넘어져있는 내게로 왔다. 제가 이런 짓을 했다는 것에 저도 당황을 한 것인지 내 앞에 앉기만하고,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 … … 미안해. 내가 잘 못 했어. "
" … 괜찮아. "
" 미안해, 정말… "
그러더니 박지훈은 나를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박우진은 그 모습이 웃긴지 허, 하며 바람 빠진 어이없다는 웃음을 내쉬었다. 박지훈도 자기 자신이 하찮은 것인지 한숨을 쉬었고, 이내 나를 일으켜 박우진을 한 번 돌아보고는 그 곳을 나왔다. 그것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에이, 뭐야. 재미없다는 반응이었다. 그런 사람들의 반응에 화가 났지만, 내가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니 그냥 생각을 접었다.
박우진은 어떤지 잘 모르겠는데─물론 내가 신경 쓸 바도 아니다─ 다행히, 박지훈의 얼굴에 흉은 없었다. 그리고, 박지훈에게 묻고싶었다. 이번에는 무엇이냐고. 여태까지 욱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것을 치고는 잘 참아왔는데, 왜하필 사람들이 다 보는 뚫려있는 곳에서 그랬냐고 묻고싶었다. 박우진이 아무리 내게 이상한 소리를 하고, 제게 해를 끼쳐도 박우진과 똑같은 사람이 되기 싫다며 꾹꾹 눌러왔던게 터진 것일까. 박지훈은 나와 걷는 내내 한숨을 쉬었다. 그마저도 힘들어보여 물어 볼 수가 없었다.
" 왜그랬냐고 안 물어봐? "
" 너 생각 정리가 아직 안 된 거 같아서. "
박지훈이 먼저 입을 열었는데, 내 말을 끝으로 다시 대화가 끊겼다. 박지훈의 얼굴에는 말을 할까, 말까가 쓰여있었다. 아무리 눈치가 없는 나라도 박지훈과 많이 지내본 사람이라 그정도는 캐치할 수 있었다.
" 나는 진짜 널 믿어. "
" 응. "
" 그러니까 말해주는거야. "
" … 응. "
" 박우진이 너가 좋대. "
장난이 아니라, 진심인거 같았어. 그래서 더 화나서, 내가 먼저 때렸어. 박지훈의 말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박우진의 말도 그렇고, 박지훈이 먼저 때렸다는 것도. 설마설마했는데, 그 설마가 정말 사람을 잡았다. 도대체 박지훈은 나를 얼마큼 믿으면 제가 불안한 것은 다 미뤄두고 나에게 이런 것을 말해주는 걸까.─물론 박지훈을 배신할 생각은 절대 없지만─
" 그러다보니까 싸움이 커졌는데, 걔가 그랬어. "
" … … "
" 이름이 너가 자기한테 안 오면 휴학을 하겠대. "
" … … "
" 보통 사람들은 휴학이 쉬울 수도 있겠지만, 걘 아니거든. 자기 아버지 회사 물려받으려면 빨리 졸업해야되니까. 집안에서도 그걸 원하고 있고. "
그니까, 걔 말은. 나한테서 널 떼어내겠다는거야. 그걸 듣고 내가 빡이, 아니, 화가 나 안나? 박지훈은 그 말을 하면서도 방금 일이 생각났는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말했다. 박우진이 대기업 회장 아들이라니. 이것도 충격을 받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도대체 이들은 서로가 싫다면서 서로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게 가장 큰 모순이었다. 남을 잘 이용해먹으려면 약점을 잘 알아야한다는게 사실일까.
" 이름아. "
" 응. "
" 박우진 휴학하게 만들어줘. "
" … … "
" 내가 할 순 없어. 너가 잘 버텨야 돼. "
박지훈은 박우진이 내게 곧 무언가를 할 거라는 예고를 해주었다. 조심하라는 말과 함께.
──
오늘도 강의가 끝나고 나가려고 하는데, 이번에는 마지막까지 기다리지않고, 사람들이 나갈때 한꺼번에 같이 나가려고 가방을 빨리 챙겨들었다. 뒷자리에서 좀 떨어진 곳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고, 난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그가 박우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박지훈의 말이 생각나 박우진을 쳐다도 보지않고 왜, 라고 물었다. 사람들이 거의 빠져나가자, 박우진이 내가 있는 쪽으로 내려왔다. 오지 말라고 말해도 듣지 않을 것 같아, 아예 말조차 꺼내지 않았다.
" 오늘 시간 있어? "
" 없어. 내일도 없을거고, 앞으로도 없어. "
" 박지훈한테 다 들었구나. "
" 어. 그러니까 제발 오지마. 말도 걸지말고, 쳐다도 보지마. "
저번 박우진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박우진이었다. 저번에는 말도 톡톡 쏘고, 듣기 싫은 말만 했다면, 이번에는 그 분위기 자체가 악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열등감과 피해의식에 쩔어있는 분위기도 아니었고, 그냥 단지 정말 내게 무언가 말하고 싶어서 시간이 있냐고 물어본 것 같았는데 그동안 해온 박우진의 행동들때문에 나도 모르게 톡톡 쏘는 말을 내뱉었다.
" 미안해. "
" … 뭐? "
" 웬 병신이 갑자기 이런가 싶겠는데, 내가 생각해도 이건 좀 아닌 거 같더라고. 박지훈한테도 미안하고, 너한테도 미안해. "
박우진이 미안하다고 하는 말에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전혀 미안해할 상황도 아니었고, 그런 말을 내뱉는 사람도 아니었는데. 이런 순한 모습에 순간 고등학생때 박우진이 내게 했던 행동들이 떠올랐다. 정말 착하고 친절했던 그때. 내가 박우진을 좋아했었던 그때. 박우진은 박지훈에게도 미안하다는 말을 전해달라며 먼저 강의실을 나갔다. 그 자리에서 몇 초 더 멍을 때리다가 뒤이어 나도 강의실을 나왔다.
──
" 너네 정말 어쩔거야. "
" 뭘? "
" 박지훈, 진짜. 휴. 너네는 왜 조용할 날이 없냐! "
수정이가 오늘은 기필코 나와 얘기를 좀 해야겠다며 박지훈을 설득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정훈이와 박지훈과 수정이와 내가 카페 테이블을 빙 둘러싸고 앉았다.─저번에 카페에서 보았던 수정이 옆에 있던 남자는 소개팅남이었는데 수정이가 하는 행동을 보고 여기서 그만해야될거같다고 했단다 불쌍한 수정이─ 수정이는 앉자마자 너네는 왜 사고를 안 칠 날이 없냐고 물었다. 너네라니. 오늘은 박지훈 혼자 친 건데.. 라고 생각을 했지만 쭈구리가 되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너네는 애까지 있는 애들이 언제 철 들래. "
" 그러는 너는 언제 남자 만날래. "
" 닥쳐. "
박지훈과 정수정의 조합은 언제봐도 웃겼다. 서로를 못잡아먹어서 안달인 그런. 그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오늘 강의 끝나고 박우진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무래도 나와 박지훈에 있어서 중요한 일이니 말을 해야겠다 싶어 입을 열었다.
박지훈은 내 말을 듣고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수정이도 뭔가를 알고있다는 듯 웃어보였다.─나는 수정이한테 박우진에 대해 말한 적이 없는데 아마도 박지훈이 말한게 아닌가 싶었다─ 나는 진지하게 말했는데 왜 자기들이 웃는걸까. 왜 웃어? 라고 물으니, 박지훈이 어이가 없어서. 라고 대답했다. 뒤이어, 수정이가 말했다. 그새끼가 다음 학기에 휴학을 하면 내가 학교 홍보 모델을 한다.
──
그리고, 수정이는 다음 학기에 애인이 생겼다. 애인이 생긴 이유는, 모두 학교 홍보 모델 덕분이었다. 평소에 자기가 예쁜데 예쁜 줄 모르던 수정이는 학교 홍보 모델을 하고 아는 지인들에게 연락이 그렇게 많이 왔다고 했다. 그 말은, 박우진이 휴학을 했다는 말이다. 박우진이 내게 강의실에서 했던 말이 마지막이 되었고, 어느 순간부터 학교에서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일부러 나를 피하는 건가 싶어서 강의는 왔겠지 싶어 주위를 둘러보아도 박우진의 코빼기는 보이지 않았다. 박지훈도 처음에는 다행스럽게 여기더니, 뭔가 이상하다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런데 이렇게 정말 이번 학기부터 휴학이라니. 사실, 그 전부터 소문은 돌고 있었지만, 그게 사실이 될때까지 믿지 않았다. 박우진에게 휴학이라니. 적잖이 놀랄 만한 일이었다.
박우진도 안보이겠다, 그동안 박지훈은 내게 더 많은 애정 공세를 했다. 나는 그 전에도 충분히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정말 세발의 피였다. 어느 날은 박지훈은 피곤한것인지 낮잠을 자고 있는데 내가 너무 배가 고파서 라면을 끓이고 파를 썰다가 그만 손이 베어 아!, 라는 소리를 내자 박지훈은 자기가 언제 잤냐는 듯 나와 내 불게 문든 손가락을 보고 당장 구급상자를 가져와 호호 불며 밴드를 붙여주었다. 그리고, 다시는 내게 칼은 만지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이것만 있던가, 이건 애정인지 집착인지 모르겠지만, 치마를 입으려고 할 때면, 아주 난리를 친다. 저번에는 바지가 너무 더워 치마를 입고 나갔는데, 박지훈이 그걸 보자마자 경악을 하며 얼른 제 차에 태워 집으로 와 옷을 갈아입게 했다. 내가 다 힘들 지경이었다. 그래도 어떤가, 박지훈인데.
" 정훈아. "
" 응, 아빠. "
" 정훈이는 동생 있었으면 좋겠어? "
더운 여름이라 거실 소파에 누워 늘어져있는데, 박지훈이 꽤나 진지한 목소리로 정훈이를 불렀다. 이번에는 애한테 무슨 소리를 하나 싶어 귀기울여 들어봤는데, 뭐? 동생? 동생이라는 말을 듣고 누워있던 몸을 황급히 일으켰다. 동생이라니!
" 어! 있었으면 좋겠어! "
" 여자 동생, 남자 동생? "
" 여자 동생! "
정훈아, 도대체 너의 빠르던 그 눈치들은 다 어디 갔니. 박지훈이랑 놀더니 정훈이의 눈치가 다 사라졌다. 아니면, 제 아빠를 위해 사라진 척을 해주는 건지. 아, 똑똑한 아이니까 어쩌면 후자가 맞을 수도 있겠다. 한 치의 고민도 없이 여자 동생이라고 구체적으로 말해주는 정훈이에 박지훈은 실실 웃으며 나를 쳐다봤다.
" 정훈이가 이렇게 원하는데, 여보. "
여보는 무슨 여보야. 괜히 일어났다. 그냥 계속 자는 척 할 걸.
+ 곧 막바지에 들어갑니다!!!!!!!!!!!!!!!!!!!!!!!!!!!!!!
오랜만에 왔는데 반갑게 맞아주셔서 감싸해요 여러분 싸라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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