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아이는 말이 없었다. 걔와 말을 섞어 본 애들은 손에 꼽았다. 수업시간에 열심히 듣는 편도 아니었고, 드러누워 잔적도 없어서 선생님들도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나라고해서 특별히 관심을 둔 것은 아니었으나(그래 남들보다는 조금, 아주 조금 더 관심이 있었던 건 인정한다.) 새 학기가 되고 처음 만난 짝이라 대화를 좀 시도했었다. 별 건 아니고
"나 형광펜 이거 둘 중에 무슨 색으로 밑줄 그을까"
정말 쓸데없는 물음인 건 나도 알고 있었다. 그치만 어색한 걸 어쩌라고... 하지만 고맙게도 내 말을 건성으로 넘기거나 무시하지는 않았다. 처음엔 내 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한참동안 대답이 없길래 아주 대놓고 씹힌 줄 알고 기분이 몹시 상할 뻔 했으나 약 2분 정도가 지나서
"노랑."
하며 대답해서 제대로 들은 게 맞나 귀를 의심했더랬지.
지금이야 두루두루 친하지만 처음엔 남자 애들이랑도 많이 친해 보이지 않았다. 몸은 매일 아프리카로 극기 훈련이라도 다니는 것 마냥 까만데 운동하는 것도 많이 보지 못했다. 아, 운동하니까 남자애들이 걜 피했던 이유라 할 만한 것이 갑자기 떠올랐다.
"야, 박우진이 찬 공 우리 집 앞에 있더라, 미친."
"무슨 개소리야. 너네 집 학교에서 5분 거리잖아."
"그러니까 나도 못 믿겠어. 누가 들고 가다 버린 거겠지?"
이런 일이 매번 반복되다 보니 자연스레 기피대상이 될 수밖에.
사실은 박우진이 아무리 숫기가 없다지만 걔를 좋아하는 여자애는 늘 도처에 존재했다. 솔직히 잘생기긴 했거든.
"우진아, 이거 너 먹어."
우리 학교에서 예쁘다고 손꼽히는 이세희가 박우진에게 손수 만든 빼빼로를 준 날엔 온 학교가 떠들썩했다. 박우진에게 이세희가 빼빼로를 주고 있을 때 나는 그걸 아무 생각 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왜냐면 나는 그때까지 여자애들에게서 밖에 빼빼로를 받지 못했거든. 그냥 속으로 '저렇게 예쁜 애한테 빼빼로를 받다니.. 계 탔네.. 역시 잘생긴 게 최고야' 이러고 있었다.
"주는 걸 됐다 할 순 없잖아."
박우진이 할 말이 남은 듯 입술을 달싹였다.
"네가 보고 있는 줄 알았으면 안 받았을 거야."
"뭐?"
박우진을 부르는 남자애들 때문에 뒷말은 더 이상 들을 수 없었다.
* * *
"아 미친놈아 살살 때려 진짜 아프잖아."
작년 반 애들끼리 찍은 학교폭력 예방 교육 영상이 지역 교육청에서 상을 받자 학생부 선생님들이 한번 더 찍기를 권유하셨다. 여러모로 쓸 거라나 뭐라나, 솔직히 매우 귀찮은 일이어서 나는 빠지려 했는데 작년 반장이 주는 초콜릿을 생각 없이 낼름 받아먹는 바람에 꼬투리를 잡혀 무려 '피해자' 역할씩이나 맡게 되었다.
여자애들이 연기는 싫다고 촬영, 영상편집, 시나리오 구성 이렇게 연출로 다 빠져버리는 바람에 난 결국 남자애들한테 맞게 되었는데 이 새끼들이 사심을 담았는지 살짝만 툭 쳐도 아팠다. 덕분에 피해자 역할임에도 '가해자'라 해도 믿을 법한 인상으로 변했다. 아, 왜 나 혼자만 피해자 역할이 된 건지. 애들한테 서운하기도 했고 솔직히 서러웠다.
여자애들이 다음 촬영 구상을 하고 있을 때 우린 계속 리허설을 했다.
처음에 눈물 연기를 한다고 했을 때 난 절대 못한다며 정색했었는데, 상황이 상황인지라 눈물이 금방 터져나왔다. 내가 진짜 지금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냐... 드디어 터진 내 눈물에 남자애들이 기뻐하며 여자애들이 있는 옆 반으로 가려는데 그전에 먼저 뒷문이 쾅하는 큰 소리를 내며 열렸다.
"니들 뭐하냐 지금?"
그리고 그곳엔 화난 얼굴의 박우진이 서 있었다. 내 머리도 잔뜩 헝클어져 있고 교복 블라우스 단추도 풀리기 직전인 꼴이어서(이건 의도한 건 아니었고, 내가 잘못 잠근 거였다) 충분히 오해할 법한 상황이긴 한데...
"야, 아니야! 아니라고!"
"뭐가 아닌데"
박우진이 성큼성큼 걸어와 가장 적극적으로 연기하고 있던 김지형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힘이 장난이 아닌지 김지형의 덩치도 상당했으나(박우진보다 한 뼘은 컸다) 사족을 못 쓰고 아등바등했다. 멍하니 지켜보다가 숨 넘어가기 직전으로 김지형이 켁켁거리자 드디어 정신이 번뜩 들었다.
"야, 박우진. 이거 연기야, 연기!"
"뭐?"
"연기라고, 다! 촬영!"
"근데 넌 왜 울고 있어."
"아니, 우는 연기 중이니까! 이거부터 놓고 얘기해. 애 죽어!"
다가가는 걸 박우진에 의해 제지당했다. 제대로 해명하라는 눈빛이었다. 얘가 이렇게까지 화난 모습은 처음 봤다. 아니, 화난 모습 자체가 처음인데, 잘못 건들였다간 아까처럼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모습이라니.
"우리가, 선생님들이 시켜서, 학교폭력 예방 교육 영상을 찍던 중이었어. 내가 피해자역이고 쟤네가 가해자. 너가 찍는 중에 들어온 거고."
"....."
웃으며 교실로 들어오던 여자애들이 바닥에 쓰러져있는 김지형을 보고 놀란 눈을 했다.
박우진이 싸한 표정으로 애들을 돌아봤다.
"아무리 촬영이어도 그렇지, 여자애 혼자 이런 거 찍게 냅둬도 되냐?"
그러고선 내 팔을 아프지 않게 잡고 끌었다. 뿌리치자면 뿌리칠 수 있을 정도의 힘이었는데, 나도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기에 그대로 따라 나갔다.
박우진은 복도 끝에 있는 계단으로 가서야 걸음을 멈췄다. 그가 내 풀어헤쳐진 머리를 제대로 다듬고, 내 교복을 보고 인상을 찌푸리며 자신의 교복 단추를 가리켰다. 단추를 제대로 여매라는 뜻이었다.
우리 둘다 한참을 아무 말 없이 있었다. 박우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내 마음대로 행동한 거 미안해."
"어. 넌 좀 미안해야 돼. 쟤네 얼굴 어떻게 봐, 이제."
박우진이 입술을 깨물었다.
"네가, 우는 게 너무 진심 같아서 제대로 상황 파악할 정신도 없었어."
"네가 우는 걸 보는 게...“
"진짜 너무 화나서...“
그러고선 고개를 숙였다. 그 머리를 쓰다듬고 싶은 충동이 강하게 들었다.
"그래도 고마워. 나 저거 진짜 찍기 싫었어."
정신차리니 이미 내 손은 박우진 머리 위에 있었다. 화들짝 놀라며 손을 뗐다. 박우진이 놀라지도 못하고 날 멍하게 쳐다보았다.
"미안, 미안!"
으, 내가 미쳤지. 발로 애꿎은 바닥을 쿵쿵 내려찧으며 후회했다.
그러고 있는데 박우진의 손이 내 머리 위로 올라왔다. 아까 머리가 덜 정리됐나 했지만 느껴지는 손길이 아까와는 달랐다. 내가 방금 한 것처럼 쓰다듬고 있었다. 어색하게 머리를 한번 쓰다듬은 그가 뒤돌아섰다. 사라지는 뒷모습을 보며 몇 분이고 멍하니 서있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