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름 치환은 받침있는 이름이 좋습니다! *
새 학년, 새 학기.
차디 차기만 했던 겨울이 다 끝났음을 알리는 듯 내가 앉은 창가자리에는 한 줄기 햇살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유난히 하늘이 맑았다. 따뜻한 봄 바람이 기분 좋게 내 뺨을 스쳤고, 선생님의 수업이 마치 자장가라도 되는 마냥 살랑살랑 졸음이 다가왔다.
그리고 아마 그 모든 설렘의 중심에는 네가 있었던 것 같다.
불X친구가 남자로 보이면 어떡하죠?
해라 씀.
" 김너밤 빨리 안 뛰어와? "
" 니가 와 이 새끼야! "
" 목청만 좋아서 하여튼. 쪽팔린다 조용히 좀 해라 "
" 넌 내가 쪽팔려? 그럼 친구는 왜 하냐 꺼져주세요~ "
함께하는 하교길이 익숙한듯, 수업이 마치면 너와 나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반을 향했다. 얼굴을 보자마자 서로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 난 우리는 흔히들 말하는 불..그거 친구다. 우진이네 어머니와 우리 엄마는 중고등학교 동창이셨고, 그 누구보다 친하셨다고 한다. 물론 지금까지도.
그리고 그 인연 - 악연인 것 같지만 - 덕분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낭랑 18세가 된 지금까지도 나와 박우진은 단 한번도 떨어져 있었던 적이 없었다.
아니 떨어지지 못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것 같다. 가족여행부터 명절, 휴가, 심지어는 이사까지 함께하며 어른들은 우리를 항상 붙여놓으셨다. 그것도 모자라 우리 엄마는 박우진에게 '미래 사위'라는 꼬리표까지 붙여 버렸다.
5살의 나는 처음 그 말을 듣자마자 질색팔색을 하며 냅다 울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런 나때문에 더 놀라고 당황했는지 박우진도 나와 함께 펑펑 울었더랬다.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이 바보랑 결혼을 해야해? 라고 외치며 서럽게 울어재끼는 나를, 안 그래도 쭉 찢어진 눈으로 째려보며 울먹거리는 박우진이. 13년이 지난 지금, 그 바보가 내 짝사랑 상대가 될 줄은 상상도 못한 채 말이다.
" 야 또 삐졌냐? 니가 존나 애기냐고 "
" ... "
" 지금 안 돌아보면 돼지 간식없음. "
" .. 아 쫌 지랄하지 말라ㄱ.. "
쪽팔리다는 말에 삐진척을 하며 혼자 쿵쿵 걸어가면, 내 한 발자국 뒤에서 쭉 따라오고 있었던 박우진이 말을 걸어왔다. 나는 굳이 대꾸하고 싶지 않아서 묵묵히 집으로 가는 내 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그러자 박우진은 내 어깨에 손을 턱 얹으며 나를 다시 불러왔다. 안 그래도 살이 쪄서 극도로 예민해져 있던 내게 그 놈의 돼지라는 호칭은 살인 충동을 불러 일으키기 충분했다. 다시 한번 열이 올라 다소 신경질적으로 그 놈을 돌아보면, 별안간 손가락 하나가 내 볼을 쿡 찔러왔다.
" 돌아봤네 돼지. "
그리고 볼과 함께 그 놈은 내 심장마저도 쿡쿡 찔러오는 듯 했다. 나쁜 새끼.
*
*
*
어제의 맑고 투명했던 하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말끔히 사라졌고, 오늘은 흐리고 어둑한 하늘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업의 시작과 동시에 톡톡 떨어지기 시작한 빗방울은 어느새 내 자리까지 넘어와 나의 책상을 적셨다.
시원한 소나기 소리가 들렸다.
내 교과서가 젖어들어가는 것 조차 상관없다며, 너는 또 그렇게 내 머리 속에 들어와 나를 한껏 헤집어 놓았다. 노크도 없이 불쑥 들어온 너는 도무지 나갈 의향이 없는 듯 했다. 너를 쫓아내보겠다는 생각으로 창문도 닫았고, 무작정 의자에 걸쳐있던 네 체육복을 배게삼아 책상에 엎드렸다.
시원한 네 향기가 훅 끼쳐왔다.
그렇게 너는 아예 내 머리 속에 눌러앉아 한참을 머물렀다. 억지로 잠을 청하려고 하면 네가 자꾸만 슬금슬금 올리는 입꼬리에 잠이 달아나곤 했다. 너는 어떻게 이렇게 단 한 순간도 나를 떠나지 않는거야.
똑똑-
누군가 내 책상을 두드렸다. 슬쩍 고개를 들어보니 수업이 끝났는지 어느새 그 놈이 내 옆자리에 앉아있었다.
젠장, 다 망했어.
" 이 새끼 또 잤네. 돼지꿈은 안 꿨냐? "
" .. 일어나자마자 시비야 미친놈 "
" 나 오늘 끝나고 애들이랑 축구해. "
" ... 비 오잖아. "
" 원래 축구는 비 오는 날이 더 재밌거든? "
" 진짜 미친새끼 "
학교가 끝나면 축구를 한다는 말을 전해오는 너는 말도 안되게 눈부셨다. 너는 벌써 꿈에서도 나를 마음대로 흔들어 놓았나보다. 김너밤 드디어 미쳤구나.
처음 느껴보는 감정에 당황해 입조차 떨어지지 않았고, 그런 내 눈을 박우진은 끝까지 바라봤다. 아득해지는 정신을 겨우 붙잡고 대답했다. 비 오잖아. 입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이미 심하게 떨려왔다.
내가 잠시 잠에 들었다는 점에 무척이나 감사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한 없이 떨리는 목소리를 들켰을지도 모르는 일 일테니.
" 혼자 가기 무서우면 조금만 기다리던가. 오빠 금방 이기고 데리러갈게. "
" 오빠가 다 뒤졌다 이 새끼야. 꺼져 혼자갈거야 "
오늘은 오랜만에 남아서 야자를 좀 해볼까, 했지만 오늘 더 이상 박우진을 보면 내 심장이 반으로 두 동강 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야자는 곱게 접어두기로 했다. 보고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뭐 어쩔 수 있나, 우리는 친군데
*
*
*
내 불안한 예감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지금처럼.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세차게 쏟아지던 비는 밤이 될 때까지도 그칠 줄을 몰랐고, 결국 하늘이 깜빡.
우르릉- 쾅
천둥번개가 쳤다. 하필 오늘 엄마아빠도 출장인데. 아까 박우진이 무서우면 조금만 기다리라고 했는데, 말을 들을껄 그랬다.
나는 세상에서 천둥번개를 가장 싫어한다. 어릴 때 부터, 하늘을 산산조각 내는 듯 쾅- 하고 땅을 울리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벌벌 떨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박우진은 그런 날이면 항상 나와 함께 잠을 설쳤다.
으, 또 그 놈이 떠올랐다.
윙- 하고 핸드폰이 울렸다. 끊어지지 않는 진동 소리를 보니 전화다. 엄마일까? 아니면 또 박우진일까.
" ..여보세요? "
" 어디야. "
" 집이지. 축구 끝? "
" 끝난지가 언젠데. 지금 9시거든? 갈게 지금 "
" 응 빨리와. "
보고싶어.
박우진은 별 다른 이야기 없이 지금 간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나름 목소리에 물기를 지운다고 노력했지만 내겐 역부족이었다. 두려움을 감추기에는 천둥 소리가 너무 컸다.
그렇게 아무도 없는 텅 빈 집에서 혼자 이불을 뒤집어쓰고 이어폰으로 무작정 시끄러운 노래를 듣고 있으면, 이내 익숙한 손길이 이불을 조심스레 걷어냈다. 보고싶었던 네가 내 앞에 나타났다.
" 밥 먹자 나와. "
" ..배 안 고픈데 "
" 난 배고파. 얼른 "
너의 익숙한 얼굴에, 익숙한 향기에 왠지 모르게 목 언저리가 매웠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이런 나를 너는 알아차렸는지, 그 큰 손으로 내 두 볼을 붙잡고 눈을 마주쳤다. 난 배고파, 얼른.
나는 알고 있었다. 너는 항상 축구가 끝나면 친구들과 편의점에서 저녁을 떼운다는 것을. 내가 제대로 된 밥을 먹지 않는 너를 걱정할 필요도 없이, 너는 정말 잘 먹었고 또 항상 건강했다. 그런 네가 9시가 넘은 이 시간에 배가 고플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네게 일말의 기대를 걸어봐도 괜찮을까.
" 돼지새끼 다 죽었네. 정신차리고 밥 먹어 "
방을 나서자 식탁에는 이모의 반찬들과 내가 좋아하는 김치찌개가 차려져 있었다. 집이 바로 맞은편인 덕분에 이모가 방금 차린 밥상을 따뜻하게 전해 받을 수 있었다. 박우진은 가만히 서 있는 나를 끌어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혔다.
" .. 맛있다 "
" 엄마가 너 많이 먹으라고 일부러 많이 했대. 너 이거 다 안 먹으면 간식 없음 "
" 간식같은거 안 먹어도 되거든? 누굴 진짜 돼지로 보나, "
" 알았어 알았어. 얼른 먹어 돼지 "
자꾸 돼지라며 시비를 걸어오는 박우진에 괜히 심술이 나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안 먹어 안 먹어. 그런 나를 보더니 그 놈은 말간 웃음을 지으며 내 숟가락을 들어 내 손에 쥐어 주었다. 별안간 붙잡힌 손목에 당황해서 빤히 박우진을 쳐다보면
왜, 먹여줘야 먹을래?
라는 말로 받아냈다. 깜짝 놀라 정신을 차리곤 이내 밥에 집중했다. 제가 건네주는 반찬들까지 잘 받아먹는 내가 기특했는지 박우진은 아예 턱을 괴고 나를 빤히 쳐다봤다. 덕분에 나는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고 허겁지겁 먹었지만.
" 아- 좋다. "
" 지금은 좀 괜찮냐. "
저녁을 다 먹으니 박우진이 식탁 정리까지 제가 다 끝내고 내가 앉아있던 소파 옆으로 와 앉았다. 나는 정말 자연스럽게 박우진의 다리를 배고 누웠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지만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늘 그랬듯이. 그럼 너도 자연스럽게 내 머리를 가지고 장난을 쳤다. 지금은 괜찮냐는 너의 질문에 단지 작게 고개를 끄덕인게 다였다. 입을 열면 또 떨리는 목소리가 나올까봐.
10시가 넘어가는 시간, TV에서는 드라마가 나오고 있었다. 요즘 제가 관심있게 보는 드라마였다. 남사친 여사친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박우진과 나의 이야기였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보기 시작했다. 지금 이 드라마를 튼 건 아마 너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으면 하는 바람인 것 같다.
드라마 속 남자주인공이 여자주인공에게 ' 큰일났다, 이제 너 우는 것도 예뻐보여 ' 라고 대사를 던졌다. 어느새 드라마 속 모든 상황에 박우진과 나를 대입시키고 있는 나였고, 이 장면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나는 벌써 빨개진 얼굴을 감추려고 네 다리 위에서 무작정 난동을 부렸다. 야, 너무 설레지 않냐
갑자기 눈 앞이 캄캄해졌다.
시원한 네 향기가 훅 끼쳐왔다. 박우진이 내 눈두덩이 위로 손을 올렸다.
" 야. "
" ... "
" 너도, "
" ... "
" 예뻐. "
그 말을 끝으로 우리는 아무 말도 없었다. 박우진도 내 눈에서 손을 떼지 않았고, 나도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이미 주체할 수 없이 쿵쿵 뛰는 심장소리가 네게 닿을 것만 같았다. 조용한 집 안에서는 내가 켜 놓은 TV소리만이 울려퍼졌다.
앞으로 천둥번개가 치는 날이 좋아질 것 같다.
불X친구가 남자로 보이면 어떡하죠? A - fin
차디 차기만 했던 겨울이 다 끝났음을 알리는 듯 내가 앉은 창가자리에는 한 줄기 햇살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유난히 하늘이 맑았다. 따뜻한 봄 바람이 기분 좋게 내 뺨을 스쳤고, 선생님의 수업이 마치 자장가라도 되는 마냥 살랑살랑 졸음이 다가왔다.
그리고 아마 그 모든 설렘의 중심에는 네가 있었던 것 같다.
불X친구가 남자로 보이면 어떡하죠?
해라 씀.
" 김너밤 빨리 안 뛰어와? "
" 니가 와 이 새끼야! "
" 목청만 좋아서 하여튼. 쪽팔린다 조용히 좀 해라 "
" 넌 내가 쪽팔려? 그럼 친구는 왜 하냐 꺼져주세요~ "
함께하는 하교길이 익숙한듯, 수업이 마치면 너와 나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반을 향했다. 얼굴을 보자마자 서로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 난 우리는 흔히들 말하는 불..그거 친구다. 우진이네 어머니와 우리 엄마는 중고등학교 동창이셨고, 그 누구보다 친하셨다고 한다. 물론 지금까지도.
그리고 그 인연 - 악연인 것 같지만 - 덕분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낭랑 18세가 된 지금까지도 나와 박우진은 단 한번도 떨어져 있었던 적이 없었다.
아니 떨어지지 못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것 같다. 가족여행부터 명절, 휴가, 심지어는 이사까지 함께하며 어른들은 우리를 항상 붙여놓으셨다. 그것도 모자라 우리 엄마는 박우진에게 '미래 사위'라는 꼬리표까지 붙여 버렸다.
5살의 나는 처음 그 말을 듣자마자 질색팔색을 하며 냅다 울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런 나때문에 더 놀라고 당황했는지 박우진도 나와 함께 펑펑 울었더랬다.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이 바보랑 결혼을 해야해? 라고 외치며 서럽게 울어재끼는 나를, 안 그래도 쭉 찢어진 눈으로 째려보며 울먹거리는 박우진이. 13년이 지난 지금, 그 바보가 내 짝사랑 상대가 될 줄은 상상도 못한 채 말이다.
" 야 또 삐졌냐? 니가 존나 애기냐고 "
" ... "
" 지금 안 돌아보면 돼지 간식없음. "
" .. 아 쫌 지랄하지 말라ㄱ.. "
쪽팔리다는 말에 삐진척을 하며 혼자 쿵쿵 걸어가면, 내 한 발자국 뒤에서 쭉 따라오고 있었던 박우진이 말을 걸어왔다. 나는 굳이 대꾸하고 싶지 않아서 묵묵히 집으로 가는 내 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그러자 박우진은 내 어깨에 손을 턱 얹으며 나를 다시 불러왔다. 안 그래도 살이 쪄서 극도로 예민해져 있던 내게 그 놈의 돼지라는 호칭은 살인 충동을 불러 일으키기 충분했다. 다시 한번 열이 올라 다소 신경질적으로 그 놈을 돌아보면, 별안간 손가락 하나가 내 볼을 쿡 찔러왔다.
" 돌아봤네 돼지. "
그리고 볼과 함께 그 놈은 내 심장마저도 쿡쿡 찔러오는 듯 했다. 나쁜 새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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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맑고 투명했던 하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말끔히 사라졌고, 오늘은 흐리고 어둑한 하늘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업의 시작과 동시에 톡톡 떨어지기 시작한 빗방울은 어느새 내 자리까지 넘어와 나의 책상을 적셨다.
시원한 소나기 소리가 들렸다.
내 교과서가 젖어들어가는 것 조차 상관없다며, 너는 또 그렇게 내 머리 속에 들어와 나를 한껏 헤집어 놓았다. 노크도 없이 불쑥 들어온 너는 도무지 나갈 의향이 없는 듯 했다. 너를 쫓아내보겠다는 생각으로 창문도 닫았고, 무작정 의자에 걸쳐있던 네 체육복을 배게삼아 책상에 엎드렸다.
시원한 네 향기가 훅 끼쳐왔다.
그렇게 너는 아예 내 머리 속에 눌러앉아 한참을 머물렀다. 억지로 잠을 청하려고 하면 네가 자꾸만 슬금슬금 올리는 입꼬리에 잠이 달아나곤 했다. 너는 어떻게 이렇게 단 한 순간도 나를 떠나지 않는거야.
똑똑-
누군가 내 책상을 두드렸다. 슬쩍 고개를 들어보니 수업이 끝났는지 어느새 그 놈이 내 옆자리에 앉아있었다.
젠장, 다 망했어.
" 이 새끼 또 잤네. 돼지꿈은 안 꿨냐? "
" .. 일어나자마자 시비야 미친놈 "
" 나 오늘 끝나고 애들이랑 축구해. "
" ... 비 오잖아. "
" 원래 축구는 비 오는 날이 더 재밌거든? "
" 진짜 미친새끼 "
학교가 끝나면 축구를 한다는 말을 전해오는 너는 말도 안되게 눈부셨다. 너는 벌써 꿈에서도 나를 마음대로 흔들어 놓았나보다. 김너밤 드디어 미쳤구나.
처음 느껴보는 감정에 당황해 입조차 떨어지지 않았고, 그런 내 눈을 박우진은 끝까지 바라봤다. 아득해지는 정신을 겨우 붙잡고 대답했다. 비 오잖아. 입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이미 심하게 떨려왔다.
내가 잠시 잠에 들었다는 점에 무척이나 감사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한 없이 떨리는 목소리를 들켰을지도 모르는 일 일테니.
" 혼자 가기 무서우면 조금만 기다리던가. 오빠 금방 이기고 데리러갈게. "
" 오빠가 다 뒤졌다 이 새끼야. 꺼져 혼자갈거야 "
오늘은 오랜만에 남아서 야자를 좀 해볼까, 했지만 오늘 더 이상 박우진을 보면 내 심장이 반으로 두 동강 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야자는 곱게 접어두기로 했다. 보고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뭐 어쩔 수 있나, 우리는 친군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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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불안한 예감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지금처럼.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세차게 쏟아지던 비는 밤이 될 때까지도 그칠 줄을 몰랐고, 결국 하늘이 깜빡.
우르릉- 쾅
천둥번개가 쳤다. 하필 오늘 엄마아빠도 출장인데. 아까 박우진이 무서우면 조금만 기다리라고 했는데, 말을 들을껄 그랬다.
나는 세상에서 천둥번개를 가장 싫어한다. 어릴 때 부터, 하늘을 산산조각 내는 듯 쾅- 하고 땅을 울리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벌벌 떨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박우진은 그런 날이면 항상 나와 함께 잠을 설쳤다.
으, 또 그 놈이 떠올랐다.
윙- 하고 핸드폰이 울렸다. 끊어지지 않는 진동 소리를 보니 전화다. 엄마일까? 아니면 또 박우진일까.
" ..여보세요? "
" 어디야. "
" 집이지. 축구 끝? "
" 끝난지가 언젠데. 지금 9시거든? 갈게 지금 "
" 응 빨리와. "
보고싶어.
박우진은 별 다른 이야기 없이 지금 간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나름 목소리에 물기를 지운다고 노력했지만 내겐 역부족이었다. 두려움을 감추기에는 천둥 소리가 너무 컸다.
그렇게 아무도 없는 텅 빈 집에서 혼자 이불을 뒤집어쓰고 이어폰으로 무작정 시끄러운 노래를 듣고 있으면, 이내 익숙한 손길이 이불을 조심스레 걷어냈다. 보고싶었던 네가 내 앞에 나타났다.
" 밥 먹자 나와. "
" ..배 안 고픈데 "
" 난 배고파. 얼른 "
너의 익숙한 얼굴에, 익숙한 향기에 왠지 모르게 목 언저리가 매웠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이런 나를 너는 알아차렸는지, 그 큰 손으로 내 두 볼을 붙잡고 눈을 마주쳤다. 난 배고파, 얼른.
나는 알고 있었다. 너는 항상 축구가 끝나면 친구들과 편의점에서 저녁을 떼운다는 것을. 내가 제대로 된 밥을 먹지 않는 너를 걱정할 필요도 없이, 너는 정말 잘 먹었고 또 항상 건강했다. 그런 네가 9시가 넘은 이 시간에 배가 고플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네게 일말의 기대를 걸어봐도 괜찮을까.
" 돼지새끼 다 죽었네. 정신차리고 밥 먹어 "
방을 나서자 식탁에는 이모의 반찬들과 내가 좋아하는 김치찌개가 차려져 있었다. 집이 바로 맞은편인 덕분에 이모가 방금 차린 밥상을 따뜻하게 전해 받을 수 있었다. 박우진은 가만히 서 있는 나를 끌어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혔다.
" .. 맛있다 "
" 엄마가 너 많이 먹으라고 일부러 많이 했대. 너 이거 다 안 먹으면 간식 없음 "
" 간식같은거 안 먹어도 되거든? 누굴 진짜 돼지로 보나, "
" 알았어 알았어. 얼른 먹어 돼지 "
자꾸 돼지라며 시비를 걸어오는 박우진에 괜히 심술이 나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안 먹어 안 먹어. 그런 나를 보더니 그 놈은 말간 웃음을 지으며 내 숟가락을 들어 내 손에 쥐어 주었다. 별안간 붙잡힌 손목에 당황해서 빤히 박우진을 쳐다보면
왜, 먹여줘야 먹을래?
라는 말로 받아냈다. 깜짝 놀라 정신을 차리곤 이내 밥에 집중했다. 제가 건네주는 반찬들까지 잘 받아먹는 내가 기특했는지 박우진은 아예 턱을 괴고 나를 빤히 쳐다봤다. 덕분에 나는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고 허겁지겁 먹었지만.
" 아- 좋다. "
" 지금은 좀 괜찮냐. "
저녁을 다 먹으니 박우진이 식탁 정리까지 제가 다 끝내고 내가 앉아있던 소파 옆으로 와 앉았다. 나는 정말 자연스럽게 박우진의 다리를 배고 누웠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지만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늘 그랬듯이. 그럼 너도 자연스럽게 내 머리를 가지고 장난을 쳤다. 지금은 괜찮냐는 너의 질문에 단지 작게 고개를 끄덕인게 다였다. 입을 열면 또 떨리는 목소리가 나올까봐.
10시가 넘어가는 시간, TV에서는 드라마가 나오고 있었다. 요즘 제가 관심있게 보는 드라마였다. 남사친 여사친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박우진과 나의 이야기였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보기 시작했다. 지금 이 드라마를 튼 건 아마 너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으면 하는 바람인 것 같다.
드라마 속 남자주인공이 여자주인공에게 ' 큰일났다, 이제 너 우는 것도 예뻐보여 ' 라고 대사를 던졌다. 어느새 드라마 속 모든 상황에 박우진과 나를 대입시키고 있는 나였고, 이 장면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나는 벌써 빨개진 얼굴을 감추려고 네 다리 위에서 무작정 난동을 부렸다. 야, 너무 설레지 않냐
갑자기 눈 앞이 캄캄해졌다.
시원한 네 향기가 훅 끼쳐왔다. 박우진이 내 눈두덩이 위로 손을 올렸다.
" 야. "
" ... "
" 너도, "
" ... "
" 예뻐. "
그 말을 끝으로 우리는 아무 말도 없었다. 박우진도 내 눈에서 손을 떼지 않았고, 나도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이미 주체할 수 없이 쿵쿵 뛰는 심장소리가 네게 닿을 것만 같았다. 조용한 집 안에서는 내가 켜 놓은 TV소리만이 울려퍼졌다.
앞으로 천둥번개가 치는 날이 좋아질 것 같다.
불X친구가 남자로 보이면 어떡하죠? A -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