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명 좀 해보라고요."
영민의 손에 제 얼굴이 들리자, 여주는 고개를 모로 돌려버렸다. 꼬박 2년하고도 반년만에서야 만난 스폰서의 지독함에
처음으로 싫은 소리를 냈더니, 손이 날아왔다. 뺨이 온통 화끈거렸다.
'임영민 만났다고 정신 못 차리나봐, 여주씨.'
'.....그런거, 아니에요.'
그 입에서 영민의 이름이 울리는 게 싫어서 여주는 체념한 듯 남자가 원하는대로 이끌려 다녔다.
남자는 그제야 고분고분해진 제가 마음에 드는지, 제게 다시 부드럽게 입을 맞춰왔다.
차라리 혀를 깨물고 죽어버렸으면 좋았을텐데.
죽으면 모두 사라질까.
죽을 용기도 없어 이렇게 숨만 쉬고 있는 주제에.
남자가 잠이 들자 여주는 그제야 제 핸드폰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영민에게서 온 전화와 메세지 같은 것들이 그래도 그나마, 제가 살아있는 이유가 되었다.
어쩌자고, 나는 나보다 너를 더 사랑해버렸을까. 영민아.
애초에 정답을 찾을 수 없는 질문이었다. 어지러움과 피곤함이 한데 몰려와 여주는 까무룩 잠이 들었었다.
새벽에 일어나서는 그렇게 정처없이 거리를 헤맸으니, 얼굴이 그렇게 엉망인가에 대해 생각조차 못했다.
그래서, 제 앞에서 저대신 불같이 화를 내고 있는 영민의 품에 안겨들어 울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허락되지 않은 범위였다. 유효하지 않은 범위였고.
"..보는 그대로야, 뭘 더 설명할까."
입안이 온통 까끌거려서 여주는 말을 내뱉는 사이에도 침을 삼켰다. 저를 삐딱하게 내려다보고 있는 영민의 의중을 알 수 없었다.
너는, 왜 여기서 나를 기다리고 있어서.
내가 너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것들을 낱낱이 쥐고 흔들어버리는 걸까.
"누나, 사람 참 힘빠지게 한다. 진짜."
영민은 허탈하다는 듯 제게 말해왔다. 제 앞에 있는 여자가 뺨을 맞고 왔다.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서 고개를 내젓는 여자는 제게 다가오지마라 선을 긋고 벽을 쌓는다.
나는 매번 그 높은 벽앞에서 아무것도 못한채 이렇게 화만 내야되나, 언제까지. 언제까지.
"....내가 없으면 가야지, 뭘 멍청히 기다리고 있어."
"....하, 나 멍청한거 이제 알았어?"
그러니까 이렇게 병신같이 당신 찾아오고나 있지.
자조적인 제 말투에 여주의 안색이 더 흐려졌다.
누구인진 몰라도 그렇게 엉망으로 당한 꼴을 하고와선, 이제는 제 앞에서 눈물까지 흘리려고 한다.
너를 사랑하는 내 앞에서. 내 복장이 터지라고 이러는거지, 지금.
당신만 보면 화가 나. 화가 나는데, 당신을 놓질 못해.
덜컥 눈물이 나려고 들어서 영민은 눈을 치켜떴다.
당신을 왜 나는 매번 지키지를 못해.
결국은 제 자신에게로 비난의 화살이 돌려졌다.
"...이제 그만 하자."
영민과 눈을 마주치며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나를 더이상 찾지마.
너는 네 갈길을 가고, 나는 내 갈길을 가자. 몰랐던 사람처럼.
영민은 그 말에 죽일듯이 저를 노려봤다.
"수만번해도 그게 안된다고."
머리로는 수십번도 더 이곳으로 향하는 내 발길을 돌리고 돌려세웠다고.
근데 안된다는데, 어떻게 해. 나도 내가 내마음대로 안되는 걸 어쩌냐고.
..애초에 우리가 뭘 시작했긴 했어?
".....네가 애야?"
영민은 고작 한살을 나이랍시고 운운하는 여주가 우스웠다.
여주는 고작 한살차이인 영민에게 이런 유치한 이야기를 하는 제가 웃겼다.
"..진짜 내 마음대로 하는 게 뭔지 보여줘요?"
영민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저를 계단이 있는 벽으로 거세게 밀어붙였다.
영민의 숨결이 제게 닿아왔다. 여주는 영민의 안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쳤다.
".......비켜."
영민은 여주의 말을 듣고도 요지부동이었다. 영민의 입술이 제게 닿기까지 고작 한뼘이나 남았을까.
결국 제게 닿아온 영민의 입술이 거칠었다. 아랫입술을 문 영민이 그 틈새를 가로질렀다. 뜨거웠다.
입술이 다 데여버릴 것처럼. 제 입안으로 들어온 영민의 혀가 외설적이었다.
제 혀를 옭아매는 눈 앞의 영민이, 사실은 감당할 수 없을만큼.
제 인생을 다 내어줄만큼.
...좋았다.
영민의 혀가 닿을때마다 여주는 정신없이 고개를 물리려고 했다. 피해봐도 영민의 손바닥 안이었지만.
영민은 제 혀를 끝없이 옭아맬 작정이었다.
정신을 쏙 빼놓을만큼 뜨거운 키스가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영민을 밀어내는 여자의 손길이 잠잠해졌다.
영민의 팔에 어설프게 자리한 손을 영민의 큰손이 이내 깍지껴 잡아왔다.
숨이 차 영민에게 붙잡힌 손을 흔들어도 영민은 저를 놓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나도 널 이대로 놓지 않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하기 무섭게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넣어뒀던 핸드폰이 웅웅거렸다.
모든 촉각이 곤두섰다. 제 스폰서임이 분명했다.
영민은 제 신경이 딴 곳으로 향한다는 걸 눈치챈건지 좀전보다 더 입술을 붙여왔다.
벽에 제 등이 닿은지는 오래전이었다.
"딴 생각할 여유도 있나보네."
그렇게 말을 마친 영민이 제게 여전히 끼고있던 손을 풀며 망설임없이 손을 뻗었다. 의중을 알 수 없어
눈을 꾹 감으면 영민의 손이 제 주머니로 들어왔다 빠져나가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돌려줘."
영민의 손아귀에 제 핸드폰이 들어갔다. 영민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여전히 부르르 떨고있는 제 핸드폰 액정위로 눈치없이 '황대현'이라는 이름이 둥둥 떠다녔다.
영민은 생각했다, 왜 제 회사의 부실장 이름이 눈에 보이는걸까. 하고.
"...한번만 묻는다."
거짓말할 생각은 말고. 나 돌기 전에.
"....."
"네가 몸 대준 새끼가. 부실장이야?"
"...."
"말해봐. 네 스폰서인지, 뭔지 그 지랄맞은거! 이새끼냐고 묻잖아!"
그 목소리에 대답을 할 순 없었다.
멈춰있길 바랬던 시곗바늘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찌통이지만...댓글 달아주셔서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