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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명 브래지어 사건 이후, 박우진은 부쩍 말이 줄었다. 괜히 어색해서 이런 말 저런 말을 붙여봤지만 단답이거나 고개만 끄덕일 뿐, 박우진은 나와 눈도 제대로 못 맞췄다. 시간이 약이겠지. 생각하고 나도 별 신경은 안 썼다.
토요일이다. 선배를 보기로 한 날. 유별나게 사람 대하는 걸 어려워하고 친구 만드는 일을 꺼리는 나지만, 왠지 모르게 선배 앞에서는 그런 경계심이 다 허물어져버린다. 선배에겐 모든 걸 다 말할 수 있을 것 같은 이상한 용기도 생긴다. 물론 그럴 일 없겠지만. 선배의 답장하는 말투는 실제 말투와 거의 비슷했다. 띄어쓰기와 맞춤법을 잘 지키고 귀여운 이모티콘을 자주 보냈다. 연락한 지 겨우 하루밖에 되지 않았지만, 선배에 대해 좀 더 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든다.
"어디 가?"
"…아, 깜짝아."
불쑥 튀어나온 목소리 때문에 마스카라 쥔 손가락을 삐끗했다. 눈 끝이 검게 번져버렸다.
"죽을래?"
"뭐가. 어디 가냐고 물어보지도 못해?"
"네가 말 시켜서 화장 번졌잖아!"
"언제는 말 걸어달란 표정이었으면서."
박우진이 입을 삐죽거리면서 대꾸했다. 할 말 잃게 만든다, 정말…. 다시 집중해서 마스카라를 바르는데, 주변에 도깨비불이 두둥실 떠다니기 시작했다.
"박우진. 지금 나 나갈 준비하는 거 안 보여? 정신 사나우니까 도깨비불 좀 어떻게 해."
"싫은데."
"…액자 깨부수는 수가 있어."
"액자 깨질까 봐 무서워서 담요 속에 파묻은 게 누군데?"
"……부탁인데 내 흑역사 언급 좀 그만해줄래."
"액자 깨져도 나 안 죽어. 기억을 잃거나 살짝 다치거나, 그런 일시적인 장애는 있겠지만."
섀도우는 무슨 색으로 바르지? 아, 그냥 바르지 말까. 선배가 너무 꾸며서 나왔다고 생각하면 어떡해. 근데 평소랑 똑같은 모습으로 가도 예의가 아니잖아. 고민하다가, 무난한 색깔을 골라 눈두덩이에 발랐다. 한동안 잠잠하다 싶었더니, 이젠 도깨비불이 내 머리 위로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다. 환장하겠다. 그만두라는 뜻으로 박우진을 째려봤다.
"왜 이렇게 괴롭히는데? 어제 치킨도 사줬잖아. 뭐가 문제야."
"나랑 안 놀아주잖아."
"……."
"어디 가. 왜 대답 안 해줘?"
"과제하러 간다, 왜!"
"과제하러 가는데 왜 그렇게 예쁘게 꾸며."
뭐야, 갑자기. 박우진은 정말 알다가도 모를 도깨비다.
립스틱까지 바르고 핸드폰을 챙겼다. 약속시간까지 많이 남았지만, 늦고 싶지 않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고갤 끄덕였을까? 같이 가도 되냐는 말을, 다른 사람이 했더라도 난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을까. 잘 모르겠다. 며칠 사이 선배를 만나고, 알게 된 게 왠지 꿈만 같다. 어쩌면 도깨비가 내 천운이라는 사실보다도 더.
"다녀올게. 집 잘 지키고 있어."
"빨리 와, 심심하니까."
"알았어."
습관처럼 컨버스에 발을 넣을 뻔했다. 오늘은 치마도 입었으니까, 오랜만에 굽 있는 구두를 신어야겠다. 마음을 먹고 신발장을 뒤져 구두를 찾았다. 정말 특별한 날이 아니면 신지 않는 구두. 먼지가 쌓여있어 입김을 훅 불었다.
현관에서 박우진에게 손을 흔드는데 도깨비불 색깔이 이상했다. 이글거리던 붉은색에서 파란색으로 바뀌고 있었다. 상태도 약간 흐물흐물거리는 것 같고.
"박우진. 네 도깨비불 어디 아픈 거 같은데?"
"아, 신경 쓰지 마. 심심하면 이래."
"그래? 하여튼, 나 갔다올게."
오랜만에 신는 구두 때문에 다리가 휘청거렸다. 문을 닫았다.
"……심심한 게 아니라 슬픈 건데."
문 닫는 소리에 가려져, 그 목소리는 듣지 못했다.
역으로 가는 길, 선배에게서 연락이 왔다. 잘 오고 있냐는 문자였다. 나는 픽 웃고는 핸드폰 키패드를 두드렸다. 지금 가고 있어요. 문자를 보낸 지 얼마 되지 않아 선배의 답장이 도착했다. 조심히 와. 신기하다. 어떻게 글자만 보는데도 이렇게 두근거리고 신이 날 수 있지. 태어나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 생소해서 이런 내가 낯설다.
선배랑 하고 싶은 얘기가 많다. 10대 마지막 밤엔 뭘 했는지, 처음 대학교에 입학했을 때 기분은 어땠는지, 어떤 아르바이트를 해봤는지, 원래 모든 사람에게 그렇게 다정한지, 앞으로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선배가 다 말해줬으면 좋겠다. 그런데 반대로 생각해보면. 난 이 모든 것에 대해 덤덤하게 고백할 수 있을까. 난 10대 마지막 밤에 앞으로 아버지 안 보고 살게 해달라고 기도한 후 잠에 들었다. 처음 대학교에 입학했을 땐 조용히 졸업하고 싶단 생각뿐이었다. 생활비 걱정에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했고, 난 여태껏 만났던 모든 사람에게 다정하지 않았다. 이게 나다. 입술을 깨물었다. 이게 살인자의 딸이 살아온 흔적이었다. 최대한 독하고 억척스럽게.
약속장소에 가까워질수록 괜히 머리칼을 만지작거렸다. 왠지 긴 하루가 될 것 같아서. 저 멀리에 선배가 보였다. 핸드폰에 시선을 박고 있던 선배는, 인기척에 고개를 들어 정면을 봤다. 눈이 마주치고, 선배는 늘 보이는 표정으로 웃었다.
"오는데 별 일 없었어요?"
"음, 주말이라 버스가 좀 밀리더라구요."
"오는 동안 심심했죠? 갈 땐 데려다줄게요."
"안 그러셔도 되는데……."
또 그 거리였다. 손이 닿을 듯한, 하지만 절대로 닿진 않는 애매한 거리. 영화관으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에 나란히 섰다. 선배는 피부도 희고, 키도 크구나. 멍하게 생각 중이었다. 인기 많겠다. 그런 생각까지 미치니 서글퍼졌다.
"원래 과제 같은 건 주로 혼자 하는 편인가 봐요."
"네……."
"잘 됐다. 나도 여태까지 혼자 했는데."
"……."
"앞으로 같이 하면 되겠네."
심장이 작동 이상을 일으킨 것처럼 뛰기 시작했다. 심장이 너무 세게 뛰어서, 가슴이 뜨거워질 지경이었다. 이런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선배는 계속해서 가벼운 웃음을 걸치고 있었다.
"근데 무슨 교양 듣길래, 과제가 감상문이에요?"
"아, '영화 기초와 이해'요. 따로 듣고 싶은 거 있었는데 수강신청 망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설마 홍 교수님 수업이에요?"
"네, 맞아요."
"친구가 그 교수님 완전 깐깐하다고 했는데. 어떡해, 잘못 걸렸다."
"강의는 나름 재밌어서 괜찮아요."
영화 시작까지 시간이 남아서 느긋하게 팝콘을 사고 준비된 테이블에 앉았다. 시시콜콜한 학교 얘기를 시작했다. 한편으론 마음이 무거웠다. 선배 주변엔 사람이 많은 것 같았기에. 선배는 나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인 듯했다. 사람을 좋아하고, 사교성이 뛰어난 성격. 나와는 정반대였다. 선배가 혹시라도 동기들이나 술자리에 대해 묻는다면 난 달리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그런 나를 보며, 선배는 어떤 생각을 할까. 불현듯 두려워졌다.
우리가 보기로 한 영화는 무난한 로맨스였다. 선배가 치마 입은 날 슬쩍 쳐다보더니 입고 온 가디건을 벗어 무릎 위에 올려주었다. 감사합니다. 작게 속삭이자, 선배가 대답 대신 환하게 웃었다. 열 오른 얼굴을 들키지 않으려고 일부러 스크린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팝콘을 우물거렸다. 선배와 같이 먹는 팝콘은, 달았다. 달아서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아, 미안해요."
팝콘 속에서 손이 스쳤다. 선배가 옆에서 화들짝 놀라더니 이내 미안하다며 속닥속닥 말을 꺼냈다. 스크린에서, 주인공들이 서로의 등허리를 꼬옥 껴안고 놔주지 않고 있었다. 곧 입을 맞출 기세였다. 영화관 안이 적막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괜찮다고 대꾸를 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이 공기와 이 온도를 잊고 싶지 않아서였다. 두 번째로 손이 스쳤을 때, 선배는 사과하지 않았다.
영화가 해피엔딩으로 끝이 나고, 팝콘은 절반 쯤 비워져 있었다. 기분이 산뜻했다. 선배가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뭐 먹으러 갈래요?"
"…어, 지금요?"
"왜요?"
"……."
"이따 또 누구 만날 사람 있어요?"
선배가 드물게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순간 머릿속으로 박우진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박우진이 빨리 오라고 했는데. 나는 잠깐 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선배가 그런 나를 쳐다보더니 입술을 깨물면서 말했다.
"바쁘면 가도 돼요. 난 그냥 후배님한테 맛있는 거 사주고 싶어서."
"……."
"나야 좋죠. 핑계 대면서 다음에 또 볼 수 있으니까."
"…약속은 없는데, 괜히 선배님 시간 뺏는 것 같아서요."
"그런 걱정이면 같이 가요, 맛있는 거 사줄게."
이상한 일이었다. 박우진에게 묘한 미안함이 생겼다. 내가 없어도 박우진은 알아서 잘 있을 텐데. 박우진에게 내가 필수적인 존재도 아닌데. 박우진이 내가 없으면 살지 못하는 애도 아닌데. 어정쩡한 표정으로 선배의 근처로 갔다. 선배는 피부도 희고, 키도 크고, 좋은 냄새가 났다. 좋은 냄새가 많이 났다. 잠시 박우진 생각은 잊어야겠다.
선배가 자주 간다는 파스타가게로 가는 동안, 우리는 영화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선배에게 기억이 남는 장면 몇 개를 얘기했는데 선배가 픽 쓰러지는 웃음을 지었다. 궁금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어쩐지 그 장면 나올 때마다 엄청 집중하더라, 하면서 선배가 웃음을 터뜨렸다. 선배가 영화 대신에 내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왜인지 감정이 주체가 되질 않았다. 잔잔한 어떤 떨림이, 내 몸을 덮치고 있었다.
"나 그거 주면 안돼요?"
"그거요?"
"영화예매권이요."
파스타가게에 도착해 주문을 하고, 선배가 첫 번째로 꺼낸 말은 영화예매권을 가지고 싶다는 소리였다. 의아해하면서도 선배에게 예매권을 넘겨주었다.
"간직하고 싶어서."
선배가 예매권을 소중하게 접으면서 말했다. 어쩜 이 사람은, 이렇게 병일 정도로 다정할 수가 있나.
주문한 음식이 나오고 선배가 접시와 포크를 내게 챙겨주었다. 선배 앞이라 입에 묻히지 않게 조심해가며 먹는데 다 소용없었나 보다. 선배가 묻었다며 손가락으로 입술 근처를 닦아주었다. 내가 이런 기분을 느껴도 될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아늑한 느낌이었다. 선배와 어떤 특정한 관계가 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편하게 이야길 나누고 마주치면 인사를 하는, 그런 사이로 지내고 싶었다. 내가 그래도 될까. 지금 내게 허락된 게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그래서 허락을 구하고 싶었다. 내가 그래도 되는지에 대해서.
"근데 그 날, 어디 아프셨어요?"
"그 날?"
"선배님이 죽 사가신 날이요. 근처에 병원도 있고 해서, 보통 평소엔 환자 분들이나 가족 분들이 손님으로 많이 오시거든요."
"아아……."
선배가 잠시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냥, 그 날따라 죽이 먹고 싶었어요."
"……."
"그런 날 있잖아요. 하고 싶은 대로 해야 직성 풀리는 날. 그 날이 그랬어요. 이상하게 그 날따라 부딪친 사람 물건도 주워주고 싶고, 죽도 먹고 싶고, 그러더라니까."
선배는 아무렇지 않게, 덤덤하게 말을 마쳤다. 덤덤하지 않아도 되는 부분에서 덤덤한 거, 박우진이랑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선배에게 묻고 싶은 것이 생겼다.
"선배."
"네."
"운명을 믿으세요?"
하늘이 정해준 운명이 천운이고, 그 천운이 나와 박우진이었다. 하늘이 정해준 천운이 서로의 이름을 아주 단단하게 묶어놓았다. 서로가 서로의 이름을 서로의 이름처럼 가지고 살아가게 만들었다. 나는 선배가 고개를 저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운명일 수는 없는 거니까. 나와 선배가 운명이 될 수는 없으니까. 운명을 빗겨가, 그 틈에서 새로운 연을 만들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천운보다 무거운 필연을 만들어갈 수는 없는 걸까. 선배는 내 목소릴 듣고 잠깐 말이 없었다. 그저 가만 웃기만 했다.
"운명 대신에 사랑을 믿어요."
나는 선배의 대답을 듣고 활짝 웃었다.
그 후로 카페까지 가 좀 더 많은 이야길 나누었다. 이렇게 캄캄해지기까지 누구와 단 둘이 있어본 적은 처음이었다. 할머니를 잃고 처음으로 누군가를 믿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배가 집까지 데려다주는 길이 나긋나긋하고, 평화로웠다. 잠시 멈춰서 별 하나하나를 세고 돌아가도 전혀 시간이 아깝지 않을 것 같았다. 다 왔어요. 내 말에 선배가 걸음을 멈췄다.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이는데, 갑자기 선배 옆으로 그림자 하나가 생겼다.
박우진이었다. 도깨비감투를 꾸욱 쥐고 있는 박우진. 뜬금없는 인기척에 선배가 옆을 돌아보았다. 여름이 다가오는데 주변 공기가 싸늘했다.
"누나."
"……."
"시간이 많이 늦었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박우진의 표정이 나를 심판하고 있었다. 심상치 않게 굳어진 얼굴이 나를 총이라도 쏠 것처럼 주시했다. 말을 지어내서라도 선배에게 변명을 해야 했다. 나를 누나라고 부르는, 나의 집을 알고 있는 이 아이에 대한 명확한 변명.
"…과, 과외해주는 학생인데요, 제가 안 와서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나 봐요……. 아, 오늘 과외가 있었던 걸 깜빡했네."
"과외를 후배님 집에서 해요?"
"……네, 교재가 저희 집에 많아서요."
어설픈 변명이었다. 제발 믿어주길……. 선배가 시선을 박우진에게로 돌렸다. 사촌동생 대하듯 부드러운 표정을 박우진이 삐딱하게 올려보는 중이었다. 나는 박우진이 무슨 짓이라도 저지를까 싶어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부럽다. 좋은 누나한테서 과외도 받고. 이름이 뭐예요?"
"박우진."
공기는 여전히 싸늘했다. 기분 탓인지, 아니면 진짜로 쌀쌀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박우진이 머뭇거리지 않고 짧게 답했다. 계약관계에 있지 않은 자가 도깨비의 이름과 얼굴을 알게 되면 큰 화를 입는다고 했다. 나는 박우진이 무슨 생각으로 자신의 이름을 똑똑한 발음으로 알려주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박우진의 천운은 나였다. 선배는 박우진의 천운이 될 수 없다. 이제 화를 입을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마음이 답답해졌다.
선배가 손을 흔들며 등을 돌렸다. 구두 신은 발목이 아팠다. 나는 박우진을 원망스럽게 쳐다보다가, 이내 혼자 집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보이는 건, 색이 파랗게 선명한 도깨비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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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32입니다!
날이 너무 덥죠. ㅜㅜ 그래서 전 어제 고등학생 이후로 하지 않았던 단발을 했어요!
조금 어색하지만 한결 낫네요. ㅎㅎ
지난 글에 암호닉 문의를 주신 독자 님이 계셨었는데, 암호닉은 언제나 감사한 마음으로 받고 있어요!
혹시나 신청해주실 분이 계시면 댓글에 함께 써주세요! ㅎㅎ
이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과, 봉봉 님 정말 감사드립니다.
편안한 밤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