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전학을 했다. 친구 관계도 원만하고 학교에 불만이 있던 것도 아니었지만, 지하철을 갈아타고 엄청난 경사를 걸어 올라가는 것이 고3이 되면서 체력적으로 부담이 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전학을 간 학교도 집에서 그리 가까운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고3이 되면 새로운 학교에 적응을 하는 것이 공부에 집중하는 데에 방해가 된다고 하여 전학을 잘 하지 않는다고들 하지만, 다행히도 원래 내가 사는 동네의 학교로 가는 것이라 친구들이 많기 때문에 그런 걱정은 전혀 되지 않았다.
처음으로 새로운 학교에 등교를 하던 날, 여고에서 2년을 지내다 공학에서 남자애들과 지낼 생각을 하니 뭔가 모르게 설레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생각해도 참 주책이다. 이러려고 학교를 옮긴 건 아닌데. 설레는 마음에 같이 등교를 하기로한 친구와 만나기로 한 7시 45분보다 훨씬 일찍 나와 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지금은 무려 아침 7시 27분이 되시겠다. 다시 집으로 갔다 오기엔 애매한 시간이다. 멍청한 표정으로 친구네 집 근처의 지하철역 앞에 서서 아직은 어색한 새로운 교복을 매만지고 있을 때였다.
2년간 남자와 말을 섞은 적이 없다보니 이제는 아무 남자만 봐도 다 좋은 지경에 이른 것인지, 강서구청 역에서 막 나오는 그 애가 내 눈에 들어왔다. 잠시 스친 모습이었지만 워낙 내겐 강렬했던 순간이었다. 검은색 교복 바지에 빨간색 후드티를 입고 자기 등짝만한 조던 백팩을 맨 그 애는... 내게 이상형이랄 것은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내 이상형 같았다. 내일 한 번 더 보고싶은 얼굴이었다. 지금 시간대에 맞춰 나오면 내일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전학을 왔지만 반에는 아는 얼굴들이 태반이었고 수험생활의 완벽한 시작이라 소란스럽게 하기는 싫으셨던 것인지 담임 선생님은 칠판 앞에 서서 자기소개를 하는 등의 전학생의 인사치레는 시키지 않으셨다. 수업이 시작된 후에도 여전히 머릿속에선 오늘 아침에 보았던 그 애의 얼굴을 잊지않기 위해 반복적으로 떠올리는 일 밖에는 하고 있지 않았다. '망했다. 진짜 이러려고 전학온 건 아닌데.' 라는 생각이 1225번째로 들었을 때가 되어서야 공부에 집중할 수가 있었다.
새로운 공간이지만 익숙한 듯이 야자를 마치고 어둠속으로 나와 길을 걸었다. 같이 등하교를 하는 친구에게는 그 애의 존재를 말할 수 없었다. 아직 그 애의 이름도 모르는데 짝사랑이라던가 그런 것을 확정할 수 있는 단계도 아니었고, 부끄러운 소녀마냥 누구를 좋아하는 것에 대해 떠벌리는 성격도 아니였기 때문이다.
그냥 이번에도 누군가를 호감단계정도로 인식하고 놓쳐버리는 사람이겠지.
다음날, 같이 가자는 친구의 약속을 깨고 어제와 비슷한 7시 20분에 나 혼자만이 그 애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렇게 약속없이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이 처음인지라 뻘쭘하게 영어단어를 적은 종이만을 들고 시선은 오로지 강서구청역 2번 출구만을 향해 두고 있었다. 아직은 쌀쌀한 기운이 남은 3월인데도 이상하게 춥지 않았다. 그 애를 기다린다면 1월에 1시간이 넘는 시간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며 기다리기를 20분. 결국 오라는 그 애는 오지 않았고 제 시간에 등교를 하던 친구를 만나 같이 학교로 와버렸다. 지금은 왜인지 오한이 드는 것만 같다. 내일은 오늘같이 바보같은 짓은 안하리라 생각을 했다.
전학수속을 밟으며 서류들을 처리하던 와중에 문제가 생겨 교무실에 가는 중이었다. 지각을 한 것인지 한 구석에 몰려있는 학생들 사이에서도 그 애만을 찾았다. 지각을 한 건 아닌지 그 애는 없었다. 기대감을 완벽히 없애고 교무실에 들어가려는 순간,
"엇, 죄송합니다."
문을 열고 나오던 누군가와 부딪혔다. 내 눈높이에서 보인 명찰에는 나와 같은 색에 임영민이라는 이름이 적혀있었고, 그 뒤에 고개를 들었을 때는..
항상 웃는 모습을 하고 다니는지 생긋 미소지으며 내게 사과를 하는 그 애가 있었다.
"반장!"
"네?"
"오늘 조례 없으니까 니가 알아서 애들 조용히 시키고 수업 준비해."
넹. 이라며 귀엽게 인사를 하고 나가는 그 애의 뒷모습을 시야에서 없어질 때 까지 바라보았다. 한 번의 순간으로 수 많은 생각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반장인가 보구나. 공부를 좀 하는 편인가? 저 국어 선생님은 개학식 때 뵀던 5반 담임선생님이신데 그러면 그 애도 5반이라는 소리네. 아니, 이제는 이름을 알았으니 영민이라고 불러야하나? 나 혼자 그 애를 알고 생각하고 떠올리는데 영민아. 라고 이름을 부르며 그리기엔 죄책감이 들었다. 서류를 어떻게 해야 한다는 우리 담임 선생님의 말씀은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내일 한 번 더 물어보지 뭐. 그나저나 가까이서 보니 생각했던 것 보다 키가 더 컸다. 잘생겼고 또 후드티를 입었던 어제와는 조금 다른 느낌으로 단정한 교복이 잘 어울렸다. 완벽히 잠군 와이셔츠에 설렐 일이 있나 싶었다. 이제는 인정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나는 금사빠이며 영민이를 남자로 생각하는 마음이 내 마음을 통틀어 반 이상은 있다는 것을 말이다. 내일은 다시 7시 20분에 강서구청역 2번출구에서 그 애를 기다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