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
도
근
도
깨
비
소
년
다섯
너무나 푸르게 빛나고 있는 도깨비불을 보니 왠지 마음이 이상해졌다. 괜히 나까지 기운이 쭉 빠지는 느낌이었다. 박우진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철이 없는 건지. 심심한 건 잘 알겠는데 그렇다고 이름을 알려주다니,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싸우자는 건가.
선배의 푹 쉬라는 문자를 읽으면서 나는 박우진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얼떨결에 내 과외제자가 되어버린 박우진. 박우진의 굳어서 좀처럼 풀리지 않던 표정이 떠올랐다. 뭐가 그렇게 박우진을 화나게 만들었을까. 분명 무슨 일이 있었을 것 같다. 이유도 없이 그렇게 나와 선배에게 무례하게 굴 아이는 아니니까.
박우진이 돌아온 건 내가 소파에서 선잠에 들었을 때였다. 박우진의 얼굴을 보자마자 여러 감정들이 뒤섞여 복잡한 심정이 되었다. 우선적으로, 원망스러웠고 그 다음으론 미웠고 대체 왜 그랬는지 붙잡아 묻고 싶었고 시간을 돌릴 수는 없는 건지 간절하게 애원하고 싶었다. 굼뜨게 눈을 깜빡거리고 있는 나를 박우진은 여전히 무뚝뚝하게 내려보고 있었다. 그렇게나 채근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왜인지 좀처럼 입이 굳어 떨어지질 않았다. 박우진이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 아이의 손에는 어떤 풀들이 가득 쥐어져 있었다.
"잠깐 본가에 다녀왔어."
"…뭐?"
"발목 이리 줘."
박우진은 다짜고짜 내 발목에 손을 댔다. 따끔거리는 느낌에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발뒤꿈치가 다 까져 있었나 보다. 박우진이 손을 움직일 때마다 쓰라려 눈을 질끈 감았다. 오랜만에 신은 구두 때문이었다. 박우진이 집중하면서 내 발뒤꿈치에다 풀 찧은 것들을 살살 발랐다. 몰두하느라 좁혀진 미간이 내 아래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본가에 다녀왔다는 박우진은 머리가 잔뜩 헝클어져 있었다.
"뭐야?"
"병풀이야. 호랑이풀. 도원 근처에서 자란 거라 금방 아물 거야."
"그런 걸 묻는 게 아니잖아."
"그럼 뭐."
"네가 뭔데, 나한테 이거 발라주려고, 나 낫게 하려고 본가까지 다녀오냐고."
실은 아주 조금 고마운 마음이 있었는데. 이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어디에도 없었는데. 모진 말이 튀어나왔다.
"네가 나한테 구두 신겼어? 내가 신고 싶어서 신었던 거야. 신어서 내 발 이렇게 된 거고, 내 발 이렇게 상하게 만든 건 나야. 네가 아니라."
"……."
"근데 너 지금 대체 뭐 하는 거야. 박우진."
박우진의 표정이 아주 잠깐 일그러졌다가 이내 보이지 않게 되었다. 박우진이 고개를 아주 숙여버렸기에. 박우진의 표정이 더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쏘아붙이는 걸 관두고 입을 다물어버렸다. 나는 진짜 박우진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화풀이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앞으로 선배의 미래는 어떻게 되는 건지, 입게 될 화로부터 구원할 방법은 진정 없는지, 걱정되는 게 너무 많아서. 뭐라도 안 하면 미칠 것 같아서. 가만히 있으면, 내가 너무 무능한 구제불능 같아서. 나는 그러한 여러 이유들로 박우진에게 화풀이를 하고 있었다.
불현듯 마음에 어떤 것이 복받쳐 오르려고 했다. 그게 어떤 것인지는, 정말 알 수가 없었다. 박우진이 한참 후에 고개를 들어올렸다. 이 아이는 대체 무슨 죄목으로 내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가.
"네가 다치는 게 싫으니까. 못 견디겠으니까 난 뭐든 할 거야."
"……."
"허락해줘."
나의 천운이 우려고 했다. 고작 천운인 나 때문에. 나는 천천히 손을 들어올려 박우진의 엉망이 된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너는 대체 무슨 마음으로 풀들을 헤치고 다녔을까. 박우진의 머리칼 틈에 붙어 있는 나뭇잎을 떼어내며 나는 이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여덟 번 쯤 박우진의 머리칼에 손을 댔을 때, 억센 힘이 내 손목을 옴켜잡았다. 이윽고 내 이름이 불렸다. 박우진의 눈이 나에게 명령했다.
"날 허락해."
도깨비가 고백했다. 강압적인 목소리였다. 거역해선 안 되는 느낌이 들었다. 박우진의 주위로 몰려든 도깨비불들이 파랗다 못해 색이 없었다. 투명했다. 도깨비이자, 나의 천운이고 소년인 너. 나에게 삶을 이뤄주겠다던 너. 네가 말했던 삶이란 게 이런 걸까.
"허락 못해."
"……."
"다른 사람이 화까지 입어가면서 내가 다치지 말아야 할 이유, 그런 건 없어."
나는 박우진이 몸을 일으키는 걸 가만히 쳐다봤다. 박우진이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아플 것 같았다. 박우진의 눈시울이 발갛게 출렁거렸다. 그마저도, 아플 것 같았다. 발뒤꿈치가 욱신욱신했다. 심장근육 역시 억세게 욱신거리고 있었다. 박우진의 두 뺨에 눈물이 떨어지는 상상을 했다. 마음이 시큰했다. 그러나 나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박우진이 사라졌다. 박우진의 손이 닿았던 곳을 잠깐 만지작거렸다. 뒤꿈치가 싸늘하게 아팠다. 누가 살이라도 도려낸 것처럼. 흐윽. 이상한 소리가 나오면서 눈물이 나왔다. 두 손을 얼굴 위에 묻었다. 수상한 죄책감이 나를 덮치고 놓아주질 않았다. 아파서 우는 거야. 이건 아파서 우는 거야. 이건, 내 발목이 참을 수 없게 아파서 우는 거야……. 속으로 거듭 생각했다.
다음 날 나는 손목에다 박우진의 이름을 쓰지 않았다. 허무한 일요일이 지나갔다. 나는 무엇도 할 수 없었다. 식탁에 밥을 차려 먹는 것조차 힘겨웠다. 침대에 가만히 누워 나에게 일어난 일들에 대해 생각했다. 아직도 모든 것이 믿기지 않았다. 머리가 복잡했다. 잘못은 박우진이 했는데 왜 이렇게 마음이 무거운지 모르겠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지금은 박우진의 얼굴을 볼 용기가 없다. 그 얼굴이 또 무슨 말을 내뱉을지 모르고, 내가 그걸 감당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기 때문이다.
발뒤꿈치가 깨끗해졌다. 상처가 있었던 자리가 맞는지 의심이 갈 정도로 내 발목엔 작은 흉터 하나 남지 않았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박우진은, 천운이 나라서 그렇게 헌신적인 걸까. 아니면 내가 천운이라서 그렇게 헌신적인 걸까. 알 수 없었다. 먼저 도깨비의 배필이 될 생각 말라며 주의를 준 건 박우진이었다. 혹시나 도깨비를 연모하게 될 나를 두고 박우진은 일찍부터 벽을 세워놓은 것이었다. 그래놓고 왜 줄곧 본인이 상처 받은 표정을 하고 있는지. 내가 다치는 게 싫다며 그런 말로 왜 사람 마음을 흔들어놓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종일을 박우진 생각으로 보냈다. 손목에다 박우진의 획을 긋기만 하면 당장이라도 그 얼굴을 볼 수 있는데, 여전히 용기는 없었다.
복잡한 심정으로 액자 앞으로 갔다. 두 손을 모으고 할머니를 불렀다. 할머니, 전 대체 어떻게 하면 좋은 걸까요……. 하소연을 했다. 어떤 것이 옳고 어떤 것을 옳다고 믿어야 하는지 궁금했다. 박우진이 저지른 일을 실수로 넘기면 앞으로는 선배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할 것 같았다. 그렇다고 그걸 죄로 부르기엔, 박우진이 안쓰러웠다. 도깨비가 섬기는 건 하늘이었다. 천운의 안부를 챙기는 것이 곧 박우진의 일이었다. 박우진은 하늘의 뜻을 따른 것뿐이었다. 그런 박우진에게, 어제 나는 하늘을 허락할 수 없다고 말한 꼴이었다. 도깨비의 모든 운명을 부정하는 문장. 죄를 지은 건 나였다. 나는 비로소 무엇을 잘못했는지 깨달았다. 할머니. 저는 너무 두려워요. 두 손을 더욱 세게 모았다. 천운을 정말 천운으로 생각하게 될까 봐.
잠에 든 건 새벽 늦은 시간이었다. 꿈을 꿨다. 주변에 블록이 흩어져 있었다. 이건……. 어린 시절의 나였다. 양쪽으로 땋은 머리가 어깨 근처를 간지럽히고 있었다. 큰 소리가 났다. 아빠랑 엄마랑 또 싸우나 봐. 어린 목소리로 웅얼웅얼 중얼거리다 블록을 집었다. 숫자를 세며 블록을 쌓아서 올리기 시작했다. 천천히 다섯까지 세고 나면, 아빠와 엄마의 다툼소리도 잦아들곤 했었다. 빨간 블록을 집었다. 하나, 아빠의 화난 목소리가 들렸다. 둘, 엄마의 흐느끼는 소리가 희미하게 반복됐다. 셋,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넷, 찢어지는 비명이 들렸다. 다섯, 그리고 조용해졌다. 나는 차곡차곡 쌓아진 다섯 개의 블록을 쳐다봤다. 문득 옆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피가 뚝뚝 떨어지는 아빠의 모습이 보였다. 아빠가 쥐고 있는 건 칼이었다. 그리고 그 뒤로 언뜻 박우진이 보였다. 우린 꿈 속에서 눈이 마주쳤고, 나는 순간 내 유년이 새롭게 쓰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기분 나쁜 꿈이었다. 더듬더듬 핸드폰 알람을 껐다. 하도 도깨비한테 시달려서 그런 꿈을 꿨나 보다. 찝찝한 기분으로 일어나 학교 갈 준비를 했다. 학교 가기 전에 박우진을 불러내 사과라도 하고 말로 좀 풀고 싶었는데 또 고민이 됐다. 딱 하루 안 본 것뿐인데 아주 오래, 그리고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내 오른 손목을 쳐다보며 한참을 망설였다. 이내, 떨리는 손으로 손목에다 글자를 적어가기 시작했다. 내 천운의 이름 세 글자.
묻고 싶은 게 많았다. 많았는데, 얼굴을 보니 입이 다물어졌다. 박우진은 평소와 다름이 없는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났다. 오히려 그 얼굴이 천연덕스럽기까지 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박우진은 내게 그렇게 굴었다.
"안녕."
"……응, 안녕."
박우진은 내게 먼저 무덤덤한 인사를 건넸다. 나를 쳐다보는 눈빛이 건조하고 찼다. 꼭 한겨울의 기후처럼 느껴졌다. 나는 첫 번째로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박우진이 이번에도 선수를 쳤다.
"발목은?"
"어, 괜찮아……. 신기하더라, 말끔하게 나았어."
"그러니까 무슨 구두를 신어서는."
"…이제 안 신으면 되잖아."
박우진의 두 눈이 내 발목 근처로 닿았다가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다행이네."
눈빛은 차가운데 말투가 따뜻했다.
"계속 걱정했거든."
어제. 박우진이 덧붙였다.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별 말도 아니라는 듯이 박우진이 소파에 편한 자세로 앉았다. 앉으라며 손짓하기에, 그 옆에 조금 떨어져 거리를 두었다. 그리고 그냥 그렇게 한참을 앉아있었다. 옆에 앉은 박우진이 가끔씩 나를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나는 일부러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눈이 마주치면, 하려고 마음 먹었던 말을 쏟아내지 못할 것 같았다. 나는 어렵게 어렵게 입을 열었다.
"미안했어."
"뭐가?"
어떤 높고 낮음도 없는 음성이었다. 마음을 단단히 먹자고 결심했다.
"나 때문에 힘들게 약까지 구해다 줬는데……."
"……."
"…괜히 나쁜 말로 상처 줘서."
"응."
박우진이 고갤 끄덕였다. 그게 끝이었다. 나의 사죄는 간결하게 끝이 났다. 박우진은 미안한 내 표정을 확인하고 더 이상 바라는 게 없는지 한결 편안한 모습이 되었다. 더 이상 쏘아보지도, 화내지도, 우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냥 박우진이었다. 그냥 보통의 박우진으로 돌아왔다.
"저기……. 궁금한 게 있는데. 그럼 선배는 어떻게 되는 거야? 화를 면할 방법은 없어?"
"도깨비의 이름과 얼굴을 알아서 화를 입는 건 인간에게 해당되는 얘기야."
"……뭐?"
"그 새끼랑 가까이 지내지 마."
"……."
"살아있는 느낌도, 죽어있는 느낌도 없었어."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버렸다. 백지였다. 무엇도 없었다.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지. 장난도 정도껏 하라고 소리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었지만 박우진의 표정이 너무 진지했다. 혼란스러웠다. 박우진을 의심하고 싶은 건 결코 아니었다. 다만 바로 믿기엔 좀 무리가 있었다.
"박우진, 네가 날 챙기려고 하는 건 잘 알겠는데 무슨 그런 말까지 하면서……."
"내 말 들어."
"……."
"그 새끼랑 아무 것도 하지 마."
"……."
"눈도 마주치지 말고, 인사도 하지 말고 같이 어디 가지도 말고 말도 섞지 마."
박우진은 단호했다. 더는 내가 무어라 말을 덧붙일 수 없게끔 만들었다. 무수히 많은 생각들이 피어올랐다. 적어도 박우진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진 않았다.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니라니, 그럼 대체 뭐라는 거야. 선배는 내가 유일하게 알아가고 싶은 존재였다. 많고 많은 이들 중에 왜 하필이면 선배가. 나는 좀처럼 믿기가 힘들었다. 믿고 싶지가 않았다.
의욕이 사라졌다. 몸에 힘이 풀렸다. 선배의 얼굴이 머릿속에 어른어른 퍼져가고 있는 중이었다.
"누나, 나 숨이 너무 막혀. 나 숨 좀 쉬게 해주라……."
"……."
"내가 누나 지킬 수 있게 해줘."
-
안녕하세요. 32입니다!
보통 한 편 분량에 우진이와 영민이 둘 다 등장시키려고 노력하는 편인데 오늘은 분량 조절 실패로 아쉽게도 영민이가 나오지 않았네요...! ㅜㅜ
다음부턴 주의해서 쓰도록 하겠습니다!
저번 편에 많은 분들이 댓글을 달아주셔서 놀랐어요. (꺼이꺼이)
암호닉 신청해주신 분들도 너무 감사드립니다. ㅜㅜ
이제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시작될 것 같아요.
이 글 제목이 너무 길어서 제 맘대로 도.도.도로 줄여봤는데 어떠세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우리 앞으로 도도도에서 쭉 계속 함께하기로 해요... ♥
봉봉 님, 햄찌 님, 칭어랭니 님, 슘슘 님, 사랑둥이 님 외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 진심으로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조만간 또 만나요~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