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운 여름 날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학원에 가던 난 훅훅 찌는 듯한 더위에 걸음을 우뚝 멈춰섰다 이내 발걸음을 다시 옮겼다.
" 이 놈의 여름은 언제 끝나는 거야 진짜. "
끈적 끈적 들러붙는 땀과 두통을 동반하는 더위가 내가 여름을 싫어하는 이유였다. 조금만 밖에서 있어도 열사병으로 죽을 것 같아 일상생활 조차 불가하니 말 다했지. 땀에 젖어 갈라진 머리칼을 정리하고 학원에 들어섰다. 여름방학 특강이랍시고 밤 10시까지 잡아 놓는 학원도 싫고 그냥 다 때려치고 늘어지고 싶었다. 이번 여름은 특히 더 지치고 힘든 것 같다.
집에서 좀 먼 학원에 수강해서 아는 애가 몇 없기에 조용히 자리에 앉아 이어폰을 꼽았다. 파란색의 여름 노래를 들으니 더위가 좀 가시는 듯 했다. 그렇게 몇 분이나 지났을까, 한 아이가 들어왔다. 전정국. 그 아이였다.
잘생겼다고 소문 난 우리반 남자애. 딱히 친해질 계기가 없어 서로 얼굴만 아는 사이었다. 아 나만 그 아일 알지도. 각설하고, 뭇 열아홉 소녀가 그렇 듯 난 반에서 제일 잘생긴 그 아이에게 어느 정도의 호감을 갖고 있었다. 그 아이의 등장으로 몇 여자 아이들이 술렁댔다. 모두 같은 생각을 하겠지. '잘해보고 싶다' 이내 쓸데없는 생각이라 단정짓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럴리가 없지.
문득 고개를 들어 그 아이의 동선을 눈으로 쫓았다. 그는 자리를 쭉 훑더니 내 바로 앞자리에 앉았다. 두근. 그 아이의 검은 뒷통수가 내 마음 속에 들어왔다.
"너 우리반이지?"
"..응? 아 어."
"나 여기에 아는 애 없어 완전 찐따야. 잘해보자."
그 아이의 잘해보자는 말이 그 땐 왜 이리 떨렸는지. 그렇게 전정국과 나의 여름이 시작됐다.
그 여름, 우리는
"전정국!!"
"왔어?"
"숙제했냐?"
"아이고 또 안하셨어요?"
흐흐. 바보같이 웃었다. 그 아이도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더니 이내 웃어보인다. 다른 색의 웃음이 섞어들어간다.
열심히 수학 숙제를 배끼는 중 뜨거운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렸다.
"왜. 뭐 묻었어?"
"아니. 오늘 어디가? 화장했네."
화장은 맨날 했거든. 불퉁하게 튀어 나온 입술을 그 아이가 턱 잡았다.
"그 놈의 오리입. 그만 내밀라 했지."
오기로 더 내밀자 졌다는 듯 허탈하게 웃는 그 아이였다. 그 아이의 작은 웃음에 내 볼이 붉게 변해갔다. 그 아이가 잡은 입술 끝도 뜨겁게 물들었다.
"더워. 떼라"
칫. 아쉽다는 듯한 웃음을 보고 마구 마구 오해하고 싶어졌다.
자꾸.
그 여름, 우리는
정국이와 난 뜻뜨미지근한 관계를 이어갔다. 친구도 연인도 아닌 그런 관계. 내 착각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그렇게 본 목적과는 다르지만 학원을 열심히 다녔고 잘 다니다 보니 개학이 코앞이었다. 정국이와 더 가까워 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다. 개학하면 정국이는 이 학원을 그만 다닐꺼라 했다.
여름 방학 특강 마지막 날 선생님께서 치킨과 피자를 쏘셨다. 한창 먹을 나이인 우리는 맛있게 또 감사히 흡입했다.
"성생니, 왕죵 맛잉엉용."
"입 좀 닫고 먹어라."
"헹"
입에 피자를 가득 넣어 우물거리며 선생님께 감사 인사를 드렸지만 애정섞인 핀잔만 듣고 말았다. 힝 나 상처받았어. 장난스레 눈물을 흘리는 척 고개를 돌리자, 정국이가 또 장난스럽게 그런 나를 놀렸다.
"으 더러워. 입 좀 닫아 김탄소"
"와 드릅나."
"응 완전.."
"이게 진짜!"
퍽퍽. 전정국의 팔뚝을 아프지 않게 때린 뒤 이 장난스러운 대화는 끊겼다. 맛있게 식사를 끝낸 뒤 우린 각자 집으로 향했다. 행운인지 정국이와 나는 집 방향이 같아서 종종 같이 집에 가곤 했다. 그 날도 여느 때와 같이 집에 가던 중이었다.
"정국아"
길가에 세워진 가로등 탓이었는지. 그 날 따라 우리의 분위기는 꽤 묘했다.
"응."
"우리.. 개학 하고나서도 친하게 지낼꺼..지..? 그지?"
"당연하신 말씀을 하고 그러세요."
찡긋 정국이의 콧잔등이 움직였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 아이의 표정이었다. 개구장이 같은 그의 모습을 가장 잘 나타내는 표정인 것 같아서.
여름 밤의 공기는 하염없이 달았다. 온 세상이 나와 그 아이의 색깔로 물든 것 같은 한 여름 밤. 우리는..
"탄소야"
"응?"
첫키스를 했다. 그 묘한 가로등 아래서.
"네가 어떤 앤지 더 알아가고 싶어."
발 끝부터 저릿해오는 기분이 들었다. 우리의 뜨거운 연애의 신호탄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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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여름해입니다. 첫글이네요 하항. 예쁘게 봐주세요. 참고로 '그 여름, 우리는'은 단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