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_모리-Don't You Let Go
_K의 변호
w.애매
그러므로 K, 그는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아마 K라는 사람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라곤 저밖에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의 겉모습에 속아 정작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알지 못합니다. 검은 양복과 색이 약간 바랜 듯한 노란 머리가 그를 자칫 무서워 보이게도 하지만 그는 무서운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소한 것에도 곧잘 웃어버리고 마는 그런 실없는 사람입니다. 알고 보면 착한 사람, 누군들 안 그렇겠느냐마는 그럼에도 그는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부디 K를 재고해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01
유독 그런 날이 있다. 평소 가던 길과 그렇지 않은 길 사이에서 고민하거나, 아주 중요한 물건을 잃어버리는 그런 날. 그리고 마침 오늘이 딱 그랬다. 그간 잘만 다녔던 왼쪽 길과 다른 날 같았으면 눈길 한 번 주지 않았을 오른쪽 길 가운데 고민하던 나는 충동적으로 오른쪽 길에 들어섰다. 그 길이 왼쪽 길보다 목적지까지 정확히 20분이 더 걸린다는 사실을 기억한 건 이미 많은 걸음을 뗀 후였다. 그래 뭐 까짓것 20분쯤이야, 하며 자위하던 나를 기필코 달리게 만든 건 핸드백 속 USB였고, 무엇보다도 내가 이번 팀 과제의 ppt 담당자라는 것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것은 그동안 쓸 데가 없었던 나의 달리기 실력이었다. 그러나 20분을 여자저차 10분으로 대폭 감축시켜 커피숍에 도착했을 때, 나는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야만 했다.
“뛰어오신 거예요? 뛰다가 떨어진 거 아닐까요?”
“아으... 진짜 다들 미안해요... 금방 찾아올게요.”
“같이 가드려요?”
“아니요, 괜찮아요..!”
숨도 채 고르지 못하고 또 한 번 달리기 시작한 내 모습이 오늘따라 그렇게 초라해 보일 수가 없었다. 커피숍 한구석에서, 언젠가 ppt는 자기에게 맡기라던 최고참 선배를 새내기들은 지금쯤 현란하게 씹고 있을 것이었다.
“줄이라도 달아놓을걸, 작아서 찾기도 힘드네.”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유독 그런 날이 있다. 괜한 일로 모든 게 꼬여버리는. 괜하게 새로운 길로 들어섰다가 USB도 잃어버리고 선배의 자존심마저 잃게 되는 날. 그리고 그 USB를, 어느 정체 모를 사람이 나보다도 먼저 주워버리는 그런 날 말이다.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였다. 남의 집 담벼락에 기대앉은 모양새로 손안에서 작은 USB를 이리저리 굴리고 있는 사람은. 아 잘못 걸렸다. 제일 먼저 든 생각이었다. 검은 양복과 노란 머리, 내 짧은 지식으로는 도무지 양아치라는 결론 밖에 나오지 않았다. 내가 노트북에 ppt를 따로 저장해 놓았던가. 아 USB에 옮기고선 바로 삭제했지. 그래, 나는 한 치 앞도 모르는 빡 대가리였다.
“그, 그거 제 건데요.”
더듬지만 않았다면 꽤 강하게 느껴지는 어조로 나는 말했다. 그러자 곧바로 남자의 시선이 닿았고. 그때는 정말 숨이 턱 막히는 것만 같았다.
“가져가요.”
“네?”
생각 외의 대답이었다. USB를 쥐고 있던 손이 내 쪽으로 단단히 뻗어져 나왔다. 그러나 선뜻 받아들지 못한 건, 그럼에도 무서운 기세를 뿜어대는 눈빛 때문이었다.
“라이턴 줄 알았네.”
“...네?”
“어쩐지 불이 안 나오더라.”
계속 캡을 여닫던 게 그 이유였나. 어딜 봐도 라이터처럼 생기진 않았는데. 나는 황당함에서 우러나오는 웃음을 참으려 이를 악물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아니 아마 모르는 것 같은 이 남자는 USB를 내 손에 직접 쥐여주고서야 자리를 떠났다. 무튼 다행이라는 생각뿐이었다. 하루가 좀 정신없긴 해도 크게 잘못된 일은 없었다. 이제 조원들이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커피숍으로 돌아가 과제를 끝내면 그제야 한숨 돌릴 수 있을 것이다.
30분 전, 오른쪽 길로 들어섰던 것만큼이나 충동적으로 나는 남자가 지나간 길을 돌아봤다. 조용한 골목길엔 나 혼자였고 남자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럼 발표하시는 분들 대본 작성하시고 단톡방으로 내일모레까지 보내주세요.”
“네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언니가 워낙 ppt 잘 만들어주셔서 일이 쭉쭉 풀렸네요.”
뭘요, 입꼬리가 형편없이 올라갔다. 긴장이 풀리자 피로는 급격히 몰려왔다. 기운 빠진 몸으로는 웃는 것조차 맘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남아 있던 마지막 한 명마저 빠져나간 자리엔 삶은 오징어마냥 늘어진 내가 있었다. 아무래도 가는 길에 간식을 좀 사야 할 것 같다. 이왕이면 단 걸로. 당 떨어졌다는 말 말고는 지금 몸 상태를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오늘 여러모로 나를 곤란하게 만들었던 USB를 핸드백 가장 깊숙한 곳으로 밀어 넣었다. 아, 그러고 보니 여기에 매달아 놓을 줄도 하나 사야겠다. 다시 잃어버리더라도 길을 지나던 누군가 이게 라이터인지 USB인지 정도는 구분할 수 있도록 말이다.
/02
그러나 다시 남자를 만난 건 정말이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라이터 어떤 거로 드릴까요?”
“저거, 제일 작은.”
“네, 500원입니- 아 저희 가게가 1000원 이하론 카드결제가 안 되시는데요...”
어디든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았다. 저 멘트 나도 얼마 전까지 정말 지겹도록 달고 다녔는데. 바구니에 과자를 쓸어 담다 말고 고개를 빠끔 들었다. 작게 실랑이가 붙었는지 어쩔 줄 몰라 하는 알바생의 모습이 보였다. 카드 거부야 사장 잘못이라 쳐도, 아무런 힘없는 알바가 무슨 잘못이겠거니 생각했다. 손님이 누구인지는 진열대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지만, 얼핏 실루엣만 봐도 덩치는 좋은 것 같았다. 곧 울 것 같은 알바생의 눈과 마주쳤을 땐 나도 모르게 몸을 아래로 숙여버렸다.
“차까지 갔다 오기 귀찮은데, 외상 달아놔요.”
“네? 손님 외상은...”
“여긴 뭐 안되는 게 이렇게 많아.”
“죄, 죄송합...”
“여기 500원이요. 50원짜리 섞여 있어요.”
인생이란 선택의 연속이라고 누가 그랬는지, 진심으로 틀렸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 인생이란 그저 충동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마침 지갑 속의 50원짜리 동전들은 이런 나의 충동에 열심히 일조하고 있었다.
“...네! 결제되셨습니다.”
“?”
“저기요, 알바생이 무슨 힘이 있다고 그렇게 몰아붙이세요.”
“나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아찔하게 높은 위치에서 나를 잠자코 내려다보는 눈이 있었다. 그리고 검은 양복과 노란 머리. 손에는 정확히 USB만 한 아주 작은 라이터를 든 남자였다.
“어 아까-”
“귀찮게 됐네. 따라와요.”
“네?”
“차에 돈 있으니까 따라오라고.”
“아, 아뇨.”
“안 받겠다고.”
“아니 그게-”
“그냥 가서 돈 받고 끝내죠. 내가 하는 일이 원래 상호 깔끔한 걸 선호해서 그런 거니까.”
그리고는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나가버린다. 따라오라는 건가 지금.
“아 저기... 방금 감사했습니다.”
“아녜요. 그나저나 괜찮으세요? 남자분이 겁주는 것 같던데.”
“네? 아, 아뇨. 손님은 아무 말도 안 하셨는데 그냥 너무 눈빛이 무서워서 혼자 겁먹었었나 봐요.”
[나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그리고 나는 곧장 유리문을 열어 편의점 밖으로 뛰쳐나왔다. 저 멀리 차에 기대선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그 와중에 차마저 검은색이라는 게 그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었다.
“왔네.”
“네, 뭐...”
“여기 500원.”
“...일단 그 전에, 아까 오해한 것부터 사과드릴게요.”
“그 정도야.”
“기분... 안 나쁘세요? 대놓고 나쁜 사람으로 몰았는데.”
“맞아요. 나쁜 사람."
“네?”
“볼일 끝났고, 전 갑니다.”
내가 충동적인 것만큼이나 남자는 홀연한 사람이었다. 남자의 반응을 보아하니 몇 시간 전 일을 기억하는 건 나뿐인 것 같았다. 검은색 세단이 좁은 골목을 부드럽게 빠져나가는 뒷모습이 보였다. 어쩐지 아까와 비슷한 상황처럼 느껴졌다. 손바닥 위엔 500원짜리 동전만이 남아 있었다.
언젠가 K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자기는 나쁜 사람이라고. 나는 그럴 때면 마음이 아팠다. 사람은 끼리끼리 논대, 그럼 너를 좋아하는 나도 나쁜 사람이야. 대답하는 나에게 K는 좋은 사람처럼 웃었다. 그건 한 사람의 삶을 구원하는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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