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통이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그것은 허한 벌판의 들소떼처럼 요란하게 오기도 하고,바다 위를 날아다니는 갈매기떼처럼 잔잔하게 오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나에게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리고 그것이 전자도 아니고 후자도 아닌,노란 옥수수에서 옥수수알 한 알이 떨어지듯이 사소한 것일 줄은 더욱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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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늘 성장했어요."
"성장?"
사람이 입술을 삐죽였다.믿지 않는 눈치였다.
나는 오늘도 어김없이 흰 우유를 내미는 사람을 올려다보곤 다리를 꼬았다.주머니에서 벗어두었던 양말뭉치가 툭,떨어졌다.뒤집어진 노란 기린이 처량해 보였다.
안 먹어요,나는 말했다.사람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안 먹어?"
"지금 그 질문이 나한테 왜,라는 말을 붙인 것이 처음이라는 거 알아요?할 질문이 없어서 처음 하는 질문이 고작 그거에요?"
"처음으로 궁금해져서.왜 안 먹는데?"
"내가 군말없이 받아먹어서 몰랐나 본데,나 흰우유 싫어해요."
"알고 있었어."
"알고 있었으면서도 계속 줬단 말이에요?"
"응."
나는 기가 차 허,하고 내뱉었다.
그렇다면 더더욱 말이 안 된다.알고 있었으면서 왜,를 붙이다니.나야말로 묻고 싶었다.왜 그러느냐고.
컵에 든 우유를 들이키고 앉아 소파 위에 있는 쿠션을 집어드는 사람을 따라 나는 소파 밑으로 내려왔다.
왜 알고 있었으면서 계속 준 거에요?나는 물었다.흰우유를 좋아하게 만들어 보려고 했어.사람이 대답했다.
나는 빈 유리컵을 내려다보았다.컵 바닥은 희고 뿌얬다.
"그럼 물었어야 했을 질문은 왜 안 먹어,가 아닌 왜 먹어,였을 텐데?"
"나에겐 먹는 쪽이 좋으니까.그리고 쭉 마시다가 갑자기 안 마시니 그 쪽이 더 궁금할 수 밖에."
"그럼 야한 이야기 해 줘요."
"....이야기가 어떻게 거기로 가?난 너 성장 이야기나 들을래.얘기해 줘."
나는 볼을 부풀리곤 사람이 안고 있던 쿠션을 뺏어들었다.그리곤 맨발을 쿠션 위에 올려놓았다.
나는 사람과 있을 때 가끔,터무니없는 방식으로 얘기를 돌리곤 한다.
사람은 어깨를 으쓱이곤 턱을 괴고 나를 쳐다봤다.이러면 얘기를 안 해줄 수가 없게 된다.
"성장의 원인은 바로,토스트기였어요."
"식빵 구워먹는 거?"
"네."
"계속 해 봐."
"아침에 토스트가 갑자기 먹고 싶어서 식빵을 꺼내고 토스트기 코드를 꽂았어요.그런데 왠지 토스트 6개가 먹고 싶은 거에요.딱 여섯개면 행복할 것 같았어요.
"아침으로 토스트 여섯개라니,대식가인데."
"아니에요.딱 오늘만 그랬어요.그래서 홀린 듯이 한 구멍에 식빵을 세개씩 꽂았죠."
"너라면 그럴 법도 하다.성격 급하잖아."
"성격이 급했다기보단,토스트가 간절했을 뿐이에요.비록 토스트를 구울 때 넣었다 뺐다 반복하며 확인하긴 하지만."
"그래서.그게 끝이야?여섯개를 구웠더니 성장했다?"
"설마요.계속 들어 봐요.아무튼 토스트기 구멍은 두개인데,쑤셔넣은 식빵은 여섯 개니 토스트기는 안 그래도 화나 있었어요.그것도 모르고 전 넣었다 뺐다 반복했죠.너무나 먹고 싶었던 거에요."
"응."
"그랬더니 그 토스트기가 펑!소리를 내며 식빵 여섯 개를 토해냈어요.주방엔 식빵과 식빵 부스러기가 널브러져 있고,토스트기에선 김이 계속 나고."
"무서웠겠는데."
"예.무서웠어요.그 터진 토스트기가 제 성장통이에요."
"뭐?"
사람은 고개를 젖히고 푸하하하,웃었다.나는 눈을 찌푸렸다.
나의 성장통이 누군가에 의해 비웃음 당하는 모습은 여간 기분 나쁜 일이 아니였다.
사람은 나의 기분을 그제야 알아챈 듯 손등으로 입을 가리고 헛기침을 했다.
그리곤 말했다,그게 무슨 성장통이야.
나는 성장통이 맞다고 되받아쳤다.그건 사실이였다.
앞으로 토스트기에서 식빵을 두 개만 구울지라도,나는 절대 넣었다 뺐다를 반복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것이 성장한 것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하지만 나는 여전히 비웃는 듯한 사람을 보고 말이 안 통한다고 결론을 내렸기에,말을 돌렸다.
"자,이제 야한 이야기."
"안 돼."
"왜?"
"식빵 때문에 자신이 성장했다고 굳게 믿는 애한테 야한 이야기나 해 줬다는 것이 너무나 죄책감 들어서."
"그럼 이제 야한 이야기 안 해줄 거에요?"
"한동안은."
"쳇."
괜히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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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온 나는 토스트기를 쳐다봤다.
다행히,고장나진 않았다.비록 토스트를 망친 존재였지만,나의 성장을 도와준 존재이기도 했기에 고마운 토스트기였다.
나는 서랍을 열어 식빵 봉지를 꺼냈다.
우유식빵,이라고 적혀 있었다.나는 그제야 사람에게 왜 내가 흰우유를 좋아했으면 했는지 묻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아무렴 상관없었다.나는 이제 사람이 주는 우유를 받아 마시지 않을 것이고,흰우유를 좋아하게 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성장한 사람은 스스로 좋아하지 않는 것을 거부할 줄도 알아야 한다.
나는 금색 빵끈을 풀어 식빵 두 개를 꺼냈다.욕심 없이,딱 두 개였다.
그리곤 뽑아 두었던 토스트기 코드를 다시 꽂아 식빵을 한 구멍에 한 개씩 집어넣었다.
토스트기에서 팝.하고 토스트가 튀어 나오는 소리를 들을 때까지,나는 식탁에 앉아 다리를 앞 뒤로 휘젓고,턱을 괴고,머리칼을 빗었다.
넣었다 뺐다 확인하고 싶은 욕구가 간절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팝.소리가 났다.나는 토스트기로 달려가 토스트를 한 개 뽑아들어 입에 가져다 댔다.
만족스러운 맛이였다.나는 노릇노릇하고 맛있게 구워진 토스트를 베어물며 미소지었다.
나는 성장했다.